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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명문족과 왕족 2

鄭宇東 0 1722
세계의 명문족과 왕족 2
재능 있는 사람은 쌔고 쌨지만, 부자도 흔코 흔하지만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발명하여 인류에게 편리를 제공하고
자기의 부를 쾌척하여 사회를 위하여 문화시설과 복지시설을 마련하고
특별한 자신의 이상과 포부를 실현하여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세계의 명문 중 부호들을 살펴봅니다.

* 알프레드 노벨家
스웨덴의 발명가 화약왕 노벨(1833~1896)은 안전하고 위력 좋은 고체화
약 다이너머이트를 발명하여 인류에게 큰 혜택을 주었지만 또 한편으로
인명을 살상하는 무기로 쓰이는 것을 보고 이를 보상하기 위하여 전재산을
쾌척하여 노벨상을 제정하였습니다. 다이너마이트 발명 이후 세계 각국이
노벨에게 특허료를 지불하였고, 카스피해 서안의 유전개발이 성공하면서
노벨 가문은 유럽 최대의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노벨은 평화주의자로서 전쟁의 종식을 기원하였습니다.
노벨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유언으로 자신의 재산을 스웨덴 과학아카
데미에 기부하여 노벨상을 제정하였습니다. 노벨상은 1901년부터 평화,
문학, 물리, 화학, 생리의학상이 수여되고 있으며, 중간에 경제학상이 추가
되었습니다. 큰 금액의 부상과 함께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권위와 명예를
인정받는 상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 헨리 포드家
자동차의 제왕으로 알려진 그는 모자리는 지력은 빌리면 된다는 철학으로
자동차왕국을 건설하였습니다. 생산라인에 콘베이어 시스템을 도입하고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어 싼 자동차를 만들어 미국에 자동차시대를 열었습
니다. 그는 노동자의 복지에도 관심을 쏟아 세계최초로, 하루 최저 임금 5
달러, 하루에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였습니다.
그의 아들이 호화생활을 하고 있다고 주변에서 입방아를 찧자 아들을 변호
하여 그는 백만장자 아버지를 가졌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부자 아버지가 없
다고 하였답니다. 돈을 버는 사람과 쓰는 사람은 다르고 각자는 제분복대로
산다는 말입니다.

* 카네기家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는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수직공의 아들로 태어나 미국
펜실바니아로 이민해 와서 여러 직종을 전전하다가 철도회사에 다닐때 침대
차회사에 투자하여 큰 돈을 벌어 나중에는 미국제일의 철강기업 U.S스틸을
세운 뒤 기업경영에서 손을 떼고 교육과 문화사업을 하였습니다. 먼저 카네
기 공과대학을 세웠고 그리고 뉴욕에는 그의 이름을 딴 모든 예술가들이 그
무대에 등단하기를 선망하는 공연장인 카네기 홀을 건립하였습니다.

* 로스차일드 가문
로스차일드 가문의 역사는 1700년대 후반 독일 프랑크푸르트 빈민가에서 시
작합니다. 이곳에서 골동품 중개인으로 큰 성공을 거둔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
드는 은행업으로 영역을 넓힙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장 부유한 유대인이 된 암셸은 아들 5명을 프랑크푸르트,
런던, 빈, 나폴리, 파리로 보내 각각 금융기업을 만들게 합니다. 다섯 나라에서
뿌리내린 로스차일드 형제들은 각국 정부 재정을 좌우하고 국제 채권 시장을
장악하며 부를 키워갔습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워털루 전투로 상당한 부를
쌓으며 발전해 나갔습니다. 가문에서는 전쟁이 발발할때 산업 스파이를 보내
어 프랑크푸르트-파리-런던-빈-나폴리로 이어지는 정보망을 구축했습니다.

그들은 정부의 정보 즉 워털루 전투가 영국군이 이겼다는 정보보다 1일이나
앞선 날에 사람들을 향해 영국군이 졌다하며 소리쳐 정보(거짓 정보)를 알
려주었고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덜 손해보기 위해 영국 국채를 팔기 시작해
영국국채가 이전의 5%밖에 안되는 상황이였을때, 로스차일드 가문은 그 즉
시 모든 국채를 사들였고 그 다음날 영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프랑스군이 패
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로스차일드 가문은 20배나 되는 이득을 챙겼습니다.
(또한 살로몬 드 로스차일드는 미국남북전쟁때 군수물자를 지원하면서 엄청
난 돈을 벌었습니다.)

