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의 오기
鄭宇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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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7
2011.09.30 17:21
라벨의 오기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은 스위스계 프랑스인을 아버지로
스페인의 바스크족 여인을 어머니로 하여 피레네 산중에서 태어난지 3개월만
에 파리에 옮겨 살게 됩니다. 음악애호가인 아버지의 권고로 7살 때부터 피아
노를 배웠고 1889년, 14살의 나이로 파리음악원에 입학했습니다. 같은 해,
파리세계박람회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이국정서가 풍부한 음악과 접하게
되었는데, 이 경험은 그가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바스크인의 피와 맞물려서
그의 음악에 깊은 영향을 남겼습니다.
1897년부터 G. 포레에게서 작곡을, A. 제달주에게서 대위법을 배웠습니다.
이 시기에 라벨은 스승 포레와 E. 사티에게서 큰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898년 "귀로 듣는 풍경"을 첫작품으로, 1899년에 피아노곡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에스파냐 무용곡의 일종)" 등 이국정서가 넘치는 개성적인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비평가들로부터는 별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로마상 콩
쿠르에서는 4차례 모두 대상을 획득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그는 이미 신진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 낙선 결과는 세론의 표적
이 되었으며, 파리음악원 원장의 사직으로까지 발전했습니다. 한편, 이 무렵
그는 "물의 장난(1901)" "현악 4중주곡(1902∼1903)"을 발표하여 새 세대의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획득했습니다. 이 시기에 평생을 두고 존경하게 된 C.
드뷔시와 만났습니다. 그리고, 드뷔시의 숭배자인 시인 트리스탕 클링그조르
의 시에 관현악 반주를 곁들인 가곡 "셰헤라자데(1903)"를 발표했습니다.
그 후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피아노곡 "거울(1904∼1905)" "밤의
가스파르(1908)", 오페라 "에스파냐의 한 때(1907∼1909)", 디아길레프의
의뢰에 의한 발레음악 "다프니스와 클로에(1909∼12)", 관현악곡 "에스파냐
광시곡(1907∼1908)" "어릿광대의 아침 노래(1918)", 가곡집 "박물지(1906)"
등의 우수한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후에, I.F. 스트라빈스키에 의해 "스위스
시계처럼 정밀하다"는 평을 받게 될 정도로 명석하고도 분석적인 구축력, 치
밀하고도 미세한 객관성은 이 무렵에 완성되었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우렁차
게 소리높여 부르는 것보다는 조용히 말을 건네는 스타일의 그의 가곡에 뚜렷
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제1차세계대전 후에는 활력 넘치는 문화상황에 고무되어 그는 재즈음악의 영
향을 받은 새로운 국면을 강조하게 되었으며, 1막 오페라 "어린이와 마술(19
20∼25)", 바이올린 소나타(1923∼27) 등을 발표하였습니다.
1927∼1928년에는 미국 연주여행 후에 유명한 "볼레로"를 작곡하였고,
1928년 파리 오페라하우스에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둔 뒤 발레영화로도 제
작되었습니다.
위대한 음악가가 그리 흔치 않았던 프랑스에서 라벨은 이미 청년시대에 그 두
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고전에 심취하는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라벨이 안고
있는 음악의 이국적 요소들이 눈에 거슬렸던 탓으로 라벨의 청년시절은 그 재
능을 옳게 평가받지 못하고 실망과 분노가 함께 치민 라벨은 미국으로 건너가
지휘자로 크게 명성을 얻었고, 이에 프랑스정부에서는 그에게< 레종 도뇌르/
Legion d'honneur)훈장을 수여하겠다고 세번씩이나 통고했지만 끝끝내 이를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싸르트르가 노벨문학상을 거부한 것도 이와 같은 프랑스
지성의 오랜 전통에 닿아 있으며, 프랑스 知性의 傲氣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은 스위스계 프랑스인을 아버지로
스페인의 바스크족 여인을 어머니로 하여 피레네 산중에서 태어난지 3개월만
에 파리에 옮겨 살게 됩니다. 음악애호가인 아버지의 권고로 7살 때부터 피아
노를 배웠고 1889년, 14살의 나이로 파리음악원에 입학했습니다. 같은 해,
파리세계박람회에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이국정서가 풍부한 음악과 접하게
되었는데, 이 경험은 그가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바스크인의 피와 맞물려서
그의 음악에 깊은 영향을 남겼습니다.
1897년부터 G. 포레에게서 작곡을, A. 제달주에게서 대위법을 배웠습니다.
이 시기에 라벨은 스승 포레와 E. 사티에게서 큰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898년 "귀로 듣는 풍경"을 첫작품으로, 1899년에 피아노곡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에스파냐 무용곡의 일종)" 등 이국정서가 넘치는 개성적인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비평가들로부터는 별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로마상 콩
쿠르에서는 4차례 모두 대상을 획득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그는 이미 신진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 낙선 결과는 세론의 표적
이 되었으며, 파리음악원 원장의 사직으로까지 발전했습니다. 한편, 이 무렵
그는 "물의 장난(1901)" "현악 4중주곡(1902∼1903)"을 발표하여 새 세대의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획득했습니다. 이 시기에 평생을 두고 존경하게 된 C.
드뷔시와 만났습니다. 그리고, 드뷔시의 숭배자인 시인 트리스탕 클링그조르
의 시에 관현악 반주를 곁들인 가곡 "셰헤라자데(1903)"를 발표했습니다.
그 후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피아노곡 "거울(1904∼1905)" "밤의
가스파르(1908)", 오페라 "에스파냐의 한 때(1907∼1909)", 디아길레프의
의뢰에 의한 발레음악 "다프니스와 클로에(1909∼12)", 관현악곡 "에스파냐
광시곡(1907∼1908)" "어릿광대의 아침 노래(1918)", 가곡집 "박물지(1906)"
등의 우수한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후에, I.F. 스트라빈스키에 의해 "스위스
시계처럼 정밀하다"는 평을 받게 될 정도로 명석하고도 분석적인 구축력, 치
밀하고도 미세한 객관성은 이 무렵에 완성되었습니다. 이러한 특징은 우렁차
게 소리높여 부르는 것보다는 조용히 말을 건네는 스타일의 그의 가곡에 뚜렷
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제1차세계대전 후에는 활력 넘치는 문화상황에 고무되어 그는 재즈음악의 영
향을 받은 새로운 국면을 강조하게 되었으며, 1막 오페라 "어린이와 마술(19
20∼25)", 바이올린 소나타(1923∼27) 등을 발표하였습니다.
1927∼1928년에는 미국 연주여행 후에 유명한 "볼레로"를 작곡하였고,
1928년 파리 오페라하우스에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둔 뒤 발레영화로도 제
작되었습니다.
위대한 음악가가 그리 흔치 않았던 프랑스에서 라벨은 이미 청년시대에 그 두
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고전에 심취하는 보수주의자들에게는 라벨이 안고
있는 음악의 이국적 요소들이 눈에 거슬렸던 탓으로 라벨의 청년시절은 그 재
능을 옳게 평가받지 못하고 실망과 분노가 함께 치민 라벨은 미국으로 건너가
지휘자로 크게 명성을 얻었고, 이에 프랑스정부에서는 그에게< 레종 도뇌르/
Legion d'honneur)훈장을 수여하겠다고 세번씩이나 통고했지만 끝끝내 이를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싸르트르가 노벨문학상을 거부한 것도 이와 같은 프랑스
지성의 오랜 전통에 닿아 있으며, 프랑스 知性의 傲氣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