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 칸 조상의 비밀
鄭宇東
0
3748
2016.01.12 05:54
칭기스 칸 조상의 비밀
우리가 상식적으로 “몽골인” 출신으로 “세계정복자”라고 알고 있는
칭기스 칸의 선조는 “고구려(高句麗) 주몽(朱蒙)의 후손 발해(渤海)
왕족이었다”는 내용의 놀라운 사실을 담은 글을 읽었습니다.
지금부터 약 800년 전에 칭기스 칸의 선조와 그 자신의 행적에 관
해 기록한 사서 <몽골비사(元朝秘史)>가 있습니다.
그리고 칭기스 칸이 죽고 한세대가 지난 1260년경에
페르시아의 史家 주바이니는 <세계정복자史>라는 사서를 지어 그
에게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정복자"라는 칭호를 바쳤습니다.
나아가 1995년 워싱턴포스트지가 20세기까지 지난 천년간의 역사
속에서 최고의 인물로 칭기스 칸을 선정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4년 미국의 역사가 웨드포드(Jack Weatherford)는
칭기스 칸을 "현대세계를 창출한 사람"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역사상 가장 잔인한 침략자인 파괴자가 현대사회를 창출
하는 건설자로 둔갑하여 새로히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칭기스 칸(成吉思汗, 1155?~1227)은
원(元)나라의 태조(太祖)로 재위는 1206-1227년간이었습니다.
몽고 걸안부 팔지진씨(蒙古乞顔部孛兒只斤氏)로,
본명은 테무친(鐵木眞)이며 바이칼호 근처에서 출생했습니다.
태어난 연도에 대해서는 1155년과 1162년, 1167년 등의 이설이
있습니다. 9살 때 아버지 예수게이(也速該)가 죽자 부락이 쇠미해
졌습니다. 가난하게 성장했고, 당시 강세를 자랑하던 케레이트 부족
의 완칸 아래서 점차 세력을 키워, 금나라 대정(大定) 29년(1189)
몽고 씨족연합의 맹주(盟主)에 추대되어 비로소 칸(汗)이란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칭기스 칸은 10만이 안되는 몽골 기마병을 이끌고 중국과 유라시아
대륙에서 동시에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습니다. 몽골군은 이동에 편한
가벼운 그물갑옷, 도망가면서도 뒤로 화살을 쏘아대는 전술등 당시로
서는 가공할 만한 전투력을 갖춘 군대로서 공포를 이용한 심리전과
정보전을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이들은 몽골제국의 건설자로서 인류
사에 굵은 획을 그으며 하나의 정치 경제적 헤게모니 아래에 통합된
팍스-몽골리카를 구현하였습니다.
몽골제국은 인도와 동남 아시아의 일부를 제외한 아시아 전역과 유럽
의 헝가리까지 석권함으로서 초원과 내륙아시아의 범위를 훨씬 넘는
사상 최대의 제국으로 성장하여 1세기 반 동안 세계와 시대의 중심에
섰습니다. 대원-울루스를 중심으로 서북 유라시아의 주치-울루스, 서
아시아의 훌레그-울루스 등 크고 작은 일족 울루스 외에 다양한 인종
과 회원국가인 지역정권, 재래왕조, 토착세력을 묶는 느슨한 세계연방
이 되었습니다.
몽골은 세계사의 분수령이고 저수지로서 현대에 이르는 세계, 특히
구대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18세기까지 몽골의 유산을 업고 나
타난 오스만제국, 러시아제국, 명-청나라, 무굴왕조, 사파비왕조 등에
서유럽 국가는 얼씬거릴 수 없었습니다. 산업혁명과 근대사회 속에서
강력한 화기와 해군력으로 군사화 한 서유럽이, 식민지화와 이권확대
를 위하여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킨 후, 아시아 여러 나라를 분할한 것
은 19세기 후반의 일입니다. 이후 칭기스칸 몽골군의 전설적인 위업은
독일의 참모부 및 히틀러의 전격전 그리고 러시아의 군 운용체계 속에
서 그리고 레닌의 적색 혁명이념에서도 구현되었습니다.
