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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요칼럼
 

500년 내력의 명문종가

鄭宇東 0 1834
500년 내력의 명문종가
* 경북 경주의 최부잣댁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에 나아가지 않습니다.
재산은 만석 이상으로 모우지 아니합니다.
재산이 만석 이상을 넘으면 사회에 환원합니다.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사들이지 아니합니다.
지나는 길손(過客)을 후하게 도타히 대접합니다.
사방 100리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구휼의 손길을 폅니다.
최부잣집 며느리들은 시집온후 3년까지 무명옷을 입습니다.
한마디로 위에 열거한 경주 최부잣댁에 내려오는 400년 전통의 가훈은
남에게는 후하고, 자신에게는 박한 잣대를 갖다대는 동양적 수신덕목
그야말로 한국의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 명문가의 모범 본이 됩니다.

* 경북 대구 남평 문씨종가
경북 달성군 화원읍 인흥은 인수문고를 운영하는 남평 문씨의 세거지입니다.
원래 이곳은 일연대사가 삼국유사를 집필한 옛 인흥사 폐사지였습니다.
우리나라 역대의 도서관 형태에는 규장각 같은 왕립도서관과 성균관 같은
교육기관의 학교도서관, 문중에서 자녀들을 고육하기 위해 설립한 문중문고,
개인이 소장한 개인문고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특유한 문중문고의 시원
인 인수문고(仁壽文庫)는 대략 8500여책(약 2만권)을 소장한 국내의 민간
최고 아카데미로서의 역할을 수햏했습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자식에게 고기를 많이 잡아주지 말고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주라는 교훈이 전해지고 있듯이, 이 남평 문씨 문중에도 자손에게 돈
이 아닌 지혜를 물려 주는 전통이 있어 배출한 인물로 문태갑 서울신문사장
과 인흥 토박이 문희갑 대구광역시 시장 등이 있습니다.

* 경북 달성 한훤당 김굉필 종가
500년 지켜온 제자의 도리 그 자체가 스승의 본입니다.
한훤당은 점필제 김종직의 제자로서 갑자사화때 그의 제자라는 이유만으로
사약을 받고 51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던 제자였던
정암 조광조의 신원으로 인해 누명을 벗고 우의정에 추서되었습니다.
그는 점필재에게서 배운 小學을 모든 도덕의 근간으로 생각하고 小學之道를
실천 궁행하기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의 인격과 학문을 기리는 道東書院은
나라가 내린 賜額書院으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도 제외되었습니다.
공자가 제자를 은행나무 밑에서 가르쳤다는 杏壇의 고사에 따라서 우리나라
의 서원에는 어디서나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이 서원에는 수령이 400년
이나 넘는 큰 은행나무가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 경북 안동 학봉 종가
퇴계학풍은 퇴계의 2대 제자 학봉 김성일과 서애 유성룡에 이어져 임진 난국
을 헤쳐나가는데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임진왜란때 왜군을 맞이 장렬히 전사한 김성일 일가의 애국심과 충성심은
후손들에게 이어져 일제의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나라에서 그 공을
기리어 많은 훈장을 받게 하였습니다.
나는 학창시절에 김성일이 정사 황윤길과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온 귀국보고
중 정-부사의 보고가 반대인 것에 의문이 갔지만, 그의 호도 모른채 선인들의
성명의 휘법과 호(號)의 사용법을 모르고 마구잡이로 부른 무뢰한이었습니다.
다만, 학봉 선생이 임란시 전투에 앞장서 순사항 것은, 지금 생각해 봐도 부사
로서의 잘못된 귀국보고에 대한 수정을 나타내는 한 방법으로 생각됩니다.
학봉가에서 자존심은 곧 생명이니 생명 지키듯 자존심을 지킵니다. 그러므로
선생이 전쟁에서 몸과 생명을 초개같이 버린것은 생명보다 소중한 자존심을
지켜내려는 간절한 몸부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경북 영양의 조지훈 종가
경북 영양군 산골짜기 주실 조씨 호은(壺隱)종가는 370년을 이어 왔습니다.
가문의 삼불차 즉 財不借와 人不借와 文不借의 전통을 지켜 나오는 가운데
지금은 이 주실마을에서 문학계의 거인 조동탁(지훈), 조동일박사, 역사학
계의 조동걸박사 등하여 박사만하여도 14명의 인재를 배출하였습니다.
종가터는 호은이 매를 날려 매가 가서 앉은 곳으로 집터를 잡을때 대문앞으
로 보이는 安山이 붓모양처럼 정삼각형을 그리는 文筆峰으로 찬연히 빛나는
풍수지리도 착안점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런 증좌는 60가구가 넘는 주실마을에 우물이 하나밖에 없어 불편한데도
참고 사는것은 풍수설에 주실마을이 배모양이므로 바닥에 구멍을 뚫으면
배가 침몰하는것 같이 마을의 운세가 다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조지훈의 "지조론"에서 본 지조있는 귀한 선비를 만나
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 충남 예산의 추사 김정희 고택
충남 예산군 신암면 고궁리에 위치한 추사고택은 武氣서린 바위산이 보이
지 않는대신 솜이불처럼 포근한 야트막한 둔덕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곳에서 文氣가 무르녹는 文字香과 書卷氣가 발산되어 나온디고
조용헌 원광대 교수는 추사의 고택을 풍수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추사는 불우한 유배생활에서도 학문을 연찬하고 또 그만이 독특한 추사체
를 개발하여 국제적으로 학자들과 교류하며 명성을 드날렸습니다. 통신사
였던 제자 이상적은 스승이 유배지에서도 학문을 계속할 수 있도록 중국
에서 구입한 책을 가져다 주기 위하여 뱃길이 위험한 제주도에 여러 차례
왕래하였습니다. 그리고 세간에 잘 알려진 추사의 명화 세한도는 이러한
제자에 대한 보은의 뜻에서 제자 이상적에게 그려준 그림이라 합니다.
추사의 고택에서 우리는 음양택이 한데 있는 점에 유의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 선인들의 윤회연속적 死生觀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하갰습니다.
요컨데 추사선생이 각고면려하여 이룬 학문은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그
웅지와 경륜은 가슴에 우주를 품은듯 광대하였습니다.