이들 4아들은 유럽전역에 은행을 설립 로스차일드 은행사업은 유럽의 산업
화 동안 국제적 융자로 높이 발전했고 세계 전역을 걸쳐 철도사업을 후원할
때 철도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리고 수에즈 운하 계획을 지지하여 공장
에 자금조달을 해주었습니다. 대다수의 사업은 직접적으로 로스차일드 가문
의 해상보험을 포함한 자본으로 이루어집니다.(1824년)

* 록 펠러 가문
미국 사회의 전설적인 가문인 록펠러가의 시조인 존 데이비슨 록펠러는
켈리포니아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이주민들이 몰려들던 서부 시대의 개막
10년 전인 1839년 7월 8일 뉴욕 북부 리치포드에서 평범한 집안에서 태
어났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석탄에 의존하던 에너지원이 석유로 바뀔 것
을 예견하고 석유회사를 세워 석유재벌로 재산이 많기로 세계제일입니다.
그러나 졸부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개인적인 소비에
는 근검 절약을 모토로 하였으나 명문 시카고 대학을 세우는데 4억1천만
달러를 기부하고, 세계최대의 공익재단인 록펠러재단을 세우는등 기부와
자선으로 점철된 수 많은 선행을 행했습니다.

* 괴테 가문
괴테의 할아버지 프리드리히는 꼭 성공하기 위하여 시골에서 프랑크푸르트
로 왔습니다. 대식당에서 부자 여주인을 만나서 결혼하여 큰 부를 얻고 이후
호텔업 등으로 더 큰 부자가 되어 아들 카스파르는 법관이 되고 또 대대로
법률가문인 시장의 딸과 결혼시켜 또 한번의 신분상승을 이룩합니다. 손자
괴테는 이러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열성적인 교육열은로 그의 공부방에는
높이가 다른 앉아서도, 서서도, 누워서도 책을 읽을 수 있게 세 종류의 책상
을 마련해 줄 정도였습니다. 특히 명문가의 어머니의 창조적인 교육방침에
따라서 이야기의 결말을 빼고 스스로 끝을 맺게 하여 상상력과 창발력을
무한히 키워 준것이 그의 위대한 문학의 바탕이 되고 자산이 되었습니다.
괴테도 아들 아우구스트의 교육에 힘 썼으나 그의 후에 대가 끊어져 괴테
가문의 좋은 교육전통을 이어가지 못해 아쉽습니다.

* 빅토르 위고 가문
빅토르 마리 위고는 1802년 2월 26일 브장송에서 태어났습니다.
나폴레옹의 휘하에서 군인으로 출세가도를 달려 장군까지 진급한 아버지를
따라 어린 시절부터 프랑스와 이탈리아와 에스파냐의 여러 도시로 이사를
다녔습니다. 훗날 부친의 바람대로 대학에 진학해서 법학을 공부하면서도,
빅토르는 시작에 몰두하며 문학에 대한 꿈을 키워 나가고 있었습니다.

위고는 1822년 소꿉친구인 아델 푸셰와 결혼하였는데 위고의 주위에는 많
은 여인들이 있어서 가정이 화목하지 못하였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웠
던 애인은 레 미제라블의 원고를 정서하고 망명지까지 따라가는 등 그를 물
심양면으로 지원한 쥘리에트였습니다. 위고의 걸작품에는 이외에도<파리
의 노트르담, 희곡 크롬웰, 93년>등의 작품과 그의 시에다 여러 작곡가들이
곡을 붙인 오페라 작품이 다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작가가 아닌 인간 빅토르 위고는 어땠을까? 주위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위고는 강력한 휴머니즘의 소유자인 동시에 강력한 에고이즘의 소유
자로서 이중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특히 정치적으로는 카멜레온에
가까운 변신으로 주위 사람들을 계속해서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젊은 시절
에는 열혈 왕당파로 행세하며 왕실과의 친분을 자랑했지만, 여러 차례의 변
모 끝에 결국에는 열혈 공화파가 되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지조 없는 행동
처럼 보이지만, 휴머니즘이 위고의 최우선 신조였음을 기억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입니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 때문에라도 위고는 왕당파
나 공화파나 극좌파에 전적으로 동조할 수는 없었고 종종 상황에 따라 자신
의 입장을 바꿀 수 있었던 것입니다.

1885년 5월 18일에 위고는 폐렴으로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리고 22일에
파리에서 사망했습니다. 6월 1일에 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졌고, 200만명
의 인파가 뒤를 따르는 가운데 그의 유해는 팡테옹에 안장되었습니다.
생전의 위고는 자손들에게 그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의
큰 아들 샤를 위고만하여도 사진예술가 되어 그 방면에서는 유명인이 되고
위고의 활동 현장의 역사적 기록사진을 자료로 많이 남겼습니다.