칭기스 칸의 손자 훌라구가 다스린 일칸국(곧 오늘날의 이란, 이라크,
아제르바이잔과 우즈베키스탄 서부 지역에 자리잡은 몽골제국 4칸국
중 하나)의 재상이었던 페르시아인 라시드 웃딘이 자기 황제 가잔 칸
으로부터 ‘나의 선조인 칭기스 칸의 선조에서부터 내게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를 쓰라’는 엄명을 받고 1310년경에 지은 역사책이 "집사"
입니다. 이를 더 상세하게 보완한 책이 "사국사"입니다.
학자들은 이들 사서 등을 연구하여
세계의 정복자 칭기스 칸이 고구려-말갈인이 주류를 이룬 발해의 고조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제19대손이라는 가설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결국 칭기스 칸의 본이름 테무진(鐵木眞)은 강인하고 위대한 鐵人이
아니고 고구려의 제3대 전쟁왕 대무신왕(大武神王)에서 따온 것이며
왕호 “칭기스 칸"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왕중왕"이 아니고 고구려-발
해 "진국왕(震國王-震國公)”의 음사취음적 표기이며,
그리고 자기 나라 이름을 “몽골 / 몰골 / 말골(靺鞨)”이라고 붙임으로
써 자신이 고구려(高句麗) 왕족의 후손이자, 발해(渤海) “진국왕(공)
(震國王)”의 후손이요, “말갈국왕”, 곧 새로운 “발해국왕”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더나아가 부가적으로 고려의 왕건과 중원의 지배자 대金국
과 대元 몽공제국과 만주 淸왕조가 일족이라는 주장도 펴고 있습니다.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발해를 칠때 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모든
모골(말갈) 군이 전멸하고, 오직 두 사람만이 살아남았는데 그 이름이
‘키얀’과 ‘네쿠즈’인데 이 둘은 마침 갓 혼인한 그들 각자의 아내들, 그
리고 몇 명의 시종과 함께 포위를 뚫고 심심산골의 계곡 속으로 도망
쳤습니다. 그 계곡을 넘자 마치 하늘이 만든 천국 같은 벌판과 목초지
가 나타났습니다. 그곳의 이름이 ‘에르게네 쿤’입니다.
이때 아르카나 콘으로 도망간 칭기스 칸의 전설적 시조인 키얀과 네쿠
즈 중에 키얀은 바로, 발해 고왕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인 대야발(大
野勃)의 손자 ‘간(澗)’입니다(대일한의 子). 또 두 번째 인물 네쿠즈는
‘님금’이란 이름을 페르시아어로 ‘링쿰(Linqum)’이라고 적고 한자로는
‘닛곰(捏昆, 날곤)’으로 적은 이름의 변화형입니다. 그가 누구냐 하면,
그는 바로 그 전설적 전쟁의 주역이었던 발해 제2대왕 무왕 대무예의
아들 발해왕자 도리행(都利行)의 아들입니다. 그의 아버지 대도리행은
흑수말갈을 정벌하라는 형 무왕의 명을 어기고 당나라로 망명한 숙부
대문예를 발해로 귀환시키라는 임무를 띠고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독살당한 차기 왕감이었습니다. 그 ‘도리행(都利行)’이 바로 《집사》가
‘다를라킨(Darlaqin)’이라고 기록한 인물인데, 님금, 곧 ‘니쿠즈’는 그의
아들입니다.
