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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없는 비석들

鄭宇東 0 3010
우리나라의 글자 없는 비석들

비석 [碑石]이란
고인(故人)의 사적(事蹟)을 칭송하고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문장을 새겨 넣은 돌로서 비(碑)·빗돌·석비(石碑) 등 여러 말이 있
으며, 거기에 새겨 넣은 글은 금석문(金石文)이라 하여 귀중한 사
료(史料)가 됩니다.

비석의 시초는
옛날 중국에서 묘문(廟門) 안에 세워 제례(祭禮) 때 희생으로 바칠
동물을 매어두던 돌말뚝에서 비롯되었다 하며, 또 장례식 때 귀인
(貴人)의 관을 매달아 광내(壙內)에 공손히 내려 놓기 위하여 묘광
(墓壙) 사방에 세우던 돌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 돌을 다듬고 비면
(碑面)에 공덕을 기입하여 묘소에 세우게 된 것은 훨씬 후세의 일
이며, 당시는 비석이라 하지 않고 각석(刻石)이라 하다가 이것을
비석으로 부르게 된 것은 전한(前漢) 말기나 후한 초의 일입니다.

진대(秦代) 이전의 각석으로는 우(禹)나라가 치수공사(治水工事)
때 세웠다고 하는 구루비(岣嶁碑:河南省 衡山),주(周)나라 목왕
(穆王)이 "길일계사(吉日癸巳)"의 4자를 새긴 단산각석(壇山刻石)
등이 있으나 진위(眞僞)는 확실치 않습니다. 진나라 때는 시황(始
皇)이 세운 추역산(鄒忌山)·태산(泰山)의 각석 등이있고, 漢나라
이후에는 儒書나 佛經을 돌에 새긴 석경(石經)도 유행하였습니다.
한문 문화권에서 가장 일찍이 글자 없는 비석이 세워진 것은,
중국 태산(泰山)의 옥황봉에 있는 사당 앞에 6m 높이의 크나 큰
비석에 글자 한자 없는데, 진나라 시황제가 세웠다고 전해온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이 비석에 대하여 학자마다 다른 주장을 하
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석이라는 이름의 연원을 살펴본다면,
비석에는 본래 글자가 없었습니다. 궁실에 해시계 역할을 하는
돌기둥을 비(碑)라고 한 것이라던가, 제사에 쓸 희생을 메단
돌기둥이나, 광중에 끈을 매달아 관을 내리기 위하여 묘의 사방
에 세운 풍비(豊碑) 등에는 본래 글자가 없었는데, 척경순수비,
기념비, 추모비 등을 세우면서 비석에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하
였습니다.

돌을 다듬어서 글자를 새기기 시작한 것은 중국 대륙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 최초의 것을 들추어본다면, 서정의 시사(詩
詞)를 새긴 石鼓文과 전국시대에 진나라 혜문왕이 초나라 군사
를 저주하는 詛楚文등을 들 수가 있는데, 이것을 오늘에 있어서
광의적 의미로 비석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는 있으나,
진(秦)의 시황제가 대륙통일을 마치고 여러 곳을 다니면서 각석
하여 순수비를 세운 것이 비로소 오늘날의 비석의 개념과 가깝
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서력 기원전의 일이고, 서력 기원후
후한시대에 채옹(蔡邕)과 같은 글씨 잘 쓰는 명필가가 나타나면
서 돌 위에 유교경전이 새겨지고, 아울러서 기념비와 추모비가
여러 곳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비석에 글자를 새기지 않는 이유는,
세상을 통치하던 제왕일 경우에는 그 절대적인 권위를 몇 마디
글자로 작은 빗돌에 다 새길 수가 없다는 것이고,
청백리나 충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그 많은 공적과 충성됨
을 몇 마디 문구로 작은 빗돌 위에 새기기 부족하다는 이유로,
또는 도가(道家)적인 차원에서, 무한무궁 사상에 입각하여 유한
인생이나 무한한 내용을 몇 마디 수식어를 사용하여 기록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인 반면, 공을 크게 이루었으나(功業隆重), 덕
을 더럽히고 패륜을 자행(穢德悖行)하여 세상사람들의 지탄을
받을 경우에 비석에 차마 글자를 새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글자 없는 비석에 대한 호칭은
일찍 중국에서 있었던 사실로 글자 그대로 무자비(無字碑), 혹
은 몰자비(沒字碑)로 불리어 왔으나,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우리나라에서는, 국어 대사전에도 없는 백비(白碑)로 호칭되어
오고 있습니다. 언어란 조성되는 것이므로 이미 조성된 문화전
통에 따라 여기에서도 백비라는 어휘를 그대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비석의 원석재료가 대부분 흰바탕에 검은 적이 찍힌 화
강암이입니다만 특히 검은 烏石일때 白碑라기보다는 무자비나
몰자비로 부르는 것이 온당할 듯 싶습니다.

