紙上 러시아 탐방여행
鄭宇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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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2 15:18
紙上 러시아 탐방여행
러시아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봐이킹족의 일족인 루스족이 동북슬라브
지역에 이동해 온 것이 러시아의 시원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볼가강은 러시아의 어머니이고 심장이고 젖줄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넓은 광활한 영토를 핏줄처럼 이어주고 있는
이들 강들이야말로 러시아의 대동맥입니다. 강은 교통의 물길
이 되고 들판을 기름지게 적셔 농작물을 수확하여 인간과 만물
을 길러 줍니다.
* 수도 모스끄바( r: Москва, e: Moscow)는
유럽러시아 중부, 오카강(江) 지류인 모스크바강 유역의 삼각지
소택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도 모스끄바인 것
이며 볼가강과 오카강 사이에 있어 水運의 중계지로 유리한 위
치를 차지했기 때문에, 일개 한촌으로 발족하여 모스크바公國
의 수도가 되고, 다시 러시아帝國의 수도가 되어 크게 발전하였
습니다.
모스끄바는, 전설이나 고고학적 유물에 따르면,
9∼10세기 이래 그곳에 취락이 존재하였음을 말해 주고 있지만
모스크바가 처음 러시아의 연대기에 나타나는 것은
1147년에 수즈달공公 유리 돌고루키가 오늘날의 크렘린의 기원
이 된 목조 성채(요새)를 구축하여, 당시만 하더라도 도시기능을
제대로 갖추고 있었습니다.
1238년 몽골(蒙古)의 침입으로 거리가 불탔으나,
1271년 다닐공이 이곳을 차지하여 모스크바공국을 세웠고
1367년 리투아니아의 침입때문에 크렘린에 석조성벽이 구축되고,
15세기에 모스크바대공국의 통일에 따라 모스크바는 전러시아의
수도가 되었으며, 이반 3세가 크렘린에 우스펜스키대성당을 짓고,
크렘린 외곽에 하얀 석조성벽을 구축함으로써 콘스탄티노플 함락
뒤에는 제3의 로마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모스크바는 몇 차례의 화재를 입고 시민의 폭동,
타타르의 침입 등이 겹쳤습니다. 그래서 16세기 말에는 대규모
축성이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 상뜨 뻬쩨르부르끄(Санкт-Петербург)는
러시아의 북서쪽 발트 해의 핀란드 만에 접해 있는 네바 강 하구에
있으며, 그 델타지대의 형성된 자연섬과 운하로 인해 생긴 수많은
섬 위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예전에는 페트로그라드와 레닌그라드
(Ленинград)로 불리다가 1924년 레닌이 죽자 그를 기념하여 레닌
그라드로 불리게 되었고, 1991년 다시 옛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차르 표트르가 겨울 冬宮을 지어 1703년 설립한 이
도시는 1713년 모스크바에서 천도하여 1918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으나 역대 대관식은 모스끄바에서 행해졌고 이후 수도는 다
시 모스크바로 옮겨졌습니다.
현재 겨울 冬宮 본관은 新. 舊. 小. 劇場 등 4동의 부속 예르미따시
건물과 더불어 "예르미따시 박물관 겸 미술관"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대영박물관, 프랑스의 루불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
관으로 손꼽히는 이 미술관은 1764년에 예카테리나 2세가 미술품
을 수집한 것이 예르미따시의 기원입니다. 본래는 예카테리나 2세
전용의 미술관으로, 프랑스어로 "은둔지"를 의미하는 "예르미타시"
라 하는 명칭도 거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왕족과 귀족들
의 수집품을 모았으나, 19세기말에는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었습니다.
네프스키 대로에 있는 수도원 주변에는 아치 형태의 문이 있는데
이문 입구의 왼쪽에 있는 묘지가 라자레프 묘지입니다.
이곳에는 건축가 보로닌, 자하로프, 고즈롭스키, 로시,
과학자 로마노소프의 묘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입구 오른쪽에 있는 것이 타흐빈 묘지인데,
도스토옙스키, 주콥스키, 카람진 등의 유명한 문학가와
차이콥스키, 무소르크스키 등 유명한 작곡가의 묘가 있습니다.
로마노프家의 말기에, 고려의 요승 신돈처럼,
괴짜 수도사 라스뿌찐(Григорий Ефимович Распyтин, 1869~
1916)이 치료와 예언의 능력으로 알렉산드라 황후의 총애를 업
고 정권을 전횡하다가 귀족들의 미움을 받고 네바강에 빠뜨려져
죽었습니다. 라스뿌찐은 시베리아의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
며, 18살 때부터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1903년 당시 제정 러시아
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나타났고, 혈우병으로 고생한 황태
자를 기도 요법으로 병세를 완화시켜 황제와 그 황족들에게 신망
을 얻었으며, 귀족 대접을 받게 되었으나 안팎이 다른 이중생활
을 하는, 그의 姓처럼 라스뿌트닉한 탕아(蕩兒)이었습니다.
* 19세기의 러시아에서는 사람들의 세평이
러시아의 심장은 모스끄바이고
러시아의 머리는 상뜨뻬쩨르부르끄이고
러시아의 지갑은 니즈니 노보고로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곳은 막심 골리끼가 생장하고 그의 대표작의 무대로 하여
"어머니"를 쓴 곳으로 도시 여기 저기에 고리끼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시가지 중심지에 넓게 펼쳐진 고리끼광장에는
그의 동상이 우뚝서 있습니다.
러시아의 머리 이야기는 위에서 보았으니
이제는 러시아의 심장 모스끄바 이야기를 조금 해볼까 합니다.
