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선생의 별호 완당
鄭宇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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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9
2015.09.06 02:26
金正喜선생의 아호 阮堂
일찍부터 사계의 일각에서는
"세상에는 秋史를 (건성이나마)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자세
히 정당하게) 아는 사람도 없다"는 말이 회자하고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는1786년(정조 10) 6월 3일 충청도 예산 용궁리
경주 김씨 월성위 집안의 향저에서 태어 났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스승 박제가로부터 연경의 학예에 대하여
많이 듣고 연경에의 동경에 동경을 더하다가
동지부사로 사신을 가는 아버지를 따라 子弟軍官 자격으로
중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1809년 10월, 추사 나
이 24세, 아버지 유당 김노경은 44세때의 일입니다.
오가는 6개월간의 여행중 약 60일간 연경에 체재하였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연경에 도착하여 유리창 서점가에 살다
시피하며, 학예인 조강을 처음 만나 그를 통해 서송등 북경의
여러 학자를 만나게 되고 추사는 이 서송을 통하여 또 연경에
서 평생 가슴에서 떠나지 않은 두분의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옹담계와 완운대 두 스승입니다.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 1733~1818)으로부터는
보담재(寶覃齋) 라는 아호를 얻고
운대(芸臺) 완원(阮元, 1764~!1849)으로부터는
완당(阮堂)이라는 아호를 얻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김정희를 추사라고 부르는 것보다 완당이라
고 부르는 것이 그의 행적에 더 어울립니다.
실제로 김정희는 중년에 들어서면 추사라는 낙관은 거의
쓰지 않고 주로 완당이라고 했습니다.
담계는 청나라 화가 야운 주학년에게 구양수와 황정견과
그리고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추사에게 보내 주었
는데 특히 황정견의 초상화에는 황정견 자신의 자찬(문)
까지 자기가 직접 써서 보내주며 사제의 의를 다졌습니다.
그뜻이 내가 도달하고 싶은 또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다음과 같은 문구입니다.
사승유발(似僧有髮) => 스님을 닮았는데 수염이 있고
사속무진(似俗無塵) => 세속인을 닮았는데 티끌이 없고
작몽중몽(作夢中夢) => 꿈속에서도 이상향의 꿈을 꾸니
견신외신(見身外身) => 육신 밖에서 법신을 보나브다.
서예가 황정견의 인품과 그가 품은 이상을 담고 있습니다.
옹방강은 그의 두 아들이 수배와 수곤이 젊은 나이에 연
이어 세상을 떠나는 불운을 당하자 자식에게 못다한 정을
완당에게 내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완당에 대한 애정이
지극했습니다.
또 한 사람의 스승 완원은
본래 강남 항주에 있었는데 추사가 연경에서 완원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중의 행운이었습니다. 그는 청조문화를
완성하고 선양함에 절대적 공로자이자 당시 제1인자라는
평을 받은 대학자였기 때문입니다.
추사가 완원을 찾아 갔을때 대번에 그가 비범한 인물임을 알
아보고 반가워서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왔다고 합니다.
완원은 추사에게 물경 245권으로 된 <13경주소교감기> 1질
을 기증하였고 훗날 또 <황청경해>가 완성되자 추사에게
보내니 추사는 그저 감격할 따름이었습니다. 실사구시와 평
실정상의 자세로 학문을 닦고 경전을 연마하라는 완원의 가
르침은 진실로 간곡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완원의 뛰어
난 이론은 추사의 머리와 가슴속에 간직되었습니다.
이리 저리하여 완원은 마침내 추사에게 阮堂이라는 호를 내
려 사제의 인증을 확실히 하였는데 30대로 들어서면 김정희
선생의 아호는 서화 예술계를 대표하는 추사보다도 오늘날
에 와서는 그의 삶과 행적과 높은 학문에 더 잘 어울리는
완당(阮堂)으로 널리 불리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사계의 일각에서는
"세상에는 秋史를 (건성이나마)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자세
히 정당하게) 아는 사람도 없다"는 말이 회자하고 있습니다.
