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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상의 10대 미인

鄭宇東 0 3095
한국역사상의 10대 미인
 

1. 관나부인(貫那夫人) [ ?~? 고구려 중천왕]
    "서해로 흘러간 장발 미인"
관나부인은 얼굴이 아름답고 두발이 길었다고《삼국사기》에서 전한다.
관나부인이 왕의 총애를 받게 되자, 이를 시기한 왕후 연씨(椽氏)는 "지금 위(魏)
나라에서 천금을 주고 장발을 구한다 하니 장발미인을 위나라에 보내면 다시는
우리 나라를 침범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여 관나부인을 위나라로 보내려고
하였다. 이것을 들은 관나부인은 왕에게 "왕후가 나를 가죽 주머니에 넣어 바다에
버리려고 하니 집에 돌아가게 하여 주십시오"라며 왕후를 참소하였다. 하지만 왕
은 그 사실이 거짓임을 알고 정말로 관나부인을 가죽 주머니에 넣어 서해(西海)에
던져버렸다.

2. 도미(都彌)의 처(妻) [?~? 백제 개루왕]
    "일편단심 민들레"
도미의 처(이하 처)는 백제 개루왕 때의 평민으로, 미인인데다가 절개가 굳기로 유
명했다고 《삼국사기》와 함께 《도미설화》에서 전하고 있다. 설화의 내용을 소개
하자면 이렇다. 도미의 처가 미인이며 절개가 굳다는 소문을 들은 개루왕이, 처의
절개를 시험하기 위해 그녀와의 동침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처는 여종을 변장시켜
대신 내보냈고, 화가 난 개로왕은 도미의 두 눈을 뽑아버렸다. 이제 개로왕과의 동
침을 더이상 피할 수 없게 되자, 끝내 거부하며 남편 도미와 함께 고구려로 도주하
였다고 한다.

3. 미실(美室) [549 ~ 606 신라 진흥왕~진평왕]
  “삼대(三代)를 쥐고 흔든 색(色)”
미실은 제2세 풍월주 미진부(未珍夫)의 딸로 절세의 미모와 절정의 색공(色功)을
갖춘 음녀(淫女)로 《화랑세기》는 전한다. 맨 처음 지소태후와 이사부 사이에서
태어난 '세종'에게 시집을 간 뒤, 화랑 사다함과도 정분을 나누었으며 진흥왕과
동륜태자, 금륜태자(진지왕) 3부자와 모두 연을 맺었다.

신라에서 내로라하는 사내들과 모두 정을 통한 미실은 자연히 천하의 권세를 쥐었
다. 신라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진흥왕까지도 미실과의 색사 끝에 43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고 하니, 가히 미실의 미색을 알 만하다.

4. 선화공주(善花公主) [ ?~? 신라 진평왕]
    "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사랑"
선화공주는 진평왕의 셋째 딸로서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다고 《삼국사기》와 함께
《서동요》에서 전한다. 선화공주를 연모한 서동(薯童)은 선화공주를 얻기 위해
선화공주를 참소하는 서동요를 지어 퍼뜨렸다. 이윽고 동요가 금성 내에 퍼지자 진
평왕은 선화공주의 행실이 부정하다 하여 귀양을 보내게 되는데, 이 때 선화공주는
서동을 만나 결혼하였다. 이후 서동은 백제 무왕(武王)의 위에 오르게 되었고, 선화
공주는 황후로 추대되었다.

5. 수로부인(水路夫人) [? ~ ? 신라 성덕왕]
    "동해의 아프로디테"
수로부인은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미인으로, 신라 향가 해가(海歌)와 헌화가
(獻花歌)의 주인공이다. 이 중 '해가'의 내용에 따르면 수로부인은 용모가 세간에
견줄 이가 없어, 용에게 납치된 것을 시작으로 깊은 산이나 못을 지날 때면 갖가지
신물(神物)들에게 붙들림을 당했다고 한다. 또 '헌화가'에서는 한 늙은이가 천길이
나 되는 바위 위에서 철쭉꽃을 꺾어다 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6. 기황후(奇皇后) [? ~ ? 고려 충숙왕~공민왕]
    "대륙을 호령한 미색(美色)"
기황후는 고려 사람 자오(子敖)의 딸로서 공녀의 신분으로 원나라에 건너간 뒤,
제2황후에까지 책봉된 미녀이다. 1333년 공녀로 원에 바쳐져 원실의 궁녀가 된
기씨는 원 순제의 총애를 받으며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339
년 기씨가 황태자 아이유시리다라(愛猷識里達獵)를 낳자 이듬해 제2황후에 책
봉되었다. 그러나 1366년 명을 건국한 주원장에게 연경이 함락되자, 기황후는
몽골 내지로 쫓겨갔고 그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

7. 어우동(於于同) [ ? ~ ? 조선 성종]
    "조선시대 스캔들의 헤로인"
於于同(어우동)은 성종때의 승문원 지사(承文院知事)였던 박윤창(朴允昌)의 딸로
태어나서 종실 명문인 태강수 (泰康守, 정4품) 이동(李同)에게 출가한, 정4품 혜인
(惠人)의 품작까지 받은 양반집 여자였다. 하지만 어우동은 천하의 색녀(色女)로
수십명의 조관이나 유생들과 난잡한 관계를 가졌다. 그러나 이 같은 방탕한 생활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다 하여 결국 사형되었다.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어우동,
실록에는 어을우동(於乙于同), 송계만록(松溪漫錄)과 대동시선(大東詩選)에는 어
우동(於于同)이라 나온다.《대동시선》에 <부여회고>라는 시가 전하고 있다.