ㅡ 검은 끄레믈린궁
냉전 시대에널리 알려졌던 소련의 이미지는 ‘크렘린’과 ‘검은’을
찰떡처럼 붙여 놓았습니다. 그들의 음험함, 속을 알 수 없는 무
표정함, 비열한 계산속 등을 몽땅 ‘검다’는 표현 속에 우겨 넣어
크렘린 위에 발라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크렘린은 검지 않
습니다. 온갖 아름다운 성당과 건물들이 모여 있는 이곳은 현재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다채로운 색으로 다가갑니다.
원래 크렘린의 의미는 고대 러시아에서 쓰이던 보통명사로,
‘도시 내부의 요새, 성벽’일 따름입니다.
ㅡ 아름다운 붉은 광장
붉은 광장”은 모스크바의 붉은 심장일 터입니다. 크렘린의 전면에
펼쳐진, 레닌의 묘가 있는 광장으로 예전부터 차르의 선언, 판결,
포고가 내려지던 곳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에도 불구하고 이 광장
은 붉지 않습니다. 바닥에 깔려있는 포석은 다갈색이며, 규모도 그
리 크지 않습니다. 가장 넓은 부분이라고 해봐야 겨우 너비 100m,
길이 500m 가량에 지나지 않습니다. 붉은 광장이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때는 17세기 말입니다. “끄라스나야”는 고대 슬라브
어로 ‘붉은’이라는 뜻이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이라는 뜻이기도 합
니다. 결혼식을 따르는 행렬을 ‘붉은 행렬’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아
름다운 아가씨를 ‘붉은 아가씨’라 부르기도 한답니다.
ㅡ 상뜨 바실리 성당
갖가지 색깔로 소용돌이치는 양파 모양의 돔으로 유명한 성 바실리
대성당은 아마 모스크바에서 가장 잘 알려진 건물일 것이다. 성 바
실리 대성당은 단일한 토대 위에 모여 있는 아홉 채의 독립된 예배
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모두가 중앙의 첨탑을 둘러싸고 배열
되어 있습니다.
이 성당은 '잔혹한 황제' 차르 이반 4세에 명에 따라, 1555년에서
1561년까지 그가 카잔의 타타르 칸국(kan國)을 정벌한 일을 기념
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날은 마침 '성모의
전구(轉求) 축일'이었으므로, 성당의 원래 이름도 이렇게 지어졌습
니다. 이후에는 유명한 성인인 '그리스도에 미친 바실리'의 이름을
따 성 바실리 대성당이라 알려졌습니다. 이반 4세는 완공된 성 바실
리 대성당의 모습에 반해 이런 아름다운 건물을 두 번 다시는 못 짓
게끔 건축을 담당했던 '바르마'와 '보스토니크'의 눈을 멀게 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모스크바를 대
표하는 바실리 성당의 별명은 일명 ‘테트리스 성당’입니다. 유명한
게임 테트리스의 첫 화면에 나오면서 수많은 사람의 인상에 선명하
게 각인되었기 때문입니다.
ㅡ 볼쇼이 극장
러시아연방 수도 모스크바에 있는 극장. 볼쇼이는 ‘대(大)’라는 뜻이
며, 정식명칭은 ‘러시아 국립 아카데미 대극장’입니다. 러시아를 대
표하는 오페라와 발레의 상설극장으로서 전속 오페라단 · 합창단 ·
발레단 · 관현악단 및 부속학교 등이 있으며, 객석은 2150석을 갖추
고 있습니다.
볼쇼이극장의 뿌리는 제정 러시아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인 1776년
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해 3월 모스크바 극장 감독 장관에 임명
된 우루소프 왕자가 모스크바에 석조극장 건축 계획을 마련했고 이
후 5년에 걸쳐 건설됐습니다. 800석 규모로 지어진 이 극장의 첫 이
름은 페트로프스키 극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극장이 1805년 화재
로 소실되었고 1825년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로 다시 극장을 건립,
'볼쇼이'로 명칭이 붙여졌습니다. 이후 몇 차례의 큰 불로 재건을 되
풀이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1856년에 다시 지어진 5층 규모의 석조
건물입니다.
볼쇼이 극장에서는 라흐마니노프, 루빈스타인, 차이코프스키 등의
전설적인 작곡가들이 자작을 지휘했습니다. 또한 볼쇼이 극장은
발레를 중심으로 명성을 획득해 갔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볼쇼이의
명성은 제국의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마리노프스키극장
에 가려 빛을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ㅡ 모스끄바대학
모스끄바 국립 대학교는 학자인 미하일 로모노소프에 의해 1755년
막부의 중심가에 세워졌습니다. 1940년대 말, 스탈린은 러시아의
새 대학교 건물 "學問의 殿堂"을 봉헌키로 작정하고 레프 루드네프
(1885~1956년) 에게 설계를 맡겼습니다. 스탈린의 집권이 강화되면
서 모스크바의 구성주의 건축은 막을 내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축
양식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스탈린은 모스크바 시가지의 상당 부분을 소위 '스탈린 고딕' 양식으로
재건하고 싶어했습니다. 스탈린의 '7자매'라고 불리는 일곱 개의 마천
루가 시내 중심지에 세워져, 모스크바 어디에 있더라도 그중 하나가 눈
에 들어오게끔 했습니다. 이 건물들은 사실은 전혀 매력적인 구석이라
고는 없는, 위협적인 건물들입니다.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는 '7자매' 중
에서도 가장 높은 건물로 파랑상 구릉에 세워져 높이가 240미터로,
사실 1988년까지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습니다. 크렘린의 탑
과 유럽의 고딕 대성당에서 영향을 받았고 독일군 전쟁 포로들의 노동
력으로 지어졌으며, 33킬로미터의 복도와 5천개의 강의실이 있습니다.
중앙 타워의 꼭대기에 있는 별은 무게가 12톤에 달하며, 정면 파사드
는 밀단과 소비에트 문장, 그리고 시계로, 그 아래의 테라스는 자신있
게 미래를 바라보는 학생들로 장식하였습니다.