전설적인 ‘아르카나 콘’으로 피신한 두 가계에서 나중에 많은 후손들이
태어나고 그 무리의 숫자가 불어나서 그들이 여러 종족, 곧 지파로 갈
라졌는데, 이 때문에 그들이 살던 그 계곡이 좁아져 거기를 빠져나와
더 넓은 터전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먼저 콩그라트 종족이 아르카나 콘을 떨쳐 일어나 발해의 남쪽 주군을
회복한 이 황금항아리 즉 금행은 황해도 평주를 수복했습니다. 놀랍게
도 이 사람은 우리 《고려사》가 <우리 평주의 중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 함보)가 여진에 들어가 금나라 선조가 되었다>고 기록한
바로 그 인물입니다. 이 때문에 ‘황금항아리’ ‘금행(金幸)’은 <고려사>
의 서문 격으로 왕건의 선조를 기록한 <고려세계(高麗世系)>에서는
왕건의 외증조부로 ‘서해용왕(西海 龍王)’으로 기록되었고, 이 칭호를
쓰며 그곳을 다스립니다.” 왕건의 외증조부인 ‘서해용왕’에서 ‘서해’는
곧 ‘발해’ 바다를 말하고 ‘용왕(龍王)’은 그가 정말 ‘구렝이 왕’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는 우리말의 "고구려"라는 뜻을 한자로 번역하여 적는
발해-고려식 향찰(鄕札)로 적힌 칭호라고 합니다.
고려 왕건의 궁정혁명으로 이때 죽은 궁예의 시신을 수많은 승려가 호
위 하여, 고려를 떠나 오늘날 함남도 안변으로 가서 장사 지낼 때 발해
대상랑도 그들과 함께 떠납니다. 장례가 끝나고 그의 일행은 다시 그들
자신의 선조 간(키얀)과 님금(니쿠즈)이 들어갔던 전설적인 그 땅 발해
서경인 아르카나 콘으로 돌아갔습니다. 비록 쫓겨왔지만, 다행히 거기
서 동족을 모으고 도리행 후손 지파의 하나인 우량하이(오량합=오랑케)
종족과 합칩니다.
그러나 얼마후 918년에서 8년 뒤 926년 발해는 불행히도 발해 왕가의
한 집안 지파가 7세기의 수와 당나라 시대에 통치했던 거란 땅에서 새로
이 일어난 추장 야율아보기의 공격을 받고 멸망합니다. 발해대상랑과 그
일행은 말갈의 고향인 백두산의 압록수원에 있는 별해진(別海津) 주변으
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별해진은 당시 소리로는 ‘바르카이-진’이고 ‘발해-
진(渤海-鎭)’을 다른 한자로 쓴 지명입니다. 부랴트어와 몽골어로는 이
소리가 조금 변해 ‘바르고(발해)-진’ 또는 ‘바르가(발해)-잔’이라고 불립
니다.
고려 윤관 장군이 무려 17~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신(女眞)을 정벌하고
구성(九城)을 쌓은 전쟁때 그때가 시기적으로는 아골타의 청년시대였습
니다. 황금항아리의 세 아들이 지파, 즉 종족으로 분화되었는데 이 전쟁때
그 지파의 후손들이 전쟁을 계기로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원래 고향땅
에 남거나 혹은 다른 지역으로 피신(이동)을 했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황금항아리 세 아들의 지파들 가운데 맏지파 ‘콩그라트’ 종족은 압록강 건
너 오늘날의 갈소관으로 피신했습니다.
둘째 지파 ‘예키라스’ 종족은 원래의 길주보다는 좀 더 북쪽으로 잠시 옮겼
지만, 그래도 이 땅을 떠나지 않고 함경북도의 두만강 강기슭 지구에 남았
습니다.
결국 막내 지파로 함경도에 살던 칭기스 칸의 6대 직계선조 지파인
‘코를라스’ 지파는 카이도와 그의 종숙부 나친이 그의 관향이자 이름으로
쓰던 함경도 나진(羅津)을 떠나 속말강(송화강)과 서북의 흑수(흑룡강)을
따라 위로 향하여 오늘날 남(내)몽골의 훌룬-부이르호를 거쳐서 더 서북
으로 나아가 오늘날 몽골리아 동북부 러시아령 부랴티아의 바이칼 호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바이칼’은 몽골어로 ‘바이-갈’이라고 합니다. 이못
이름의 뜻은 원래 말갈어로 ‘부여-골리(부여-고려)’ 호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전쟁에 지고 밀려서 그들은 이 땅을 떠나, 오늘날 몽골과 투르크
종족의 나라라고 불리는 이방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로부터 6세대 후에 그들은 결국 세계사의 주역을 맡는 세계정복자
징기스 칸을 탄생시켰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몽골인” 출신으로 “세계정복자”라고 알고 있는
칭기스 칸의 선조는 “고구려(高句麗) 주몽(朱蒙)의 후손 발해(渤海)
왕족이었다”는 내용의 놀라운 사실을 담은 글을 읽었습니다.