이제 여기서 아래에다
우리나라에 있는 유명한 백비들을 소개합니다.

* 청백리 박수량의 묘전 백비
우리 역사를 통하여, 당사자의 유언이나 전설이 아닌, 뚜렷한 이
유에서의 백비는 박수량(朴守良1491-1554)의 묘전 백비입니다.
본은 태인(泰仁), 호는 아곡(莪谷), 시호는 정혜공(貞惠公)입니다. 
박수량은 25세에 등과하여, 39년간을 관직에 있으면서 오직 나
라에 충성하고 백성앞에 공복(公僕)의 역활을 다 했을뿐, 명예와
재물에는 욕심없이 살았던 청백리의 표상이 되는 인물입니다.
명종은 박수량이 너무나 청백하다는 소리를 듣고, 암행어사를
보내 알아보았더니, 생계를 겨우 연명할 정도에, 집은 낡아서 비
만 오면 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명종 1년(1546), 청백리에 뽑힌 인물입니다. 그는 함경도
관찰사, 호조, 예조의 참판, 담양부사, 전라도 관찰사, 한성판윤,
형조판서, 의정부 우참찬등의 관직을 거치다가, 명종 9년(1554)
1월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반장(反葬 -고향 떠나 죽은
사람의 시신을 운구하여 고향에 장사를 지냄)비용이 없던 차에,
대사헌 윤춘년이 왕에게 아뢰어, 명종께서는 예장 비용은 물론,
서해(西海)에서 나오는 대리석의 비석을 하사하시면서 "청백함
을 알면서 비석에 글을 새긴다면, 이름에 누가 될지 모르니 이름
도 벼슬도 새기지 말고 글자 없이 세우도록 하라" 하셨다고 상전
(相傳)되어 오고 있습니다. 또한 명종은 박수량의 청백함에 감동
하여 아흔 아홉 칸의 집을 하사하며, 청백당(淸白堂)이라 재호(齋
號)를 내렸으나, 정유재란 때 소실되고 이 백비만 남아 있습니다.
청백당의 집터는 홍길동이 태어났다고 하는 아치실의 초등학교
자리라고 전하여 옵니다.

* 감악산 몰자비
감악산(675m)은 경기 오악의 수산(水山)이며, 파주, 연천, 양주
3개 군의 경계에 위치한 영산(靈山)입니다. 이 산의 정상에는
두개의 봉우리가 남과 북으로 솟아 있는데, 남쪽에 솟은 봉오리
를 ‘임꺽정봉’이라 하고, 북쪽에 솟은 봉을 ‘설인귀봉’이라 하는
데 이 감악산 몰자비는 ‘설인귀봉’의 정상에 우뚝 서 있으며,
몰자비, 무자비, 설인귀비, 밧돌대왕비 등으로 호칭되어 오는데,
이 비석에는 글자 한자를 찾아 볼 수가 없는 삼국시대의 비석으
로 추정됩니다. 본래에는 글자가 있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백비였는지 조차도 분간하기 어려워서, 이 비석을 만져보는 사람
마다 서로 다른 결정을 내리고 마는 것은 빗돌이 풍상에 마모되어
분간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 진천 연백리 백비(白碑)
진천읍 연곡리 백비(白碑)의 정식 명칭은 "진천읍 연곡리 석비"
입니다. 문화유적대장의 기록에 의하면, "거북받침(龜趺) 위에
비몸(碑身)을 새우고 ,비머리(碑首)를 얹은 일반형 석비로, 비문
이 없어 일명 백비(白碑)라고 불려 더욱 유명한 비석입니다.
 