ㅡ 똘스또이의 야스나야폴랴나
모스크바의 쿠르스카야 역에는 야스나야폴랴나로 가는 특급열차가
있습니다. '안나 카레리나' 에서 브론스키는 전쟁터로 떠나기 위해
이 역에서 안나와 이별을 합니다.
야스나야폴랴나는 톨스토이의 생가와 묘지가 있는 고향입니다.
이곳에 가면 대문호 톨스토이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검은 소파와
톨스토이의 무덤을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푸른 막대기의
전설이 내려옵니다. 톨스토이의 맏형 니꼴라이는 “이 숲에는 푸른 막
대기가 숨겨져 있는데, 그 막대기를 찾은 사람은 전 세계 인류를 이해
하고 행복하게 살수 있다.”고 늘 말해왔습니다. 어린 톨스토이와 그의
형제들은 그 막대기를 찾아 영지의 숲속을 돌아다니곤 했다고 합니다.
나이 들어서도 그 막대기를 잊지 못하던 톨스토이는 가장 사랑하던
셋째 딸에게 바로 그 숲의 계곡에 무덤을 만들어줄 것을 유언으로 남
겼습니다. 비석도 없이 조촐한 그의 무덤은 그 유언에 따른 것입니다.
ㅡ 도스또옙스끼는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로 모스크바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넋의리얼리즘'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내면을 추구하여 근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았습니다.
농노제적(農奴制的) 구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적 제관계(諸關係)
가 대신 들어서려는 과도기의 러시아에서 시대의 모순에 고민하면서,
그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적으로 작품세계에 투영한 그의 문학
세계는 현대성을 두드러지게 지니고 있으며, 20세기의 사상과 문학
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과 주요한 작품으
로 죄와 벌. 까라마죠프가의 형제들. 악령. 백치 등이 있습니다.
* 깔리닌그라뜨 등의 개명
칼리닌그라드(Калининград)는 발트 해 연안에 있는 러시아의 월경
지인 칼리닌그라뜨 주(북쪽은 리투아니아, 남쪽으로는 폴란드, 서쪽
으로는 발트 해에 접해 있다)의 주도이며, 발트 해에 면한 항구 도시
입니다. 1256년에 건설된 이 도시는 튜튼기사단 국가, 프로이센 공
국의 수도였으며, 동프로이센의 주도(州都)로서 쾨니히스베르크
(Koenigsberg)로 불렸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독일 북동부
변경의 중요 도시였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프로이센의 북부
1/3 가량이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1946년에 소련의
정치인 미하일 칼리닌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쾨니히스부르끄는 독일의 대철학자 칸트의 고향인데 그가 주창한
영구평화론에서 국제연맹을 도출한 것에 비추어 볼때 그의 고향이
전쟁의 승전국에게 빼앗기고 만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합니다.
이러한 개명의 또 다른 예는
페테르그라뜨가 ㅡ> 레닌그라뜨ㅡ> 상뜨 뻬쩨르부르끄로
볼고그라뜨가 ㅡ> 스딸린그라뜨 등으로 바뀐 사례에도 있습니다.
* 바이깔 호수 ( Озеро Байкал)
바이칼호는 시베리아아의 남서쪽 이르쿠츠크(Irkutsk)시 부근의 깊은
오지에 위치하며, 호수의 넓이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넓어서 지구상
에 있는 얼지 않는 민물의 20%를 담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갈라파고스(Galapagos of Russia)’라고 알려진 바이칼 호수
는 오랜 세월 동안 계속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진화론적으로 특별한
가치가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풍부하고 비범한 민물 동물상(動物相,
fauna)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호수는 달리 부르는 이름도 많아서 ‘성스러운 바다’, ‘세계의 민물
창고’, ‘시베리아의 푸른눈’, ‘시베리아의 진주’ 등으로 불립니다. 특히
지구 상에서 가장 깊은 오지에 묻혀 있고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
인지 지구 상에서 가장 깨끗한 물로 남아 있습니다.
바이칼 호는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이름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곳에
우리 민족의 뿌리가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바이칼 호 주변에는 여
러 소수 민족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부랴트(Buryat)족은 인구 40만
의 소수 민족으로서 자치 공화국을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
의 ‘선녀와 나무꾼’과 같은 설화를 갖고 있고, 특히 그들이 간직한 샤머
니즘의 원형은 우리 민속과 비슷한 점이 정말 많습니다.
* 시베리아 횡단 철도
러시아 서(西)시베리아 지방의 모스끄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를
연결하는 대륙횡단철도로 1891년에 시작해 1916년에 완공하였으며
총 길이가 약 9,400km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입니다.
시베리아횡단(trans-siberia)선은 아시아대륙 동쪽의 끝 블라디보스토
크에서 출발해 중국 북부를 지나 바이칼 호수를 남으로 끼고 이르쿠츠
크, 노보시비리스크, 옴스크, 예카쩨린부르크를 거쳐 우랄산맥을 넘어
모스크바, 그리고 길게는 쌍뜨 뻬쩨르부르크, 그리고 핀란드의 헬싱키
까지를 이어주는 지구를 반 바퀴 휘감아 도는 장대한 교통라인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의선이 복원되어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연결되면 우리
철도를 이용해 유럽 대륙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 블라디보스또끄(Владивосток)는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의 문호로 극동지역 동해 연안의 최대 항구도시
겸 군항입니다. 소련 극동함대의 사령부가 있는 해군기지이며,
북극해와 태평양을 잇는 북빙양 항로의 종점이며,
모스크바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 철도의 종점지이기도 합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 마크 뾰족탑과 탑이 기묘하게 한데 모여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철도역은 17세기 풍의 파사드(façade)형태 건축
물입니다. 이는 9천288㎞ 떨어진 곳에 있는 모스크바의 극동노선의 역
인 야로슬라프스키를 거의 똑같이 모방하여 건축한 것입니다. 블라디
보스토크 역은 대중교통수단의 역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울리지 않은
마치 황실의 궁전의 한 부분 같은 건축물입니다.