* 마쯔시다 가문
기업경영의 神으로 불리는 일본의 마쓰시다 전기(松下電氣) 창업자
마쓰시다 고오노스케(松下幸之助)는 1894년 와까야마현에서 태어나서
전기 단일품목만으로 570개의 계열회사와 13만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세계
에서 최고인 가전왕국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그는 21세기 일본을 떠 맡고 이상을 실현할 정치가와 경영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1980년에 마쓰시다 정경숙(政經塾)을 설립하였습니다. 이 정경숙
에서는 엄선된 22세∼35세의 젊은이들이 5년간 수업료 없이 생활비와 연구
활동비까지 지원받으면서 정치와 경제를 현장중심으로 공부합니다. 이렇게
해서 마쯔시다는 일본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유일한 가문
유일한(柳一韓, 1895. 1. 15~1971. 3. 11)선생은 1894년 12월 13일
유기연과 김씨 사이의 9남매 중 장남으로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선생의 부친은 10살의 어린나이에 아들을 미국에 유학 보내어 미래의 역군
을 기대하였습니다. 미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한인군사학교에 소년병으로
교육을 받고, 헤스팅스 고등학교를 거쳐 미시간 주립대학을 졸업했습니다.

1922년 대학 동창과 동업으로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라초이식품회사
(La Choy Food Product Inc)를 설립하였습니다. 이를 운영하여 어느 정도의
사업자금이 마련되자 선생은 곧 귀국을 서둘렀습니다. 그리하여 선생은 미국
의 사업체와 재산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1926년 12월 유한양행(柳韓洋行)을
설립, 경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당초 민족의 실력양성과 경제적 자립
을 염두에 두고 자신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던 부친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것
이었고, 동시에 선생이 품고 있던 민족적 대업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
였습니다. 그리고 유한양행의 사업을 다각화하여 의약품 생산과 함께 위생용
품, 농기구, 염료 등을 수입하여 민중의 건강과 생활 향상에 진력하고, 우리
나라의 특산품인 화문석, 도자기, 죽제품 등을 미국에 수출하여 민족자본 형
성에 기여하였습니다.

광복 이후 선생은 1946년 7월 미국에서 귀국한 뒤 유한양행을 재정비하여
사장과 회장, 그리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족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아울러 1952년 고려공과기술학교, 1964년
유한공업고등학교 등을 설립 운영하고, 개인 소유주식을 각종 장학기금으로
출연하는 등 자본의 사회 환원에도 힘썼습니다. 특히 1969년 기업의 제일선
에서 은퇴하면서 혈연관계가 없는 전문경영인에게 경영권을 인계함으로써
전문경영인 시대의 서막을 열었는데, 이는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종업원 지
주제를 실천했던 사실과 더불어 기업경영사의 미덕으로 남을 것입니다
 
* 전형필 가문
정선 전씨 간송 전형필의 가문은 일찌기 큰 벼슬을 한 조상은 없었지만 
전계훈이 무과에 급제하여 한양에서 장사하는 허가권을 발판으로 10만석을
거두는 큰 부를 이룩하였습니다. 이때 한양 일원을 벗어나 멀리 충청도 강원
도 황해도 전라도 등지의 땅까지 소유하게 되는데 이 사람이 간송의 증조부
입니다. 집안의 후손들이 단명하여 간송은 10만석꾼의 재산을 고작 10대 후
반에 고스란히 상속으로 물려 받았습니다.
간송은 휘문에서 고희동 선생을 만나 인생의 멘토로 섬겼고 언론인 오세창에
사사하면서 우리 미술품에 대한 안목을 키워 그 많은 재산을 다 들여 우리 미
술품을 수집하고 소장하는 데에 한 평생을 다 바쳤습니다.

간송미술관은 처음에 보화각으로 출발하여 국보급의 문화재만도 10여 점이
소장되어 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훈민정음=원본 (국보 70호)이 손꼽히
며 고려청자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68호)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외
국보급 문화재로 조선백자, 불교 유물로 금동불상 등 다양합니다. 특히 국내
최고의 서화를 다수 소장하고 있는데 미술품으로는 신윤복의 <미인도>와
풍속화 그리고 김홍도의 <마상청앵(馬上聽鶯)>, 겸재 정선의 <풍악산내총
람><청풍계><독백탄> 등이 유명한 소장품입니다.
또한 정조, 안평대군, 한석봉, 추사의 글씨가 여러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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