* 고려말 충신 이오(李午)의 백비(白碑)
고려 공민왕이 외증조부(外曾祖父)였던 이오(李午)는 일찍이 성균
관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시국이 수상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자,
포은 정몽주가 벼슬길에 나오라고 하였으나 사양하고, 도리어 포은
과 목은을 찾아다니면서, 경학(經學)과 의리의 학문에만 독실하니,
당시의 학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호는 모은(茅隱)이고 참
의(參議)는 증직입니다.

* 효자 이온의 백비
고려 말기에 이성계가 영남일대를 순시하던 차, 이온의 효성스러
운 행동에 대한 내용을 듣고 상주하자, 우왕 9년(1383)에 고성군
수 최복린에게 하명하여, 이온에 대한 쌍비 즉 효행비와 백비를
세우고 비각을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 신도비가 되어버린 청백리 백비
영의정 최항(崔恒)의 증손 최흥원(崔興源 1529-1603)은 임진왜란
초기에 영의정을 역임한 청백리로서 삭령 최씨 집안을 빛낸 인물
입니다. 율곡 이이는 그의 인물됨을 잘 아는지라, 1583년에 황해도
에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이가 속출하고 있을 때에, 선조에게 천거
함으로써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굶주리는 백성들을 성공리에
구제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승지 이항복과 함께 선조
대왕을 피신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우의정, 좌의정
을 거처 영의정을 지내면서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공과 사를 분명
하게 하여 민폐를 없애고, 일체의 부정부패에 관여하지 않았음은
물론,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 관복 이외에는 비단옷을 입지도 않
았습니다. 심지어는 충훈부에서 공신들에게 그려주는 초상화도 거
절하여 청빈함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 함평 장산들 백비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계천리 장산들 논두렁에 백비가 서 있었는
데, 1987년 5월, 농지 구획정리를 하면서 포크레인이 들어 옮기려
하자 비석은 끄덕하지 않고, 포크레인 날만 부러졌습니다. 영험있는
비석을 건드렸다 하여 인근 사람들이 모여 정성스럽게 제물을 차려
올린 다음 150여 미터 아래 사동(沙洞)마을 입구로 옮겨 새운 고려
시대 유형의 비석입니다.

* 문경 새재의 마애 삼백비(三白碑)
문경 새재에 있는, 미완성의 목민관 선정비로 추정되는 마애 삼백
비(三白碑)를, 문경시 문화원에서는 익살스럽게도 이것을 "멍텅구
리 마애비"라 불러오고 있습니다. 위치는 새재 옛길 제 2 관문 윗편
휴게소 아랫쪽 큰 바위에 조선 후기의 유형으로 된 세 개의 비석 모
양만 그려져 있고 글자는 없는 모습이 있습니다. 큰 바위 아랫쪽에
비석의 윤곽을 뚜렷하게 새긴 세 개의 비몸에는 글자가 새겨지지
않아서 언제, 누가, 왜, 어떤 사유로 글자 없이 그대로 두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지역을 다스리던 목민관이 진정으로 선정을 베풀
어 주변에서 그 공을 기리려 하였으나, 스스로 거절하여 백비로 남아
있는지, 아니면 탐관오리에 대한 거짓 송덕비를 새기려다가, 그 탐관
오리가 떠나버리자 중단하여 버렸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 풍기 읍사무소의 백비
풍기 읍사무소의 뜰에는 15좌의 비석이 서 있습니다. 그 대부분이 이
지역을 다스리던 벼슬아치들의 기념비로, 그 유형을 분류하여 보면,
풍기군수를 역임한 주세붕 선정비를 비롯하여 선정비가 넷, 영세불망
비가 일곱, 청덕비가 하나, 거사비(去思碑)가 하나, 풍기읍 승격기념비
가 하나, 그리고는 백비 하나가 서 있습니다. 이 백비는 석질(石質)이
나빠서 빠른 시일 내에 풍화작용으로 글자가 마모된 것으로 추정된다
는 풍기읍사무소 측의 말이 옳은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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