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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4대 미인

鄭宇東 0 2421
중국의 4대 미인


세계의 4대미인은
아프로디테 여신과 헬렌과 클레오파트라와 시바의 여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생활 버전으로 나의~ 로 시작하는 어머니, 애인, 아내, 딸이란 우스개말이 있고
유모어 버전으로 밀로의 비너스와 나란히 비교한 킬로의 비너스가 있습니다.
밀로의 비너스는 밀로섬에 사는 한 농부가 발견한 아프로디테의 대리석 조각상입
니다만 킬로의 비너스는 매우 뚱뚱한 여가수가 미인을 자처하니 한 사람이 체중이
많이 나가는 그 여가수를 킬로의 무거운 체중단위를 써서 놀리는 익살입니다.

각설하고, 중국의 미인들은 그 별명에 미인된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서시는 침어(沈魚)로 불렸고, 왕소군은 낙안(落雁)으로, 초선은 폐월(閉月)로,
또 귀비 양옥환은 수화(羞花)로 불렸습니다.
西施의 물에 비친 모습을 보느라고 헤엄질을 하지 않아 바닥으로 가라앉고
昭君의 아름다운 모습에 홀려 날개를 젓지 않아 아래 모래벌판에 떨어졌고
貂蟬은 달이 초선의 고운 자태에 무색하여 구름뒤로 얼굴을 숨겼다 하였고
楊貴妃는 정원의 꽃들이 미인을 대하여 부끄러워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曺飛燕은 4대미인에 들지 못해도 귀비가 통통한 미인의 대표격이라면
비연은 날씬하고 가벼워서 손바닥에서 춤을 추는(作掌中舞) 다이어트 미인의
대표격이어서 연수환비(燕瘦環肥)의 성어로 조비연과 양옥환이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1. 중국 최초의 미녀 공작원 서시.
'침어(沈魚) - 서시의 미모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조차 잊은 채 물밑으로 가라앉
더라.' 춘추전국 시기에 월나라의 저라산 기슭의 한 농촌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이광(夷光)이다. 어릴때 부터 천성이 곱고 용모가 아름다워 항상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하루는 서시가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데,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맑은 강물에 비쳤다. 이 때 물고기가 물에 비친 아름다운 서시의 모습에
도취되어 헤엄치는 것도 잊어 버리고 구경하다가 점점 강바닥으로 가라 앉았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서시를 '침어'라고 하게 되었다.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의 전쟁중에 모국인 월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서시는 적
국 군왕 부차(夫差)를 유혹 하기 위한 정치적 임무를 지고 부차의 애첩이 되어 그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미인계의 주인공이 된다.

 2. 흉노로 시집간 화친의 미녀 사절. 왕소군.
'낙안(落雁) - 왕소군의 미모에 기러기가 날개짓 하는 것조차 잊은 채 땅으로 떨어
졌다.' 서한시대 남군 자귀출신으로 이름은 장(檣)이고 자가 소군이다.
한(漢) 원제(元帝) 건소 원년. 전국에 후궁을 모집하는 조서가 내려져 전국 각지에
서 입궁한 궁녀들은 그 수가 수천에 이르렀다. 그 중 하나 역시 왕소군이었는데 그
때의 나이 18세 꽃다운 나이에 후궁이 되었다.
황제는 일일히 궁녀들의 신상을 파악할 수가 없어, 화공(화가)를 시켜 한사람 한사
람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하였는데, 후궁들은 조금이라도 튀게보이려 화공에게
내물을 바쳐 초상화를 더욱 예쁘게 그려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소군만은 집안이
빈천하여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화공이 화가나 왕소군의 초상화를 평범하게 그리
고 얼굴 위에 큰 점하나를 찍어버렸다. 그 후 왕소군의 초상을 본 황제는 추하게
그려진 그녀의 모습에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무려5년간이나 궁녀 신분으로 있었
던 것이었다.