이 블라디보스또크驛舍는 코노발로프가 설계하여 1907년~1912년에
건설되었으며, 역사의 외관은 러시아의 전통예술 양식으로 장식한 엷
은 녹색 석조건물의 모습을 띄고 있는데 이것은 블라디보스토크가
러시아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일찍부터 부동항을 구하려는 러시아의 해양정책의 발로로 이곳의
지명은 알고 보면 ‘동방(восток)을 지배하라(Влади)’라는 뜻으로 다소
호전적-침략성적 의도까지 적나라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러시아로 찾아가는 여행객이라면
다음 두 명화의 배경이된 그 현장을 살펴봄직 합니다.
ㅡ 전함 포춈킨(Броненосец Потёмкин)
일본과의 해전을 치루고 기지로 귀환하던 러시아 전함 포템킨에서
수병들은 열악하기 그지없는 대접을 받는 것때문에 수병과 장교들
은 대치를 하기 시작하여 결국 선상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고 짜르
의 충실한 장교를 물리친다. 이 와중에 혁명의 불꽃을 올렸던 수병
이 죽음을 맞는다. 수병들은 그의 시체를 오뎃사 부둣가에 고이 모
시고, 오뎃사 시민들은 하나둘씩 모여 수병의 죽음을 추모합니다.
어느새 오뎃사 시민들이 구름떼같이 모여들더니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체제 비난 시위로 이어진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짜르 병사
는 오뎃사 계단에서 시민대학살극을 자행하였습니다.
피의 학살로 얼룩진 이 오뎃사는 흑해연안에 있으며 인근에 있는
크리미아반도에는 우리나라의 앞길이 강대국에 의하여 전단되고
만 얄타회담이 열렸던 얄타가 위치해 있습니다.
ㅡ 의사 지바고(Доктор Живаго)
보리스 빠스쩨르나끄의 동명의 소설을 토대로 한 영화입니다.
러시아 명문에 태어난, 의사이자 시인인 유리 지바고는
어린시절부터 고아가 되었고 그로메코가의 양자가 됩니다. 러시아
혁명 전후의 역사적인 큰 흐름 속에서 지바고는 양부모의 딸 토냐
와 결혼하고 군의관으로 동원되어 전쟁터로 나갑니다. 그곳에서 아
름답고 정열적인 간호원 라라를 만나 사랑하게 되지만 러시아 혁명
과 전쟁이 두 사람을 갈라 놓습니다. 8년후 어느날 지바고는 전차
차창밖의 라라를 발견하고 쫓아가지만 결국은 심장마비로 쓰러집
니다.
촬영은 모두 에스파냐에서 했고, 겨울 장면은 핀란드에서 찍었습
니다. 러시아 전통 현악기인 발랄라이카의 낭랑한 음색을 잘 살린
모리스 자르(Maurice Jarre)의 <라라의 테마>가, 화면 가득히 눈이
부실정도로 노오란 유채꽃밭을 배경으로 들려오면서 이 영화를 한
층 더 돋보이게 해주었습니다. 이 사랑스러운 라라의 테마는 훗날
Somewhere My Love 라는 시를 붙여 팝송으로 많이 불려졌습니다.
* 러시아 여행객에게 기념상품과 추억거리로
가장 인기있는 상품에는 감자를 주원료로 하여 빚은 무색 무취한
증류주로 러시아의 추위를 덜어주는 火酒 보뜨까(Водка:러시아
어로 물을 뜻하는 낱말 'вода 보다'에서 유래되었다)와
술안주로 까스피해에서 잡히는 철갑상어의 알로 만든 캐비아와
자작나무로 깍은 인형 안에 또 인형이 든 마뜨료시까(Матрешка)
일 것입니다. 모성의 다산성을 바라는 주술적 신앙을 담고 있으며
일본의 인형을 들여와서 러시아식으로 발전시킨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문학작품이나 영화 등에 자주 등장하는
자작나무(베례자:береза, birch tree, 白華)는 하늘로 팔을 쭉쭉
뻗은 날씬한 몸매에 미인의 흰 피부인양 흰 나무껍질로 하얗게
단장하고 있는 나무입니다. 자작나무라는 이름은 그 마른 나무가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불에 탄다는 데서 우리말 이름이 붙여졌습
니다. 자작나무는 나무 껍질로 아주 유명합니다. 하얗고 윤이 나며
종이 처럼 얇게 옆으로 잘 벗겨집니다. 예전엔 이 자작나무 껍질에
불을 붙여 사용했으며 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화촉(華燭)을 밝힌다
고 하는데, 화촉은 이 자작나무 껍질입니다. 또, 자작나무 껍질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도 썼습니다. 신라의 천마도도 자작나무 껍질
에 그린 그림이라 합니다.
내가 제일 먼저 접한 러시아말들 일랑
6-25동란 기간에 널리 퍼져 쓰인
따바리시(치) товарищ 同志.동무.벗일상 싶습니다.
스빠시버 спасибо 고맙습니다 thank you
허라쇼 хорошо 좋습니다 good
쁘라빌너 правильно 맞아! 빙고!
다 스비다냐 до свидания 잘 가세요 굳바이, 사요나라
브 나로드 в народ 민중속으로 농촌운동의 구호
노르마 норма 노동할당량 현장일 의무량
스쩬까라진 Стенькa Разин 스쩬까 라진 스테판 라진
까쮸샤 Катюша 연인 女名 까쮸샤의 노래
러시아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스칸디나비아반도의 봐이킹족의 일족인 루스족이 동북슬라브
지역에 이동해 온 것이 러시아의 시원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볼가강은 러시아의 어머니이고 심장이고 젖줄입니다.