지금부터 약 800년 전에 칭기스 칸의 선조와 그 자신의 행적에 관
해 기록한 사서 <몽골비사(元朝秘史)>가 있습니다.
그리고 칭기스 칸이 죽고 한세대가 지난 1260년경에
페르시아의 史家 주바이니는 <세계정복자史>라는 사서를 지어 그
에게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정복자"라는 칭호를 바쳤습니다.
나아가 1995년 워싱턴포스트지가 20세기까지 지난 천년간의 역사
속에서 최고의 인물로 칭기스 칸을 선정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4년 미국의 역사가 웨드포드(Jack Weatherford)는
칭기스 칸을 "현대세계를 창출한 사람"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역사상 가장 잔인한 침략자인 파괴자가 현대사회를 창출
하는 건설자로 둔갑하여 새로히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칭기스 칸(成吉思汗, 1155?~1227)은
원(元)나라의 태조(太祖)로 재위는 1206-1227년간이었습니다.
몽고 걸안부 팔지진씨(蒙古乞顔部孛兒只斤氏)로,
본명은 테무친(鐵木眞)이며 바이칼호 근처에서 출생했습니다.
태어난 연도에 대해서는 1155년과 1162년, 1167년 등의 이설이
있습니다. 9살 때 아버지 예수게이(也速該)가 죽자 부락이 쇠미해
졌습니다. 가난하게 성장했고, 당시 강세를 자랑하던 케레이트 부족
의 완칸 아래서 점차 세력을 키워, 금나라 대정(大定) 29년(1189)
몽고 씨족연합의 맹주(盟主)에 추대되어 비로소 칸(汗)이란 칭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칭기스 칸은 10만이 안되는 몽골 기마병을 이끌고 중국과 유라시아
대륙에서 동시에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습니다. 몽골군은 이동에 편한
가벼운 그물갑옷, 도망가면서도 뒤로 화살을 쏘아대는 전술등 당시로
서는 가공할 만한 전투력을 갖춘 군대로서 공포를 이용한 심리전과
정보전을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이들은 몽골제국의 건설자로서 인류
사에 굵은 획을 그으며 하나의 정치 경제적 헤게모니 아래에 통합된
팍스-몽골리카를 구현하였습니다.
몽골제국은 인도와 동남 아시아의 일부를 제외한 아시아 전역과 유럽
의 헝가리까지 석권함으로서 초원과 내륙아시아의 범위를 훨씬 넘는
사상 최대의 제국으로 성장하여 1세기 반 동안 세계와 시대의 중심에
섰습니다. 대원-울루스를 중심으로 서북 유라시아의 주치-울루스, 서
아시아의 훌레그-울루스 등 크고 작은 일족 울루스 외에 다양한 인종
과 회원국가인 지역정권, 재래왕조, 토착세력을 묶는 느슨한 세계연방
이 되었습니다.
몽골은 세계사의 분수령이고 저수지로서 현대에 이르는 세계, 특히
구대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18세기까지 몽골의 유산을 업고 나
타난 오스만제국, 러시아제국, 명-청나라, 무굴왕조, 사파비왕조 등에
서유럽 국가는 얼씬거릴 수 없었습니다. 산업혁명과 근대사회 속에서
강력한 화기와 해군력으로 군사화 한 서유럽이, 식민지화와 이권확대
를 위하여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킨 후, 아시아 여러 나라를 분할한 것
은 19세기 후반의 일입니다. 이후 칭기스칸 몽골군의 전설적인 위업은
독일의 참모부 및 히틀러의 전격전 그리고 러시아의 군 운용체계 속에
서 그리고 레닌의 적색 혁명이념에서도 구현되었습니다.
