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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記 - 金富軾을 위한 변명

鄭宇東 0 2863
三國史記 - 金富軾을 위한 변명

옛선인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저술하고 후대인과 학자들로부터 많은
질책과 욕을 먹고 있습니다. 삼국사기가 왕조가 바뀐 조선시대에 들
어와서 새로운 왕조의 건국이념에 따라서 많은 부분이 개찬된 사정
에도 불구하고 그를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고려 인종 23년(1145년)에 김부식(金富軾)등이 인종의 명에 따라
편찬한 삼국시대의 정사로서 중국의 정사체인 기전체의 역사서로서
본기 28권(고구려 10권, 백제 6권, 신라 · 통일신라 12권), 지(志)
9권, 표 3권, 열전 10권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1174년(명종 4)에 고려사신이 "海東三國史"라는서명으로
송나라에 보내었다는 기록이 왕응린의 <옥해(玉海)>에 합본했다
한것으로 보아 초간본은 12세기 중엽(1149~1174)에 이미 간행되
었음을 알 수 있으나 이 판본은 현존하지 않습니다.
2차판각은 13세기 후기로 추정되며, 성암본(誠庵本)으로 알려진 이
책은 잔존본(殘存本)이기는 하나 현존하는 <삼국사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일본 궁내청(宮内廳)에도 소장되어 있습니다.
3차판각은 1394년(태조 3)에 있었습니다. 이는 김거두(金居斗)가 쓴
발문에 의한 것으로 일실되었습니다. 4차 판본이 1512년(중종 7) 있
었는데 이는 이계복의 발문으로 확인됩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청장관전서 54권 앙엽기에 삼국사략
을 설명하면서 하륜 이첨 권근등이 황제국 관찬사서 삼국사기에서
"속되고 번잡스러운 것"을 뜯어고쳐 수정하고, 깍고 지워 삭제해 버렸
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삼국사기를 손질한 때가 1403년(태종 3년)경
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말하는
삼국사기의 "속되고 번잡스러운" 문구는 어느 부분이었을까?
속된 것은 부정적 개념으로 淨하지 못해 더러운 것입니다. 가증스러
운 일, 또는 거짓말입니다. 번잡한 것은 뒤숭숭하고 어수선하며,
사람이나 사물이 번거롭게 섞여 복잡함을 나타냅니다. 종교적 개념
까지 담았습니다.

신생 조선의 國是인 崇儒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종래의 관습, 제도등
을 단번에 깨뜨리고 새롭게 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까지 권
력을 장악하였던 계층을 대신하여 그 권력을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탈취하는 혁명적 권력교체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는 거대한
권력의 비호 아래 저질러진 엄정하여야 할 역사에 대한 분탕질이었
고 역사의 위조와 날조였습니다.

김부식은 철저하게 중국의 입장에서 삼국사기를 편찬함으로써
우리 역사의 상당 부분을 폄하하고 누락시켰기 때문에
첫째,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역사를 왜곡했으며
둘째, 고구려 백제의 역사를 의도적으로 축소시켰으며
셋째, 고구려는 장수왕대로부터 기록하여 호태왕을 누락시켰으며
넷째, 지역을 모호하게 하고 바꿔 기록했으며
다섯째, 철저한 사대적, 유교적 사상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만약 사기가 僞作되지 않았다면 이러한 질책과 비난을 받아 당연합니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전면 개편되어 날조된 이 역사서는 김부식의 이름만
빌려 왔을뿐 그의 작품이 아니므로 이 역사서를 어디까지 수긍할것인가
를 엄정히 분석-검토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김부식의 가계는 이러한 억울을 호소할 수 있는 자손은
손자 김군수(金君綏) 대(代)에서 끊어지고 말았으니 이또한 검은 세력의
음모라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현전하지 않는 원본삼국사기로 찬, 반의 시시비비는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지속될 것입니다. 이런 미해결의 과업을 위해,
뒤늦었지만 다행히도, 관련학자들은 송나라에 보낸 제1차 판각본등 1차
자료를 찾아 중앙아시아 등 유럽 일대까지 추적중 그 발견이 가시거리에
접근해 가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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