그러던 중 원제 경녕 에 남흉노 선우 호한야가 원제를 알현키 위해 장안으로 왔다.
당시 흉노에 내란이 발생해 호한야의 형인 질지골도가 북흉노를 세워 남흉노를 위
협하고 있었다. 이때 한나라의 서역도호 감연수가 북흉노를 정벌하고 질지골도를
죽이자, 호한야는 황급히 원제에게 글을올려 알현을 청하고 신하의 예로 갖추었다.
호한야는 갖은 공물을 원제에게 받쳐 문안을 올리고 황제의 사위가 될 것을 청하였
다. 원제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과시
하고 싶어 자기 후궁 중에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시중을 권하게 된다.
이 때 호한야는 왕소군에게 반해 원제에게 청한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 한명
이어도 괜찮습니다.원제는 호한야의 제의를 수락하고 호한야에게 직접 선택하도록
하였다. 이에 호한야는 가장 아름다운 왕소군을 지적한 것이었다. 이에 황제가 뒤
늦게 왕소군의 절세미모에 반했지만 황제가 이미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기에
호한야에게 왕소군을 빼앗기게 된 것이었다.

 3. 삼국지를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킨 미녀. 초선.
'폐월(閉月) - 초선의 미모에 달도 부끄러워 구름 사이로 숨어 버리는 구나.'
초선은 중국 4대 미인 중에서도 가장 매혹적이며 미스터리한 인물로 베일에 쌓여있
다. 초선의 이야기 중에는 4가지의 설이 있다.

  (1) 왕윤(王允)의 가기(歌妓)라는 설.
왕윤은 영제때 예주자사에 임명되어 헌제가 즉위하자 다시 사도에 임명되었다.
당시 동탁은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옹립하여 정권을 전횡하고 있어 동탁을 제거
할 생각으로 미인계로써 그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한동안 적합한 대상
을 찾지 못해 고심에 빠져있었다. 가기 초선은 그러한 왕윤의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해 항상 정성을 다해 가무를 연출했다. 왕윤은 초선에게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
하고 도움을 청했다. 초선은 사정을 알고 성심을 다해 왕윤을 돕겠다는 의사를 표
시했다. 그녀는 왕윤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자신의 미모를 이용해 여포와 동탁 사
이를 이간질해 마침내는 여포의 손을 빌어 동탁을 죽이게 한다.

  (2) 동탁의 시녀라는 설.
동탁은 본래 양주의 호족으로 영제때 병주 목사가 되었다. 동탁은 군대를 이끌고
낙양에 진입해 소제를 폐위하고 헌제를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이에 조조와
원소등이 군대를 일으켜 반대하자, 그는 헌제를 협박해 장안으로 천도 후 스스로
태사가 되었다. 그 후 동탁은 여포에게 피살되었는데 <후한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탁은 여포를 기도위로 삼고 부자간이 될것을 맹세한 후 그를 매우 아끼고 신임
하였다. 그러나 항상 조금만 뜻을 이루지 못해도 동탁은 창을 뽑아 던졌으며 여포
는 권법으로 재빨리 피했다. 이로 인해 여포는 동탁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동탁은
또 여포에게 중각을 지키게 했는데, 여포가 몰래 그의 시녀와 정을 통하자 동탁은
더욱 불만을 가졌다." 여기에서 초선이 여포와 정을 통한 동탁의 시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 여포의 아내라는 설.
여포는 처음 병주자사 정원을 따랐다가 정원을 죽이고 동탁의 부하가 되었다.
그러다 다시 왕윤과 모의하여 동탁을 죽이고 분위장군에 임명되어 온후에 책봉되
었다가 결국 조조에게 죽게된다.
 <삼국지>에 인용된 <영웅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여포는 유비를 보고 그를 매우 존경하였다. 그래서 유비를 장막으로 초빙하여 아
내의 침상 위에 앉게 하고는 아내에게 명하여 절을 올리고 술과 음식을 내오게 했
다." 곧 여기에 나오는 아내가 초선이다.