* 夫餘懷古(부여회고) * 
                                ㅡ 於乙于同 ㅡ

白馬臺空經幾歲  백마대 빈 지 몇 해가 지났는고
백마대공경기세

落花巖立過多時  낙화암은 선채로 많은 세월 지났네.
낙화암입과다시

靑山若不曾緘黙  청산이 만약 침묵하지 않았다면
청산약불증함묵

千古興亡問可知  천고의 흥망을 물어서 알 수 있으련만
천고흥망문가지

[송계만록 中에서]
시댁이 종실이었으니, 족보를 따지면 태종 이방원(太宗 李芳遠)의 둘째 아들이자
세종대왕(世宗大王)의 바로 위 형님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손주며느리가 된다.
그런데 어우동(於于同)은 지나치게 색을 밝히는 게 탈이었다는 것이다. 마음에 드
는 사람과는 즉석에서 관계를 가졌고, 근친상간(近親相姦)도 마다하지 않았다 등
행실이 방탕하였다고 전한다.
팔촌 시아주버니가 되는 수산수(守山守) 이기(李驥), 육촌 시아주버니인 방산수
(方山守) 이난(李瀾)등과 간통했는데, 이는 율이 장(杖 100대, 도(徒) 3년에 고신
(告身)을 모조리 추탈하는 죄에 해당한다고 했다 등등으로. 결국 소박을 맞았는데
소박맞은 다음은 자유롭게 살았다고 한다. 특히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팔뚝이나 몸에 먹물로 자신의 이름을 문신해두기까지 했다고도 한다.
전의감(典醫監) 생도(生徒)였던 박강창(朴强昌)은 팔뚝에, 서리 감의동은 등판에
다가 이름을 새겨 넣었다고 한다. 어우동의 남성편력에는 병조판서(兵曹判書)
어유소(漁有沼), 직제학(直提學) 노공필(盧公弼), 아전 오종연, 과거 합격생 홍찬
등 조선 최고 권력층도 다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어우동에게는 번좌(番佐)라
는 딸이 하나 있는데 그 아비가 누군이지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녀는 동승지
김계창(都承旨 金季昌)의 끈질긴 탄핵을 받고 성종 11년 10월 18일 (조선왕조실
록 국역본) '어을우동(於乙宇同)을 교형(絞刑)에 처하였다'
대동시선(大東詩選)에는 그가 지은 부여회고(扶餘懷古)라는 시를 싣고, 송계만록
(松溪漫錄)의 글을 소개하였는데, “호서(湖西)의 창(娼)으로 농부의 딸이었으나,
단정하지 않아 그 시가 뛰어나나 싣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8. 장녹수(張綠水) [? ~ 1506 조선 연산군]
    "폭군을 조종한 궁녀의 치맛바람"
장녹수는 본래 제안대군(齊安大君)의 여종이었지만 용모가 뛰어나고 가무에도
능해 연산군에게 총애를 받으면서 숙원(淑媛)에 봉해졌다. 하지만 장녹수가 왕의
총애를 이용하여 국사에 간여하여 연산군의 실정(失政)을 부추기자, 뒤이어 일어
난 중종반정으로 참형을 받았다.

9. 황진이(黃眞伊) [? ~ ? 조선 중종]
    "명기인가 시인인가 송도 삼절인가"
황진이는 진사(進士)의 서녀로 태어났으나, 사서삼경을 읽고 시, 서, 음률에 뛰어
난 재능을 가졌다. 게다가 용모또한 출중하여 동네 총각이 황진이를 연모하다 상
사병(相思病)을 앓다 죽었는가 하면, 살아있는 생불(生佛)이라 추앙받던 지족선
사(知足禪師)의 10년 공든 탑을 무너뜨리고 파계(破戒)시키기도 하였다.

황진이는 서경덕, 벽계수 등 당대의 일류명사들과 교류하며 《만월대 회고시(滿
月臺懷古詩)》《박연폭포시(朴淵瀑布詩)》《봉별소양곡시(奉別蘇陽谷詩)》《영
초월시(咏初月詩)》등 수많은 작품과 시조를 남겼다. '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
를 둘에 내어~’는 그녀의 대표적인 시조이다.

10. 장희빈(張禧嬪) [? ~ 1701 조선 숙종]
    "피로 물들인 궁중 비사"
희빈 장씨는 본래 소의(昭儀)의 신분에 있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자식을 보지 못한
숙종의 총애를 받아 원자 균(훗날 경종)을 낳으며 희빈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기
사환국(己巳換局)으로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사사되고 남인이 집권하자,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폐출하고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서인이 재집권에 성공하자, 인현왕후 민씨가 복위되며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
되었다. 이를 시기한 장희빈이 밤마다 저주를 내렸는데, 이 사실이 발각되어 사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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