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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요칼럼
 

문학속의 에로티시즘

鄭宇東 0 1556
문학속의 에로티시즘
 
 
문학가들은 그들의 성적 환상을 대중에게 점염시킵니다.
D. H. 로렌스는 차탈레이부인에서 생기발랄한 성생활을 추구하며 한 성애 장면
에서 상대방의 벌거벗은 나신위에다 여러가지 꽃으로 장식하는 유희를 벌입니다.
천일야화 아라비안 나이트는 상고인들의 옛날부터의 많은 성적환상을 집적하고
있는 사례집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중세의 암흑기를 ㅡ 아니 어쩜 신앙우월의 시
대라고해야 할ㅡ 지내고 근대의 여명에서 나온 데카멜론도 그렇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핸리 필딩의 존 톰즈와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이 외설
시비에 걸려  출판이 금지되었고, 마광수교수의 즐거운 사라도 이런 유서에 속한
다고 하겠습니다.

나는 어느 글을 읽는 중에
금욕주의자 성인들은 성적환상에 민감한 사람들이어서 상상에 의하여 성적 욕구
를 해결하고 나아가서는 성적환상을 충족시킨 사람들이었을 것이다고 한 추단에
도 상당부분 일리있다고 생각하며 나도 그 추단에 동의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리고 내가 읽은 일본작가 구라다 하쿠조오(倉田百三) 가 <사랑과 인식의 출발>
에서 젊은 부부가 아침에 정교를 나누고 남편의 출근중 남편의 분신과 같이 있다
고 생각하는 장면은 성애를 멀리 초월한 지고지순한 순애보를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중국의 사대기서중의 하나인 금병매는 중국의 에로시티즘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람둥이 부자 서문경이 주인공인데 여섯부인중의 인기 많은 반금련과 이병아와 여
종 춘매의 이름을 한자식 따서 소설의 제목으로 한 애정행각의 소설입니다.
애정행각의 이야기야 그저 그렇고 그럴 것이니 접어두고 서두에 나오는 한 구절은
오래 오래 기억에 남아 있어서 적어 봅니다. 쓰잘데 없는 에로물로 치부한 소설에서
도 교훈소설 못지 않은 교훈을 주는 반면선생의 경우도 있나 봅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 염라대왕의 심판대 앞에서서 생전의 선생을 자랑하는 말에 자기
는 맛있는 육식을 금하고 소식을 하며 살았으니 큰 보상을 하여 달라 하였습니다.
확인을 하자고 해부를 하니 먹고 싶은것을 참느라고 고인 침이 머리 끝까지 차올라
와 있었다 합니다. 먹지는 않았지만 죄지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경계의 말입니다.

성경에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간음자라 정죄 하였습니다.
미술에서 보고 음욕을 품고 간음하는 것이 시간(視姦) 이라면
음악에서 듣고 음욕을 품고 간음하는 것은 청간(聽姦) 이 아닐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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