  (4) 여포의 부장, 진의록의 아내라는 설.
<촉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잇다.
"조조와 유비가 하비에서 여포를 포위했을 때 관우가 조조에게 말했다. '여포가 진
의록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니 그의 아내를 첩으로 맞이하길 청합니다.' 조조가 그것
을 허락하였다. 싸움이 끝난 후 다시 여러번 조조에게 그 것을 말하자, 조조는 그녀
의 미모가 뛰어난 것을 의심하여 다른 사람을 보내어 보게 한다음 그 것을 만류했다.
이에 관우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여기에서 진의록의 아내가 매우 뛰어난 용모를
지닌 여인임을 알 수 있다. 원래 관우는 자신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 생각이엇으나
조조가 그 것을 만류하자 질투가 나 단칼에 진의록의 아내를 죽였다. 이가 곧 초선
이다.

 4. 시아버지 당현종을 홀린 경국지색 양귀비.
'수화(羞花) - 양귀비의 미모에 꽃도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원래 이름은 옥환(玉環)이다. 포주 영락 출신으로 어려서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숙
부 양립의 집에서 자랐다. 가무와 음률에 뛰어났으며 총명하면서 용모가 천하절색
이었다. 양귀비는 원래 '현종'과 '무혜비'의 아들인 '수왕 이모'의 비로 궁궐에 들어
갔다. 당시 양귀비의 나이 17세. 그러던 어느날 현종이 자기의 며느리인 양귀비의
어여쁜 자태를 본순간 첫눈에 반해 버렸던 것이었다. 그날 이후 현종은 양귀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아무일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현종은 자신의 측신인 환
관고력사를 불러 이일을 논의했고 고력사는 양귀비의 두몸종을 매수해 그녀들에게
양귀비의 마음을 흔들도록 하였다. 양귀비 역시 수왕에 대한 사랑보다는 부귀영화
에 더 욕심이 많았기에 수왕을 떠나 우선은 화산으로 가서 여도사 생활을 하다가
다시 현종의 궁으로 왔다. 양태진이란 이름은 바로 양귀비가 여도사 생활을 할때
얻은 호이다. 이때 현종은 아들 수왕에게 다소 미안했는지 위씨 성을 가진 여인을
아내로 삼도록 배려했다.
현종은 자기 품으로 돌아온 양귀비를 위해 궁궐을 마련하고 그것을 태진궁이라 하
였다. 그로부터 태진궁은 그들만의 사랑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 양귀비는 공식으
로 황후 책봉을 받은 적이 없으나 천보 4년에 '귀비'에 책봉된 이후 이미 고인이 되
고 없는 황후의 위치를 대신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조비연이 있습니다.
'작장중무(作掌中舞) - 가볍기 그지없어 손바닥 위에서도 춤을 출 수 있을 정도로다.'
동서고금을 통해 가장 날씬한 여인이 있다.
'날으는 제비'라는 뜻으로 본 이름 조의주(趙宜主) 대신 조비연(趙飛燕)으로 불린다.
뛰어난 몸매에 가무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 그녀는 한나라 성황제의 총애를 받아
황후까지 된다. 한번은 황제가 호수에서 선상연을 베풀었는데 춤을 추던 조비연이
갑자기 분 강품으로 물에 떨어질 뻔하자 황제가 급히 그녀의 한쪽 발목을 붙잡았다.
춤의 삼매경에 빠진 조비연은 그 상태에서도 춤추기를 그치지 않아서 조비연은 임
금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렇게 임금의 총애를 받은 그녀는 세상에 못하는 것이 없었다고 하지만 그 세월은
겨우 10년에 불과했다. 황제가 죽자 비연은 탄핵의 대상이 되었고 평인으로 걸식을
하다가 자살로 그 생을 끝맺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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