세계에서 제일 넓은 광활한 영토를 핏줄처럼 이어주고 있는
이들 강들이야말로 러시아의 대동맥입니다. 강은 교통의 물길
이 되고 들판을 기름지게 적셔 농작물을 수확하여 인간과 만물
을 길러 줍니다.
* 수도 모스끄바( r: Москва, e: Moscow)는
유럽러시아 중부, 오카강(江) 지류인 모스크바강 유역의 삼각지
소택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도 모스끄바인 것
이며 볼가강과 오카강 사이에 있어 水運의 중계지로 유리한 위
치를 차지했기 때문에, 일개 한촌으로 발족하여 모스크바公國
의 수도가 되고, 다시 러시아帝國의 수도가 되어 크게 발전하였
습니다.
모스끄바는, 전설이나 고고학적 유물에 따르면,
9∼10세기 이래 그곳에 취락이 존재하였음을 말해 주고 있지만
모스크바가 처음 러시아의 연대기에 나타나는 것은
1147년에 수즈달공公 유리 돌고루키가 오늘날의 크렘린의 기원
이 된 목조 성채(요새)를 구축하여, 당시만 하더라도 도시기능을
제대로 갖추고 있었습니다.
1238년 몽골(蒙古)의 침입으로 거리가 불탔으나,
1271년 다닐공이 이곳을 차지하여 모스크바공국을 세웠고
1367년 리투아니아의 침입때문에 크렘린에 석조성벽이 구축되고,
15세기에 모스크바대공국의 통일에 따라 모스크바는 전러시아의
수도가 되었으며, 이반 3세가 크렘린에 우스펜스키대성당을 짓고,
크렘린 외곽에 하얀 석조성벽을 구축함으로써 콘스탄티노플 함락
뒤에는 제3의 로마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모스크바는 몇 차례의 화재를 입고 시민의 폭동,
타타르의 침입 등이 겹쳤습니다. 그래서 16세기 말에는 대규모
축성이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 상뜨 뻬쩨르부르끄(Санкт-Петербург)는
러시아의 북서쪽 발트 해의 핀란드 만에 접해 있는 네바 강 하구에
있으며, 그 델타지대의 형성된 자연섬과 운하로 인해 생긴 수많은
섬 위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예전에는 페트로그라드와 레닌그라드
(Ленинград)로 불리다가 1924년 레닌이 죽자 그를 기념하여 레닌
그라드로 불리게 되었고, 1991년 다시 옛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차르 표트르가 겨울 冬宮을 지어 1703년 설립한 이
도시는 1713년 모스크바에서 천도하여 1918년까지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으나 역대 대관식은 모스끄바에서 행해졌고 이후 수도는 다
시 모스크바로 옮겨졌습니다.
현재 겨울 冬宮 본관은 新. 舊. 小. 劇場 등 4동의 부속 예르미따시
건물과 더불어 "예르미따시 박물관 겸 미술관"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대영박물관, 프랑스의 루불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
관으로 손꼽히는 이 미술관은 1764년에 예카테리나 2세가 미술품
을 수집한 것이 예르미따시의 기원입니다. 본래는 예카테리나 2세
전용의 미술관으로, 프랑스어로 "은둔지"를 의미하는 "예르미타시"
라 하는 명칭도 거기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왕족과 귀족들
의 수집품을 모았으나, 19세기말에는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었습니다.
네프스키 대로에 있는 수도원 주변에는 아치 형태의 문이 있는데
이문 입구의 왼쪽에 있는 묘지가 라자레프 묘지입니다.
이곳에는 건축가 보로닌, 자하로프, 고즈롭스키, 로시,
과학자 로마노소프의 묘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입구 오른쪽에 있는 것이 타흐빈 묘지인데,
도스토옙스키, 주콥스키, 카람진 등의 유명한 문학가와
차이콥스키, 무소르크스키 등 유명한 작곡가의 묘가 있습니다.
로마노프家의 말기에, 고려의 요승 신돈처럼,
괴짜 수도사 라스뿌찐(Григорий Ефимович Распyтин, 1869~
1916)이 치료와 예언의 능력으로 알렉산드라 황후의 총애를 업
고 정권을 전횡하다가 귀족들의 미움을 받고 네바강에 빠뜨려져
죽었습니다. 라스뿌찐은 시베리아의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
며, 18살 때부터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1903년 당시 제정 러시아
수도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나타났고, 혈우병으로 고생한 황태
자를 기도 요법으로 병세를 완화시켜 황제와 그 황족들에게 신망
을 얻었으며, 귀족 대접을 받게 되었으나 안팎이 다른 이중생활
을 하는, 그의 姓처럼 라스뿌트닉한 탕아(蕩兒)이었습니다.
* 19세기의 러시아에서는 사람들의 세평이
러시아의 심장은 모스끄바이고
러시아의 머리는 상뜨뻬쩨르부르끄이고
러시아의 지갑은 니즈니 노보고로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곳은 막심 골리끼가 생장하고 그의 대표작의 무대로 하여
"어머니"를 쓴 곳으로 도시 여기 저기에 고리끼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시가지 중심지에 넓게 펼쳐진 고리끼광장에는
그의 동상이 우뚝서 있습니다.
러시아의 머리 이야기는 위에서 보았으니
이제는 러시아의 심장 모스끄바 이야기를 조금 해볼까 합니다.
ㅡ 검은 끄레믈린궁
냉전 시대에널리 알려졌던 소련의 이미지는 ‘크렘린’과 ‘검은’을
찰떡처럼 붙여 놓았습니다. 그들의 음험함, 속을 알 수 없는 무
표정함, 비열한 계산속 등을 몽땅 ‘검다’는 표현 속에 우겨 넣어
크렘린 위에 발라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크렘린은 검지 않
습니다. 온갖 아름다운 성당과 건물들이 모여 있는 이곳은 현재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다채로운 색으로 다가갑니다.
