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트 니어링의 삶과 죽음
鄭宇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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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3
2014.10.19 16:55
스카트 니어링의 삶과 죽음
스카트 니어링(Scott Nearing, 1883~1983)의 죽음은
존엄한 죽음의 대표적인 사례로 널리 인용되고 있습니다.
유언을 통하여 우리는 그가 어떤 죽음을 원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아내 헬렌(노드) 니어링은 남편 스카트 니어링의 죽음을 지키
면서, 본인이 바랬던 방식 그대로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스카트 니어링의 죽음에는 그가 살아왔던 삶의 모습이 그
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미국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탄광 도시 펜실베니아의 탄광을 운영하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펜실베니아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니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으리라.
하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아동착취 문제에 앞장서다 해고됩니다.
또 톨레도 대학 예술대 학장으로 근무하던 중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쟁을 비판하다 또 다시 해직되었습니다.
"왜 우리 젊은이들을 남의 나라 전쟁터에 가서 죽게하는가?"
이러한 스카트 니어링의 진보적인 가치관은 당시 미국사회에서 인
정받기 어려웠습니다. 스카트는 집단으로부터 이지메를 당했습니다.
대학교수에서 일방적으로 해고되고, 다시 취업한 대학교수에서
또 다시 해고됩니다. 그가 쓰는 글도 출판사에서 받아주지 않아 부
유한 집안 출신의, 전직 대학교수가 40대에 거리에 나 앉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부인(헬렌)과 함께 버몬트 숲속으로 들어가
손수 농사를 짓고, 돌로 집을 지어 스스로의 생존을 일굽니다.
먹고 사는 기본적 욕구(생리적 욕구)가 해결되자 그는 또 다시
글과 강의를 통해 잘못가는 집단을 나무라고 질책합니다.
산업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을 허망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파악했
고 자연으로 돌아가 단순한 삶을 살면서 타락한 인간성을 회복
하고자 했습니다.
자급자족하는 삶을 통하여 조화로운 삶을 실천하는 지식인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온 방식대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이야기처럼
인간다운 삶을 원했던 그는 인간다운 죽음을 통하여 삶을 완성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하기에 그의 죽음의 방식은 성스럽고 경건하기까지 합니다.
삶의 마지막을 완성하는 마침표를 조심스럽게 찍어내듯,
그는 죽음의 순간을 온전히 맞이하고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삶과 죽음을 완성합니다.
나는 그가 100살을 살고 곡기를 끊고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이
지난 날 우리 선인들이 곡기를 끊고 생을 마감하는 장면을 보
는 것같아 그가 더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ㅡ 스카트 니어링이 죽기 전에 남긴 유언에서 ㅡ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나는 자연스럽게 죽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라며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
의학은 삶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며
죽음에 대해서도 무지하니까.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이 가까이 왔을 무렵에
지붕이 없는 툭 트인 곳에 있고 싶다.
그리고 나는 단식을 하다 죽고 싶다.
죽음이 다가오면 음식을 끊고
할 수 있으면 마찬가지로 마시는 것도 끊기를 바란다.
나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그러므로 어떤 진통제나 마취제도 필요없다.
나는 되도록 빠르고 조용히 가고 싶다.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으니
오히려 자리를 함께 한 사람들은 마음과 행동에
조용함과 위엄, 이해와 평화로움을 갖춰
죽음의 경험을 함께 나눠 주기 바란다.
죽음은 무한한 경험의 세계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
삶의 다른 일들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법이 요구하지 않는 한,
어떤 장의업자나 그밖에 직업으로 시체를 다루는 사람이
이 일에 끼여들어선 안 된다.
내가 죽은 뒤 되도록 빨리 친구들이
내 몸에 작업복을 입혀 침낭 속에 넣은 다음
평범한 나무 상자에 뉘기를 바란다.
상자 안이나 위에 어떤 장식도 치장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옷을 입힌 몸은
화장터로 보내어 조용히 화장되기를 바란다.
어떤 장례식도 열려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든
언제 어떤 식으로든
설교사나 목사, 그밖의 직업 종교인이 주관해서는 안 된다.
화장이 끝난 뒤 되도록 빨리 나의 아내가,
만일 아내가 나보다 먼저 가거나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누군가 다른 친구가 재를 거두어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나무 아래 뿌려 주기 바란다.
나는 맑은 의식으로 이 모든 요청을 하는 바이며,
이런 요청이 내 뒤에 계속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존중되기를 바란다.