칭기스 칸의 손자 훌라구가 다스린 일칸국(곧 오늘날의 이란, 이라크,
아제르바이잔과 우즈베키스탄 서부 지역에 자리잡은 몽골제국 4칸국
중 하나)의 재상이었던 페르시아인 라시드 웃딘이 자기 황제 가잔 칸
으로부터 ‘나의 선조인 칭기스 칸의 선조에서부터 내게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를 쓰라’는 엄명을 받고 1310년경에 지은 역사책이 "집사"
입니다. 이를 더 상세하게 보완한 책이 "사국사"입니다.
학자들은 이들 사서 등을 연구하여
세계의 정복자 칭기스 칸이 고구려-말갈인이 주류를 이룬 발해의 고조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의 제19대손이라는 가설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결국 칭기스 칸의 본이름 테무진(鐵木眞)은 강인하고 위대한 鐵人이
아니고 고구려의 제3대 전쟁왕 대무신왕(大武神王)에서 따온 것이며
왕호 “칭기스 칸"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왕중왕"이 아니고 고구려-발
해 "진국왕(震國王-震國公)”의 음사취음적 표기이며,
그리고 자기 나라 이름을 “몽골 / 몰골 / 말골(靺鞨)”이라고 붙임으로
써 자신이 고구려(高句麗) 왕족의 후손이자, 발해(渤海) “진국왕(공)
(震國王)”의 후손이요, “말갈국왕”, 곧 새로운 “발해국왕”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더나아가 부가적으로 고려의 왕건과 중원의 지배자 대金국
과 대元 몽공제국과 만주 淸왕조가 일족이라는 주장도 펴고 있습니다.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발해를 칠때 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모든
모골(말갈) 군이 전멸하고, 오직 두 사람만이 살아남았는데 그 이름이
‘키얀’과 ‘네쿠즈’인데 이 둘은 마침 갓 혼인한 그들 각자의 아내들, 그
리고 몇 명의 시종과 함께 포위를 뚫고 심심산골의 계곡 속으로 도망
쳤습니다. 그 계곡을 넘자 마치 하늘이 만든 천국 같은 벌판과 목초지
가 나타났습니다. 그곳의 이름이 ‘에르게네 쿤’입니다.
이때 아르카나 콘으로 도망간 칭기스 칸의 전설적 시조인 키얀과 네쿠
즈 중에 키얀은 바로, 발해 고왕 대조영(大祚榮)의 아우인 대야발(大
野勃)의 손자 ‘간(澗)’입니다(대일한의 子). 또 두 번째 인물 네쿠즈는
‘님금’이란 이름을 페르시아어로 ‘링쿰(Linqum)’이라고 적고 한자로는
‘닛곰(捏昆, 날곤)’으로 적은 이름의 변화형입니다. 그가 누구냐 하면,
그는 바로 그 전설적 전쟁의 주역이었던 발해 제2대왕 무왕 대무예의
아들 발해왕자 도리행(都利行)의 아들입니다. 그의 아버지 대도리행은
흑수말갈을 정벌하라는 형 무왕의 명을 어기고 당나라로 망명한 숙부
대문예를 발해로 귀환시키라는 임무를 띠고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독살당한 차기 왕감이었습니다. 그 ‘도리행(都利行)’이 바로 《집사》가
‘다를라킨(Darlaqin)’이라고 기록한 인물인데, 님금, 곧 ‘니쿠즈’는 그의
아들입니다.
전설적인 ‘아르카나 콘’으로 피신한 두 가계에서 나중에 많은 후손들이
태어나고 그 무리의 숫자가 불어나서 그들이 여러 종족, 곧 지파로 갈
라졌는데, 이 때문에 그들이 살던 그 계곡이 좁아져 거기를 빠져나와
더 넓은 터전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먼저 콩그라트 종족이 아르카나 콘을 떨쳐 일어나 발해의 남쪽 주군을
회복한 이 황금항아리 즉 금행은 황해도 평주를 수복했습니다. 놀랍게
도 이 사람은 우리 《고려사》가 <우리 평주의 중 금행(今幸의) 아들
극수(克守: 함보)가 여진에 들어가 금나라 선조가 되었다>고 기록한
바로 그 인물입니다. 이 때문에 ‘황금항아리’ ‘금행(金幸)’은 <고려사>
의 서문 격으로 왕건의 선조를 기록한 <고려세계(高麗世系)>에서는
왕건의 외증조부로 ‘서해용왕(西海 龍王)’으로 기록되었고, 이 칭호를
쓰며 그곳을 다스립니다.” 왕건의 외증조부인 ‘서해용왕’에서 ‘서해’는
곧 ‘발해’ 바다를 말하고 ‘용왕(龍王)’은 그가 정말 ‘구렝이 왕’이라는
말이 아니라, 이는 우리말의 "고구려"라는 뜻을 한자로 번역하여 적는
발해-고려식 향찰(鄕札)로 적힌 칭호라고 합니다.