원래 크렘린의 의미는 고대 러시아에서 쓰이던 보통명사로,
‘도시 내부의 요새, 성벽’일 따름입니다.
ㅡ 아름다운 붉은 광장
붉은 광장”은 모스크바의 붉은 심장일 터입니다. 크렘린의 전면에
펼쳐진, 레닌의 묘가 있는 광장으로 예전부터 차르의 선언, 판결,
포고가 내려지던 곳입니다. 그러나 그 이름에도 불구하고 이 광장
은 붉지 않습니다. 바닥에 깔려있는 포석은 다갈색이며, 규모도 그
리 크지 않습니다. 가장 넓은 부분이라고 해봐야 겨우 너비 100m,
길이 500m 가량에 지나지 않습니다. 붉은 광장이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한 때는 17세기 말입니다. “끄라스나야”는 고대 슬라브
어로 ‘붉은’이라는 뜻이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이라는 뜻이기도 합
니다. 결혼식을 따르는 행렬을 ‘붉은 행렬’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아
름다운 아가씨를 ‘붉은 아가씨’라 부르기도 한답니다.
ㅡ 상뜨 바실리 성당
갖가지 색깔로 소용돌이치는 양파 모양의 돔으로 유명한 성 바실리
대성당은 아마 모스크바에서 가장 잘 알려진 건물일 것이다. 성 바
실리 대성당은 단일한 토대 위에 모여 있는 아홉 채의 독립된 예배
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모두가 중앙의 첨탑을 둘러싸고 배열
되어 있습니다.
이 성당은 '잔혹한 황제' 차르 이반 4세에 명에 따라, 1555년에서
1561년까지 그가 카잔의 타타르 칸국(kan國)을 정벌한 일을 기념
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날은 마침 '성모의
전구(轉求) 축일'이었으므로, 성당의 원래 이름도 이렇게 지어졌습
니다. 이후에는 유명한 성인인 '그리스도에 미친 바실리'의 이름을
따 성 바실리 대성당이라 알려졌습니다. 이반 4세는 완공된 성 바실
리 대성당의 모습에 반해 이런 아름다운 건물을 두 번 다시는 못 짓
게끔 건축을 담당했던 '바르마'와 '보스토니크'의 눈을 멀게 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모스크바를 대
표하는 바실리 성당의 별명은 일명 ‘테트리스 성당’입니다. 유명한
게임 테트리스의 첫 화면에 나오면서 수많은 사람의 인상에 선명하
게 각인되었기 때문입니다.
ㅡ 볼쇼이 극장
러시아연방 수도 모스크바에 있는 극장. 볼쇼이는 ‘대(大)’라는 뜻이
며, 정식명칭은 ‘러시아 국립 아카데미 대극장’입니다. 러시아를 대
표하는 오페라와 발레의 상설극장으로서 전속 오페라단 · 합창단 ·
발레단 · 관현악단 및 부속학교 등이 있으며, 객석은 2150석을 갖추
고 있습니다.
볼쇼이극장의 뿌리는 제정 러시아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인 1776년
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해 3월 모스크바 극장 감독 장관에 임명
된 우루소프 왕자가 모스크바에 석조극장 건축 계획을 마련했고 이
후 5년에 걸쳐 건설됐습니다. 800석 규모로 지어진 이 극장의 첫 이
름은 페트로프스키 극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극장이 1805년 화재
로 소실되었고 1825년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로 다시 극장을 건립,
'볼쇼이'로 명칭이 붙여졌습니다. 이후 몇 차례의 큰 불로 재건을 되
풀이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1856년에 다시 지어진 5층 규모의 석조
건물입니다.
볼쇼이 극장에서는 라흐마니노프, 루빈스타인, 차이코프스키 등의
전설적인 작곡가들이 자작을 지휘했습니다. 또한 볼쇼이 극장은
발레를 중심으로 명성을 획득해 갔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볼쇼이의
명성은 제국의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마리노프스키극장
에 가려 빛을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ㅡ 모스끄바대학
모스끄바 국립 대학교는 학자인 미하일 로모노소프에 의해 1755년
막부의 중심가에 세워졌습니다. 1940년대 말, 스탈린은 러시아의
새 대학교 건물 "學問의 殿堂"을 봉헌키로 작정하고 레프 루드네프
(1885~1956년) 에게 설계를 맡겼습니다. 스탈린의 집권이 강화되면
서 모스크바의 구성주의 건축은 막을 내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건축
양식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스탈린은 모스크바 시가지의 상당 부분을 소위 '스탈린 고딕' 양식으로
재건하고 싶어했습니다. 스탈린의 '7자매'라고 불리는 일곱 개의 마천
루가 시내 중심지에 세워져, 모스크바 어디에 있더라도 그중 하나가 눈
에 들어오게끔 했습니다. 이 건물들은 사실은 전혀 매력적인 구석이라
고는 없는, 위협적인 건물들입니다.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는 '7자매' 중
에서도 가장 높은 건물로 파랑상 구릉에 세워져 높이가 240미터로,
사실 1988년까지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습니다. 크렘린의 탑
과 유럽의 고딕 대성당에서 영향을 받았고 독일군 전쟁 포로들의 노동
력으로 지어졌으며, 33킬로미터의 복도와 5천개의 강의실이 있습니다.
중앙 타워의 꼭대기에 있는 별은 무게가 12톤에 달하며, 정면 파사드
는 밀단과 소비에트 문장, 그리고 시계로, 그 아래의 테라스는 자신있
게 미래를 바라보는 학생들로 장식하였습니다.