스카트 니어링(Scott Nearing, 1883~1983)의 죽음은
존엄한 죽음의 대표적인 사례로 널리 인용되고 있습니다.
유언을 통하여 우리는 그가 어떤 죽음을 원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아내 헬렌(노드) 니어링은 남편 스카트 니어링의 죽음을 지키
면서, 본인이 바랬던 방식 그대로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스카트 니어링의 죽음에는 그가 살아왔던 삶의 모습이 그
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미국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평화주의자였던 그는
탄광 도시 펜실베니아의 탄광을 운영하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펜실베니아 대학의 교수가 되었으니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으리라.
하지만 정치적으로 민감한 아동착취 문제에 앞장서다 해고됩니다.
또 톨레도 대학 예술대 학장으로 근무하던 중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쟁을 비판하다 또 다시 해직되었습니다.
"왜 우리 젊은이들을 남의 나라 전쟁터에 가서 죽게하는가?"
이러한 스카트 니어링의 진보적인 가치관은 당시 미국사회에서 인
정받기 어려웠습니다. 스카트는 집단으로부터 이지메를 당했습니다.
대학교수에서 일방적으로 해고되고, 다시 취업한 대학교수에서
또 다시 해고됩니다. 그가 쓰는 글도 출판사에서 받아주지 않아 부
유한 집안 출신의, 전직 대학교수가 40대에 거리에 나 앉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포기하지 않습니다.
부인(헬렌)과 함께 버몬트 숲속으로 들어가
손수 농사를 짓고, 돌로 집을 지어 스스로의 생존을 일굽니다.
먹고 사는 기본적 욕구(생리적 욕구)가 해결되자 그는 또 다시
글과 강의를 통해 잘못가는 집단을 나무라고 질책합니다.
산업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을 허망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파악했
고 자연으로 돌아가 단순한 삶을 살면서 타락한 인간성을 회복
하고자 했습니다.
자급자족하는 삶을 통하여 조화로운 삶을 실천하는 지식인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온 방식대로 죽음을 맞이한다는 이야기처럼
인간다운 삶을 원했던 그는 인간다운 죽음을 통하여 삶을 완성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하기에 그의 죽음의 방식은 성스럽고 경건하기까지 합니다.
삶의 마지막을 완성하는 마침표를 조심스럽게 찍어내듯,
그는 죽음의 순간을 온전히 맞이하고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삶과 죽음을 완성합니다.
나는 그가 100살을 살고 곡기를 끊고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이
지난 날 우리 선인들이 곡기를 끊고 생을 마감하는 장면을 보
는 것같아 그가 더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ㅡ 스카트 니어링이 죽기 전에 남긴 유언에서 ㅡ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나는 자연스럽게 죽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라며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
의학은 삶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며
죽음에 대해서도 무지하니까.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이 가까이 왔을 무렵에
지붕이 없는 툭 트인 곳에 있고 싶다.
그리고 나는 단식을 하다 죽고 싶다.
죽음이 다가오면 음식을 끊고
할 수 있으면 마찬가지로 마시는 것도 끊기를 바란다.
나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그러므로 어떤 진통제나 마취제도 필요없다.
나는 되도록 빠르고 조용히 가고 싶다.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으니
오히려 자리를 함께 한 사람들은 마음과 행동에
조용함과 위엄, 이해와 평화로움을 갖춰
죽음의 경험을 함께 나눠 주기 바란다.
죽음은 무한한 경험의 세계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
삶의 다른 일들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법이 요구하지 않는 한,
어떤 장의업자나 그밖에 직업으로 시체를 다루는 사람이
이 일에 끼여들어선 안 된다.
내가 죽은 뒤 되도록 빨리 친구들이
내 몸에 작업복을 입혀 침낭 속에 넣은 다음
평범한 나무 상자에 뉘기를 바란다.
상자 안이나 위에 어떤 장식도 치장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옷을 입힌 몸은
화장터로 보내어 조용히 화장되기를 바란다.
어떤 장례식도 열려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든
언제 어떤 식으로든
설교사나 목사, 그밖의 직업 종교인이 주관해서는 안 된다.
화장이 끝난 뒤 되도록 빨리 나의 아내가,
만일 아내가 나보다 먼저 가거나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누군가 다른 친구가 재를 거두어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나무 아래 뿌려 주기 바란다.
나는 맑은 의식으로 이 모든 요청을 하는 바이며,
이런 요청이 내 뒤에 계속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존중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