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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의 중명전

鄭宇東 0 1439
덕수궁의 중명전

국립 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명화를 만나는 작가 57인의 한국근현대회화 100선을 관람하였습니다.
오랫만에 전시회에 가서 오디오해설기로 작품을 감상하는 귀한 첫 체험을
하였습니다. 이제 외국의 미술관에 가서라도 이러한 문명의 이기를 통하여
걱정없이 즐거운 미술감상이 가능하리라 여겨집니다.

관람을 끝내고는 덕수궁에서 떨어져 인근 정동에 있는 대한제국의 운명이
갈라진 곳인 중명전(重 眀殿)을 찾았습니다. 러시아인 사바찐의 설계로 궁
궐 내에 남아 있는 최초의 근대 건축물로 洋式 2층 붉은 벽돌집입니다.
덕수궁의 별채로 정동여학당 자리에 1901년 황실도서관으로 지어졌습니다.
1904년 덕수궁이 불타자 고종의 집무실인 편전이자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
용되었습니다. 처음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며, 후에 1905년 을사조약(乙
巳條約)이 체결되었던 비운(悲運)의 한많은 장소입니다.

1905년 11월 18일 새벽,
중명전에서 치욕적인 을사늑약이 강제됩니다.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중
명전을 침범하고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을사늑약 이후 주권회복을 위한 대한제국의 민족적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고종은 기존의 수교국들의 원수들에게 친서를 보내어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을 알렸습니다. 민영환등 우국지사들이 자결로서 항거했습니다.
전국에서 의병들이 조직되고 최익현 등 각지의 많은 유생들이 의병운동을
일으켰습니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등 언론이 조약의 부당성을 알리며
항일여론을 고조시켰습니다.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은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 3사람의 특사를 보내어 을사조약이 강제로
이루어졌음을 알리려고 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백방으로 대한정부
의 입장을 알리는 등 외교적 노력을 펼쳤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인 헐버
트는 외국인의 신분을 이용하여 각종 비밀외교 문서의 전파에 공이 많았고
특히 그의 대한사랑과 한글연구는 감동스런 일입니다.

1904년 4월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일어난 대화재는 고종과 중명전이 인연 
을 맺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함녕전에서 발생한 불길이 경운궁의 주요 전각
을 태워버리자 고종은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후 1907년 아들
순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겨 줄 때까지 약 3년 반 동안 고종은 주로 중명전
에서 국사를 처리하였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헐버트 박사의 공로를 좀 더 상론하면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년)는
미국의 감리교회 선교사이자, 育英公院에 교사로 근무하여 영어를 가르쳤
교육인으로 한국의 항일운동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그의 한국어 이름은
헐벗 또는 흘법(訖法), 할보(轄甫)이었습니다.
그는 고종 황제의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등 서방국가
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습니다. 고종 황제로부터 두터운 신
임을 얻은 외국인이었고, 한국의 분리독립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하였으며,
1907년 헤이그 비밀밀사에 적극 지원하여 밀사활동을 하였습니다.
1919년 3.1운동을 지지했다. 그는 영어뿐만 아니라 한국어도 매우 유창하
하였으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대한제국 시대에 언론인으로 활동했던
영국인 베델과 더불어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혔습니다.

헐버트 박사는 1890년 ‘사민필지’ 서문에서 당시 조선의 현실을 이렇게 개
탄했습니다. “중국 글자로는 모든 사람이 빨리 알 수도 없고 널리 볼 수도
없는데 조선 언문은 본국의 글일 뿐더러 선비와 백성과 남녀가 널리 보고
알기 쉽습니다. 슬프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하여 크게 요긴하건만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알지 못하고 업신여기니 어찌 안타깝지 아니하리오."
수세기 동안 내려오던 조선의 반 한글문화를 제3자의 입장에서 통렬하게
비판한 것입니다 . 헐버트 박사는 또한 1892년 발표 한 ‘The Korean Alpha
bet II (한글 II)’라는 논문에서 “문자사에서 한글보 다 더 간단하게, 더 과학
적으로 발명된 문자는 없다”라고 쓸 만큼 한글의 실용성과 우수성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 후 1894년 국문 칙령과 1896년 독립신문이 나오는 데는
헐버트 박사의 이러한 한글 예찬론이 큰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의 제자
인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에 가로쓰기, 띄어쓰기와 점찍기 등을 도입하고
한글 자강운동을 이끈 헐버트 박사의 노력은 우리가 깊이 되새기고 감사해
야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시가 한글마루지사업의 일환으로 주시경
선생과 헐버트 박사의 기념공간을 건립하기로 한 것은 참 기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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