ㅡ 똘스또이의 야스나야폴랴나
모스크바의 쿠르스카야 역에는 야스나야폴랴나로 가는 특급열차가
있습니다. '안나 카레리나' 에서 브론스키는 전쟁터로 떠나기 위해
이 역에서 안나와 이별을 합니다.
야스나야폴랴나는 톨스토이의 생가와 묘지가 있는 고향입니다.
이곳에 가면 대문호 톨스토이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검은 소파와
톨스토이의 무덤을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푸른 막대기의
전설이 내려옵니다. 톨스토이의 맏형 니꼴라이는 “이 숲에는 푸른 막
대기가 숨겨져 있는데, 그 막대기를 찾은 사람은 전 세계 인류를 이해
하고 행복하게 살수 있다.”고 늘 말해왔습니다. 어린 톨스토이와 그의
형제들은 그 막대기를 찾아 영지의 숲속을 돌아다니곤 했다고 합니다.
나이 들어서도 그 막대기를 잊지 못하던 톨스토이는 가장 사랑하던
셋째 딸에게 바로 그 숲의 계곡에 무덤을 만들어줄 것을 유언으로 남
겼습니다. 비석도 없이 조촐한 그의 무덤은 그 유언에 따른 것입니다.
ㅡ 도스또옙스끼는
톨스토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로 모스크바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넋의리얼리즘'이라 불리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내면을 추구하여 근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았습니다.
농노제적(農奴制的) 구질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적 제관계(諸關係)
가 대신 들어서려는 과도기의 러시아에서 시대의 모순에 고민하면서,
그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을 전적으로 작품세계에 투영한 그의 문학
세계는 현대성을 두드러지게 지니고 있으며, 20세기의 사상과 문학
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과 주요한 작품으
로 죄와 벌. 까라마죠프가의 형제들. 악령. 백치 등이 있습니다.
* 깔리닌그라뜨 등의 개명
칼리닌그라드(Калининград)는 발트 해 연안에 있는 러시아의 월경
지인 칼리닌그라뜨 주(북쪽은 리투아니아, 남쪽으로는 폴란드, 서쪽
으로는 발트 해에 접해 있다)의 주도이며, 발트 해에 면한 항구 도시
입니다. 1256년에 건설된 이 도시는 튜튼기사단 국가, 프로이센 공
국의 수도였으며, 동프로이센의 주도(州都)로서 쾨니히스베르크
(Koenigsberg)로 불렸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독일 북동부
변경의 중요 도시였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프로이센의 북부
1/3 가량이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1946년에 소련의
정치인 미하일 칼리닌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쾨니히스부르끄는 독일의 대철학자 칸트의 고향인데 그가 주창한
영구평화론에서 국제연맹을 도출한 것에 비추어 볼때 그의 고향이
전쟁의 승전국에게 빼앗기고 만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합니다.
이러한 개명의 또 다른 예는
페테르그라뜨가 ㅡ> 레닌그라뜨ㅡ> 상뜨 뻬쩨르부르끄로
볼고그라뜨가 ㅡ> 스딸린그라뜨 등으로 바뀐 사례에도 있습니다.
* 바이깔 호수 ( Озеро Байкал)
바이칼호는 시베리아아의 남서쪽 이르쿠츠크(Irkutsk)시 부근의 깊은
오지에 위치하며, 호수의 넓이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넓어서 지구상
에 있는 얼지 않는 민물의 20%를 담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갈라파고스(Galapagos of Russia)’라고 알려진 바이칼 호수
는 오랜 세월 동안 계속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진화론적으로 특별한
가치가 있으며, 세계에서 가장 풍부하고 비범한 민물 동물상(動物相,
fauna)을 만들어냈습니다.
이 호수는 달리 부르는 이름도 많아서 ‘성스러운 바다’, ‘세계의 민물
창고’, ‘시베리아의 푸른눈’, ‘시베리아의 진주’ 등으로 불립니다. 특히
지구 상에서 가장 깊은 오지에 묻혀 있고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아서
인지 지구 상에서 가장 깨끗한 물로 남아 있습니다.
바이칼 호는 아직까지 우리에게는 이름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그곳에
우리 민족의 뿌리가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바이칼 호 주변에는 여
러 소수 민족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부랴트(Buryat)족은 인구 40만
의 소수 민족으로서 자치 공화국을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
의 ‘선녀와 나무꾼’과 같은 설화를 갖고 있고, 특히 그들이 간직한 샤머
니즘의 원형은 우리 민속과 비슷한 점이 정말 많습니다.
* 시베리아 횡단 철도
러시아 서(西)시베리아 지방의 모스끄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를
연결하는 대륙횡단철도로 1891년에 시작해 1916년에 완공하였으며
총 길이가 약 9,400km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입니다.
시베리아횡단(trans-siberia)선은 아시아대륙 동쪽의 끝 블라디보스토
크에서 출발해 중국 북부를 지나 바이칼 호수를 남으로 끼고 이르쿠츠
크, 노보시비리스크, 옴스크, 예카쩨린부르크를 거쳐 우랄산맥을 넘어
모스크바, 그리고 길게는 쌍뜨 뻬쩨르부르크, 그리고 핀란드의 헬싱키
까지를 이어주는 지구를 반 바퀴 휘감아 도는 장대한 교통라인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의선이 복원되어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연결되면 우리
철도를 이용해 유럽 대륙으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 블라디보스또끄(Владивосток)는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의 문호로 극동지역 동해 연안의 최대 항구도시
겸 군항입니다. 소련 극동함대의 사령부가 있는 해군기지이며,
북극해와 태평양을 잇는 북빙양 항로의 종점이며,
모스크바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 철도의 종점지이기도 합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 마크 뾰족탑과 탑이 기묘하게 한데 모여
있는 블라디보스토크 철도역은 17세기 풍의 파사드(façade)형태 건축
물입니다. 이는 9천288㎞ 떨어진 곳에 있는 모스크바의 극동노선의 역
인 야로슬라프스키를 거의 똑같이 모방하여 건축한 것입니다. 블라디
보스토크 역은 대중교통수단의 역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울리지 않은
마치 황실의 궁전의 한 부분 같은 건축물입니다.
