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자료실 > 신요칼럼
신요칼럼
 

우리동요 100년의 음악사 (1)

鄭宇東 0 2306
우리동요 100년의 음악사 (1)

ㅡ 동요의 초기창작과 번안 ㅡ

--------------------------------------------------------------------------------------------------
* 이 글에서의 서술은
머지 않아 2024년 우리동요 창작 100년을 맞이할 준비로서
한용희(韓龍熙, 1931. 9. 17~2014. 12. 5) 선생이 저술한
"한국동요음악사"(세광음악출판사 / 1988년刊 )와
파랑새 창작동요회를 결성-육성시켜 온 한국동요계의 대부인
이수인(李秀仁, 1939. 1. 8 =>(음) 1938. 11. 18 ~    ) 선생의
음악과 삶에 대한 회고록, "내맘의 강물"(교육과학사/2012년刊)
을 토대로 하여 인터넷 자료를 참고하여 정리작성한 것입니다. *
---------------------------------------------------------------------------------------------------


동요란 어린이 노래인데, 그것이 노래이니만큼
동시와 다른 것은 글자 수를 맞추어 지은 정형시라는 점입니다.
민족시인 김소월(金素月)의 시에 7 ·5 조가 많으나, 그것을 민요
나 가요로 보지 않는 것과 같이, 동요도 역시 정형동시로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처럼 정형동시를 동요로 본다면, 글자 수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럽게 풀어 쓴 어린이시를 동시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시와 달라서 동요와 동시는 어른
들이 지어 어린이에게 주는 작품입니다. 어린이 자신이 지을 수
도 있기는 하지만, 역시 아동문학을 다루는 동요시인의 생각과
솜씨를 빌려야 문학 구실을 할 수가 있습니다.

동요에는 옛날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구전동요(口
傳童謠)가 있는데, 전승동요(傳承童謠) ·전래동요(傳來童謠)라
부르기도 합니다. 언제 누가 지었는지도 모르고, 지은이가 있더
라도 이름을 굳이 밝히지 않는 겨레의 노래로 굳어진 것이
구비동요(口碑童謠)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달아 달아 밝은
달아>와 <새야 새야 파랑새야>인데, 앞의 것은 중국 당(唐)나
라의 이태백(李太白:701∼762)을 생각하면서 지은 동요이고,
뒤의 것은 ‘녹두장군’이라 불리던 동학농민운동의 전봉준(全琫
準:파랑새란 八王, 즉 全씨를 뜻한 말)의 죽음을 미리 슬퍼하여
지어 퍼뜨린 동요였으니, 어린이 입을 빌린 어른 동요였습니다.

1910년대에 접어들면서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교훈조의 노래
인 창가(唱歌)와 찬송가조 동요가 어린이 입에 오르내리다가
1920년대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예술동요라 할 수 있는 동심을
살린 동요가 나타났습니다. 방정환(方定煥)의 <형제별>,
유지영(柳志永)의 <고드름>, 윤극영(尹克榮)의 <반달, 설날>, 
홍난파의 <고향의 봄, 낮에 나온 반달, 봄 편지, 퐁당퐁당>
박태준의 <오빠생각, 맴맴, 오뚜기>, 윤석중(尹石重)의 <흐르
는 시내>, 이일래의 <산토끼>가 그 무렵의 동요들입니다.

판에 박은 듯한 4 ·4조나 7 ·5조에서 벗어난 첫 시도는
1933년에 나온 윤석중이 지은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로 (세계
지도, 담모퉁이, 도깨비 열두 형제) 등의 창작 동시가 실렸습니다.
이에 현제명이 <가을, 고향 생각>을, 박태현이 <산바람 강바람,
달 따러 가자>를, 김성태가 <방울새>를 작곡하였습니다.
이어 박목월(朴木月) · 강소천(姜小泉) ·이원수(李元壽) ·김영일
(金英一) · 윤복진(尹福鎭) · 신고송(申孤松) · 권태응(權泰應)
등이 동요 창작에 힘을 기울였고, 
1940년대에서 해방전까지는 일본의 단말마적 금지정책으로 동
요를 부르지도 만들지도 못하는 동요의 암흑기를 맞았습니다만
시단(詩壇)에서는 정지용(鄭芝溶 >해바라기씨) ·윤동주(尹東柱
>빗자루, 버선본, 조개껍질) 등의 동시가 문학적 수준을 높이는
데 공헌하였습니다.
 