추사 김정희는1786년(정조 10) 6월 3일 충청도 예산 용궁리
경주 김씨 월성위 집안의 향저에서 태어 났습니다.
추사 김정희는 스승 박제가로부터 연경의 학예에 대하여
많이 듣고 연경에의 동경에 동경을 더하다가
동지부사로 사신을 가는 아버지를 따라 子弟軍官 자격으로
중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1809년 10월, 추사 나
이 24세, 아버지 유당 김노경은 44세때의 일입니다.
오가는 6개월간의 여행중 약 60일간 연경에 체재하였습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연경에 도착하여 유리창 서점가에 살다
시피하며, 학예인 조강을 처음 만나 그를 통해 서송등 북경의
여러 학자를 만나게 되고 추사는 이 서송을 통하여 또 연경에
서 평생 가슴에서 떠나지 않은 두분의 스승을 만나게 됩니다.
옹담계와 완운대 두 스승입니다.
담계(覃溪) 옹방강(翁方綱, 1733~1818)으로부터는
보담재(寶覃齋) 라는 아호를 얻고
운대(芸臺) 완원(阮元, 1764~!1849)으로부터는
완당(阮堂)이라는 아호를 얻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김정희를 추사라고 부르는 것보다 완당이라
고 부르는 것이 그의 행적에 더 어울립니다.
실제로 김정희는 중년에 들어서면 추사라는 낙관은 거의
쓰지 않고 주로 완당이라고 했습니다.
담계는 청나라 화가 야운 주학년에게 구양수와 황정견과
그리고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추사에게 보내 주었
는데 특히 황정견의 초상화에는 황정견 자신의 자찬(문)
까지 자기가 직접 써서 보내주며 사제의 의를 다졌습니다.
그뜻이 내가 도달하고 싶은 또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다음과 같은 문구입니다.
사승유발(似僧有髮) => 스님을 닮았는데 수염이 있고
사속무진(似俗無塵) => 세속인을 닮았는데 티끌이 없고
작몽중몽(作夢中夢) => 꿈속에서도 이상향의 꿈을 꾸니
견신외신(見身外身) => 육신 밖에서 법신을 보나브다.
서예가 황정견의 인품과 그가 품은 이상을 담고 있습니다.
옹방강은 그의 두 아들이 수배와 수곤이 젊은 나이에 연
이어 세상을 떠나는 불운을 당하자 자식에게 못다한 정을
완당에게 내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완당에 대한 애정이
지극했습니다.
또 한 사람의 스승 완원은
본래 강남 항주에 있었는데 추사가 연경에서 완원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중의 행운이었습니다. 그는 청조문화를
완성하고 선양함에 절대적 공로자이자 당시 제1인자라는
평을 받은 대학자였기 때문입니다.
추사가 완원을 찾아 갔을때 대번에 그가 비범한 인물임을 알
아보고 반가워서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왔다고 합니다.
완원은 추사에게 물경 245권으로 된 <13경주소교감기> 1질
을 기증하였고 훗날 또 <황청경해>가 완성되자 추사에게
보내니 추사는 그저 감격할 따름이었습니다. 실사구시와 평
실정상의 자세로 학문을 닦고 경전을 연마하라는 완원의 가
르침은 진실로 간곡한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완원의 뛰어
난 이론은 추사의 머리와 가슴속에 간직되었습니다.
이리 저리하여 완원은 마침내 추사에게 阮堂이라는 호를 내
려 사제의 인증을 확실히 하였는데 30대로 들어서면 김정희
선생의 아호는 서화 예술계를 대표하는 추사보다도 오늘날
에 와서는 그의 삶과 행적과 높은 학문에 더 잘 어울리는
완당(阮堂)으로 널리 불리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