이 블라디보스또크驛舍는 코노발로프가 설계하여 1907년~1912년에
건설되었으며, 역사의 외관은 러시아의 전통예술 양식으로 장식한 엷
은 녹색 석조건물의 모습을 띄고 있는데 이것은 블라디보스토크가
러시아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일찍부터 부동항을 구하려는 러시아의 해양정책의 발로로 이곳의
지명은 알고 보면 ‘동방(восток)을 지배하라(Влади)’라는 뜻으로 다소
호전적-침략성적 의도까지 적나라하게 나타내 보이고 있습니다.
러시아로 찾아가는 여행객이라면
다음 두 명화의 배경이된 그 현장을 살펴봄직 합니다.
ㅡ 전함 포춈킨(Броненосец Потёмкин)
일본과의 해전을 치루고 기지로 귀환하던 러시아 전함 포템킨에서
수병들은 열악하기 그지없는 대접을 받는 것때문에 수병과 장교들
은 대치를 하기 시작하여 결국 선상에서는 반란이 일어나고 짜르
의 충실한 장교를 물리친다. 이 와중에 혁명의 불꽃을 올렸던 수병
이 죽음을 맞는다. 수병들은 그의 시체를 오뎃사 부둣가에 고이 모
시고, 오뎃사 시민들은 하나둘씩 모여 수병의 죽음을 추모합니다.
어느새 오뎃사 시민들이 구름떼같이 모여들더니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체제 비난 시위로 이어진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짜르 병사
는 오뎃사 계단에서 시민대학살극을 자행하였습니다.
피의 학살로 얼룩진 이 오뎃사는 흑해연안에 있으며 인근에 있는
크리미아반도에는 우리나라의 앞길이 강대국에 의하여 전단되고
만 얄타회담이 열렸던 얄타가 위치해 있습니다.
ㅡ 의사 지바고(Доктор Живаго)
보리스 빠스쩨르나끄의 동명의 소설을 토대로 한 영화입니다.
러시아 명문에 태어난, 의사이자 시인인 유리 지바고는
어린시절부터 고아가 되었고 그로메코가의 양자가 됩니다. 러시아
혁명 전후의 역사적인 큰 흐름 속에서 지바고는 양부모의 딸 토냐
와 결혼하고 군의관으로 동원되어 전쟁터로 나갑니다. 그곳에서 아
름답고 정열적인 간호원 라라를 만나 사랑하게 되지만 러시아 혁명
과 전쟁이 두 사람을 갈라 놓습니다. 8년후 어느날 지바고는 전차
차창밖의 라라를 발견하고 쫓아가지만 결국은 심장마비로 쓰러집
니다.
촬영은 모두 에스파냐에서 했고, 겨울 장면은 핀란드에서 찍었습
니다. 러시아 전통 현악기인 발랄라이카의 낭랑한 음색을 잘 살린
모리스 자르(Maurice Jarre)의 <라라의 테마>가, 화면 가득히 눈이
부실정도로 노오란 유채꽃밭을 배경으로 들려오면서 이 영화를 한
층 더 돋보이게 해주었습니다. 이 사랑스러운 라라의 테마는 훗날
Somewhere My Love 라는 시를 붙여 팝송으로 많이 불려졌습니다.
* 러시아 여행객에게 기념상품과 추억거리로
가장 인기있는 상품에는 감자를 주원료로 하여 빚은 무색 무취한
증류주로 러시아의 추위를 덜어주는 火酒 보뜨까(Водка:러시아
어로 물을 뜻하는 낱말 'вода 보다'에서 유래되었다)와
술안주로 까스피해에서 잡히는 철갑상어의 알로 만든 캐비아와
자작나무로 깍은 인형 안에 또 인형이 든 마뜨료시까(Матрешка)
일 것입니다. 모성의 다산성을 바라는 주술적 신앙을 담고 있으며
일본의 인형을 들여와서 러시아식으로 발전시킨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문학작품이나 영화 등에 자주 등장하는
자작나무(베례자:береза, birch tree, 白華)는 하늘로 팔을 쭉쭉
뻗은 날씬한 몸매에 미인의 흰 피부인양 흰 나무껍질로 하얗게
단장하고 있는 나무입니다. 자작나무라는 이름은 그 마른 나무가
자작자작 소리를 내며 불에 탄다는 데서 우리말 이름이 붙여졌습
니다. 자작나무는 나무 껍질로 아주 유명합니다. 하얗고 윤이 나며
종이 처럼 얇게 옆으로 잘 벗겨집니다. 예전엔 이 자작나무 껍질에
불을 붙여 사용했으며 결혼식을 올리는 것을 화촉(華燭)을 밝힌다
고 하는데, 화촉은 이 자작나무 껍질입니다. 또, 자작나무 껍질에
그림을 그리고 글씨도 썼습니다. 신라의 천마도도 자작나무 껍질
에 그린 그림이라 합니다.
내가 제일 먼저 접한 러시아말들 일랑
6-25동란 기간에 널리 퍼져 쓰인
따바리시(치) товарищ 同志.동무.벗일상 싶습니다.
스빠시버 спасибо 고맙습니다 thank you
허라쇼 хорошо 좋습니다 good
쁘라빌너 правильно 맞아! 빙고!
다 스비다냐 до свидания 잘 가세요 굳바이, 사요나라
브 나로드 в народ 민중속으로 농촌운동의 구호
노르마 норма 노동할당량 현장일 의무량
스쩬까라진 Стенькa Разин 스쩬까 라진 스테판 라진
까쮸샤 Катюша 연인 女名 까쮸샤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