고려 왕건의 궁정혁명으로 이때 죽은 궁예의 시신을 수많은 승려가 호
위 하여, 고려를 떠나 오늘날 함남도 안변으로 가서 장사 지낼 때 발해
대상랑도 그들과 함께 떠납니다. 장례가 끝나고 그의 일행은 다시 그들
자신의 선조 간(키얀)과 님금(니쿠즈)이 들어갔던 전설적인 그 땅 발해
서경인 아르카나 콘으로 돌아갔습니다. 비록 쫓겨왔지만, 다행히 거기
서 동족을 모으고 도리행 후손 지파의 하나인 우량하이(오량합=오랑케)
종족과 합칩니다.
그러나 얼마후 918년에서 8년 뒤 926년 발해는 불행히도 발해 왕가의
한 집안 지파가 7세기의 수와 당나라 시대에 통치했던 거란 땅에서 새로
이 일어난 추장 야율아보기의 공격을 받고 멸망합니다. 발해대상랑과 그
일행은 말갈의 고향인 백두산의 압록수원에 있는 별해진(別海津) 주변으
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별해진은 당시 소리로는 ‘바르카이-진’이고 ‘발해-
진(渤海-鎭)’을 다른 한자로 쓴 지명입니다. 부랴트어와 몽골어로는 이
소리가 조금 변해 ‘바르고(발해)-진’ 또는 ‘바르가(발해)-잔’이라고 불립
니다.
고려 윤관 장군이 무려 17~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신(女眞)을 정벌하고
구성(九城)을 쌓은 전쟁때 그때가 시기적으로는 아골타의 청년시대였습
니다. 황금항아리의 세 아들이 지파, 즉 종족으로 분화되었는데 이 전쟁때
그 지파의 후손들이 전쟁을 계기로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원래 고향땅
에 남거나 혹은 다른 지역으로 피신(이동)을 했다는 의미로 이해됩니다.
황금항아리 세 아들의 지파들 가운데 맏지파 ‘콩그라트’ 종족은 압록강 건
너 오늘날의 갈소관으로 피신했습니다.
둘째 지파 ‘예키라스’ 종족은 원래의 길주보다는 좀 더 북쪽으로 잠시 옮겼
지만, 그래도 이 땅을 떠나지 않고 함경북도의 두만강 강기슭 지구에 남았
습니다.
결국 막내 지파로 함경도에 살던 칭기스 칸의 6대 직계선조 지파인
‘코를라스’ 지파는 카이도와 그의 종숙부 나친이 그의 관향이자 이름으로
쓰던 함경도 나진(羅津)을 떠나 속말강(송화강)과 서북의 흑수(흑룡강)을
따라 위로 향하여 오늘날 남(내)몽골의 훌룬-부이르호를 거쳐서 더 서북
으로 나아가 오늘날 몽골리아 동북부 러시아령 부랴티아의 바이칼 호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이 ‘바이칼’은 몽골어로 ‘바이-갈’이라고 합니다. 이못
이름의 뜻은 원래 말갈어로 ‘부여-골리(부여-고려)’ 호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전쟁에 지고 밀려서 그들은 이 땅을 떠나, 오늘날 몽골과 투르크
종족의 나라라고 불리는 이방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로부터 6세대 후에 그들은 결국 세계사의 주역을 맡는 세계정복자
징기스 칸을 탄생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