해방후 50년대는 전란을 치루면서도 동요의 붐이 일어났습니다. 
광복의 해에 윤석중의 謠 <새나라의 어린이>에 박태준이 곡을
붙혔고, 박재훈의 <어머님 은혜>, 안병원의 <우리의 소원>,
권길상의 <과꽃>, 정세문의 <어린이 행진곡>, 장수철의 <보슬
비>, 나운영의 <금강산>, 손대업의 <송아지>, 이계석의 <초록
바다> 등등의 많은 동요가 작곡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어린이를 위하여 지은 시를 동요 ·동시라 부
르지만,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는 시인의 작품 가운데서 어린이들
도 알아볼 수 있는 쉬운 시를 골라 또래의 어린이의 수준에 맞추
어 내주는데 이것이 동요 구실을 합니다. 서양의 경우, 영국에서
동요가 가장 왕성하며, 영국에서는 옛 동요를 통틀어 ‘머더 구스
의 노래(mother goose’s melody)’라 하고 미국에서는 children's
song 또는 nursery rhyme 이라 일컫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 온 바로는
우리나라 동요의 효시는 윤극영의 <반달 : 1924년>로 알려져 있
습니다. 이 노래는 중국의 음악교과서에도 "小白船"으로 실려 있
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어린이 잡지에 실린 첫동요는 방정환
동요시에다 정순철이 작곡한 <형제별:1923년>이라고도 합니다.
문학이나 예술의 여러 장르에서 그 시작이 다 그렇듯이 동요의
요람기에는 창작보다는 번역과 飜案曲이 더 많았습니다.
 
이런 여건아래 탄생한 방정환-정순철의 <형제별> 曲은 일본
음악가 [一說에는 나리타 다메소오(成田爲三, Narita Tamesou,
1893~1945)가 작곡한 <Hamabeno Uta (濱邊の歌)>가 아닌]
또 다른 한 곡이었다는 소파의 증언이 이미 있었던 작품이고
"뜸부기"로 알려졌던 최순애 요로 박태준이 작곡한 <오빠생각>
도 일본의 히로다류타로(弘田龍太郞, 1893~1952)가 작곡한
하마찌도리(浜千鳥)와 매우 비슷하다는 일부 평자가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논평들의 사실여부를  알아보려고
이들 곡조들을 여러번 들어 보았으나 부분적으로 쪼매 같은것
같으나 크게는 다르다는 소동대이(小同大異) 감을 가졌습니다.
오히려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일본 가곡간에 많은 유사성이 있다
는 느낌을 확실하게 가지게 되었을 뿐입니다.

1920년대 어린이 운동의 일환으로 불려지던 동요의 초창기에는
천도교 관계자들에 의하여 주도적으로 이루어진데 비하여
1945년 해방직후에는 기독교 YMCA의 소년부가 동요창작 활동
의 중심이 되었는데 원치호가 이 소년부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YMCA가 "어린이 노래모음"이라는 동요곡집을 발간하였
는데 이책은 주로 외국동요를 우리말로 번역-번안한 것으로서
다음과 같은 외국곡들을 게재하고 있었습니다.
노래는 즐겁다 / 종소리 / 봄바람 / 옹달샘 / 릿자로 끝나는 말 /
이 몸이 새라면 / 뻐꾹새 / 봄소식 / 등대지기 / 꾀꼬리/ 동무들아/
잘 있거라 내고향 / 시냇물 / 작은 별 / 나비야 / 얼음지치기 등이
었습니다.

여기에서 또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원곡과 번안 번역곡사이에 큰 괴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서양음악 도입과정에서 기독교의 선교와 전파와 밀접
한 관계가 있는 특수성으로 인하여 초창기의 우리가곡의 시작은
찬송가(찬미가)에서 시작하고 많은 노래가 찬송가에서 빌려온 노
래이었습니다. 공개적으로 최초로 불려진 곡은 "예수 사랑하심은"
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 마르틴 루터가 작곡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 도니제티 작곡 / 남궁억 작사
하늘 가는 밝은 길이 ----- Lady 스카트 작곡 / 원제는 안니로리
주지하듯이 구 대한제국의 애국가조차 이러한 범주에 듭니다.

[동요 부문]에서도
클레멘타인 ------ 금광 러시때의 포티나이너들의 허황된 꿈을 풍자
노래는 즐겁다 ------ 독일 남부민요, 원명은 Muss i denn '이별'
반짝 반짝 작은 별--- 모짜르트의 "아! 말씀 드릴께요 어머니"의 변주
나비야 나비야  ------- 독일의 민요. 원제목은 Hanschen klein
릿자로 끝나는 말 ----- 러시아의 뱃노래에 윤석중이 가사를 붙혀
특히 클레멘타인은 가사의 현장이 광산의 굴에서 바닷가로 바뀌었고
노래는 즐겁다에서는 원곡 이별의 정조가 고향을 찾는 기쁜 정서로
나타나고 있는데는그 엄청난 괴리에 아연할 뿐입니다.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