* 전남 광주의 기세훈 고택
광주지역 일대에서는 奇씨, 高씨, 朴씨 3성을 명문세가로 꼽습니다.
이중 기씨 집성촌은 광주 광산동 광곡마을( 너르실)에 있으며
호남학파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고봉 기대승(奇大升)을 배출하였으며
그의 6대손인 기언복이 종가터를 잡은 이후 300년동안을 가꾸어 왔습니다.
그의 13대손 기세훈은 고봉의 학풍을 오늘도 맥맥히 계승하고 있습니다.
너르실마을 한 가운데에 고봉을 추모하는 月峰서원이 있고, 고봉 학술원과
종가댁 愛日堂과 마을의 서당 歸厚齋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종택 뒤편의 울
창한 대나무밭에 대잎 비비는 소리와 잎위에 떨어지는 빗소리와 대나무 꼭
대기에 앉는 새소리를 들으면서, 대의 이슬을 받아먹고 자란 달콤한 죽로차
를 다려 마시면 세속의 번뇌는 말갛게 잊을만도 하겠습니다.

이런 사실과 맞물려 우리나라의 살롱적인 고급문화로 일컬어지는 계산풍류
는 이 지방 창평들판의 풍요한 곡창과 대나무의 고부가가치로 얻어진 부로
선비들은 계곡이나 산마루에 정자나 루를 짓고 시문을 짓고 담론하며 풍류
를 즐겼는데 이 磎山風流의 개화는 기대승에 힘입은 바 큽니다.
우리나라 학문사상 퇴계와 고봉간의 사단 칠정논쟁은 유명합니다. 8년간
이나 계속된 편지 왕래는 서로가 젊은이의 새로운 식견을 접하고, 선배학자
의 감화는 신진학자의 인간적인 성장을 도운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기세훈 종가에서는 전통의 단절을 맞으면서 화장과 납골당의 결단을 내렸
습니다. 모든 종가가 다 그럴테지만 전통은 奇씨 종가의 튼튼한 뒷심입니다.

* 전남 해남의 고산 윤선도 고택
해남에 있는 고산 윤선도의 고택은 호남 제일 아니 우리나라의 제일의 고택
입니다. 청룡 백호 현무 주작 四神砂가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면적이 5십만
평이나 되는 호방한 녹색의 장원입니다. 일찌기 고산이 벼슬을 그만두고 이
곳을 가꾸며 산것은 진나라의 장한(張翰)이 고향인 오중(吳中)으로 돌아가
자기의 뜻대로 살기를 원한것과 다름 아닌 내 뜻대로 산 것입니다.

고산의 온축은 문학과 천문과 풍수지리에 정통하였습니다.
남인으로 정치에 참여하였던 그는 노론세에 밀려 벼슬을 물러나 해방감으로
어부사시사를 부르며 귀향한 그의 자유정신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빆에도
국어 교과서에도 올라있는 오우가 6수가 그의 시조작품입니다.
그의 천문학에 관한 조예는 일상적인 한시에 그대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의 증손자로서 우리나라 제일의 자화초상을 그린 공재 윤두서는 고산가의
예술혼을 드날리었습니다.
 
고산은 호남 제일의 부호로서 대규모의 녹우당을 경영하였습니다.
고산의 녹우당은 호남 예인들의 교류마당이었으며 많은 전적들을 비치하여
학자들의 내왕이 잦아 학문과 예술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산 정약
용의 강진 유배시 이 외가의 전적으로 학문을 대성하여 실학의 전성기를 맞
은 것도 녹우당의 학문의 젖줄 때문이었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 서울 안국동 윤보선 고택
서울의 명문으로는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 세가와 정치인 이종찬 세가가 대
표적 입니다만 지금 이씨종가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윤씨 종가는 안국동에 위치하는데 100여년전 건축주 민씨가 아흔아홉칸을
넘는 대궐집을 짓는다는 소문에 왕이 불러다 물으니 부처가 살집이라고 임
기응변으로 답하여 왕도 그만 파안대소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건축규모가 크서 집안에 자연을 들여 놓았다고 세간에서 평할 정도였습니다.
덕을 쌓아야 훌륭한 인물을 낸다는 가훈아래 인명사전에, 같은 가문에서
50명의 인물을 배출한 가문은 아주 희귀한 사례입니다.
종손 윤상구는 이 종가에 살면서 일반에게 공개하기를 꺼리고 있습니다.

* 경기 일산의 율곡 이이 종가
율곡 이이는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으나 처가가 있는 황해도 해주 석담에
정착하였습니다. 그의 14세손 이재능이 신위만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 와서
불과 1시간 거리에 있는 옛 종가와 가까운 일산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400년전 조상의 신주와 컴퓨터가 한방에 놓여 있는 미래의 종가상입니다.
파주 임진강 남녘에 있던 화석정은 율곡의 5대조가 세운 정자로 율곡은
임진란을 예견하고 들보와 석가래를 기름걸레로 닦게하여 임란때에 불을
놓아 북쪽으로 몽진하는 밤길을 밝혀 선조가 나루를 무사히 건너게 해주었
습니다. 덕수 이씨인 율곡 이이와 충무공 이순신이 우리민족의 위란을 구해
준 공적과 은공은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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