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훈선생의 음악세계
鄭宇東
0
1890
2014.10.01 05:42
변훈선생의 음악세계
내가 이 글을 변훈선생의 작곡세계라 하지 않음은
그의 음악세계가 깊이와 폭에서 무한공간으로 날으는 큰 비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가곡은 우리 가곡사에서 우뚝한
거봉의 하나임을 새삼 깨닫기 때문입니다.
변훈(邊焄, 1926.5.23~2000.8.29)선생은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부친의 반대로 음악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1954년 연희전문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대학 재학 중인 1953년 외교관 공채시험에 합격한 후 미국 샌프
란시스코 총영사관, 타이완, 브라질, 파키스탄 총영사를 지냈으며,
1981년 포르투갈 대리대사를 마지막으로 퇴임하였습니다.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대학 재학 중 그는 서울대 정종길교수에게
서 작곡을 배우고 바리톤 최봉진에게서 성악을 배웠습니다. 결국
그는 4년동안 외교관 수업과 음악가 수업을 병행하였던 것입니다.
47년 재학시에 첫 작품으로 소월의 <금잔디>를 시작으로, 48년
에 <무서운 시간>, 51년 <낙동강>, 52년 6·25전쟁중 피난지인
대구에서 우리에게 친숙하고 많이 알려진 <명태>를 작곡하였습
니다.
미8군 통역관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감상실인 대구의
‘녹향’을 드나들다가 화가 이중섭, 소설가 최정희 등과 함께 이곳
에 자주 다니던 시인 양명문에게서 시를 받아 작곡하였습니다.
세상살이의 애환을 가난한 시인의 술안주가 되어버린 명태에 빗
댄 이 노래는 친구 베이스 오현명이 훗날 다시 불러 유명해졌습
니다. 초연 당시 평론가로부터 너무 혹평을 받아 충격을 받고
음악계를 떠나 오랫동안 외교관 생활을 하므로써 선생의 음악적
공백기간에 수 많은 걸작들을 노쳐버린 것은 음악계의 크다란 손
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곡은 그가 작곡을 포기하게 만든 악연
의 곡이기도 하지만 훗날 유명해져서 그를 다시 작곡생활로 컴백
하게 한 권토중래의 회심의 곡이기도 합니다.
변훈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하피스트이며 피아니스트인 석은애
여사와 결혼하였기에 그의 작품은 집에서 석여사의 피아노 반주로
성악도이기도 한 그의 가창으로 작시자들 앞에서 불려졌습니다.
석여사는 아까운 음악적 재능을 부군의 외교판과 음악판을 조용히
내조하는데 헌신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선생의 연세대 정치외
교학과 직계 후배인 정공채시인이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동부이촌
동의 변 작곡가의 宅에 드나든 경험담으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50년대의 그의 가곡은 한국적 가락과 홍난파나 현제명류의 여성적
이고 애상적인 기조를 벗어나 진실로 민족가곡답고 남성적인 우람
한 서정이 특징이었으며, 40년대 일본 노래의 세뇌침공을 막고자
산유화 등의 민족가곡을 작곡한 김순남의 해방가 등의 가곡에 이어
지는 듬직한 산맥처럼 우리 국토위에 굳건히 뿌리박고 있습니다.
그중 <명태>는 뒷날의 <쥐>와 더불어 전통적인 장타령조의 가락
과 리듬을 구사하여 연극적인 해학적 구성을 사용한 ‘한국적 리얼
리즘 가곡’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만년에는 밝고 유머가 넘치는
노래들을 작곡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양명문의 시에 곡을
붙인 <명태> <낙동강>, <떠나가는 배> 등과 <한강>, <임진강>,
<설악산아>(정공채 시), <쥐>(김광림 시), <님의 침묵>(한용운
시) <귀향의 날> (김영삼 시), <갈매기>(자작시) 등이 있습니다.
선생의 작품을 논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먼저
시중에 회자하는 <떠나 가는 배>의 뒷 이야기로
대시인 목월과 어느 문학소녀의 연애(戀愛)는 시인 부인의 선행으
로 바른 자리로 돌아 갔다는 신파류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한국전쟁중 뿔뿔이 헤어진 가족들이 피난한 제주도까지 1주일에 한
번씩 입출항하는 현장의 아픔과 희비를 그리고 있다는 해설이 더 온
당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작품 중에
<갈매기>는 이북에 남기고 온 부인을 그리워하던 장인의 심정과
그 자신 역시 실향민이던 그가 망향의 노래로 작시하고 작곡한 노래
이며, 자유로이 높푸른 하늘을 날며, 아무런 속박없이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유와 정의의 나라를 추구한 한 예술가의 간
절한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선생은 <변훈가곡선집 갈매기>에서
" 이제 모든 것들을 벗어 던지고 차가워진
겨레의 마음 한 구석에나마 따둣한 정서를 불어 넣기 위하여
한 마리의 갈매기가 되어 저 하늘 높이 훨훨 날면서
마음 내키는대로 노래지어 부르며 살고 싶다" 고 하였습니다.
변훈 선생의 음악세계를 알아 보면서
그의 50년 친구인 오현명선생의 회고를 인용하면서 맺습니다.
"그는 커다란 나무였다. 의리를 중히 여기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그의 곁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많았다. 대한민국 작곡가 중 유일하
게 통일을 염원하는 가곡을 많이 작곡한 변훈은 한국가곡의 발전
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홍난파 류의 여성적인 가곡의 흐름을 그는
패기 있고 힘이 넘치는 남성적인 가곡으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특색 있는 레치타티보적인 가곡의 처리는 현대(자유)시를 자연스
럽게 음악과 하나 되게 하였으며 민요의 타령조의 흐름은 그의 가
곡을 누구나 쉽게 접하고 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고 기리며 총평
하였습니다.
내가 이 글을 변훈선생의 작곡세계라 하지 않음은
그의 음악세계가 깊이와 폭에서 무한공간으로 날으는 큰 비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가곡은 우리 가곡사에서 우뚝한
거봉의 하나임을 새삼 깨닫기 때문입니다.
변훈(邊焄, 1926.5.23~2000.8.29)선생은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부친의 반대로 음악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1954년 연희전문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대학 재학 중인 1953년 외교관 공채시험에 합격한 후 미국 샌프
란시스코 총영사관, 타이완, 브라질, 파키스탄 총영사를 지냈으며,
1981년 포르투갈 대리대사를 마지막으로 퇴임하였습니다.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대학 재학 중 그는 서울대 정종길교수에게
서 작곡을 배우고 바리톤 최봉진에게서 성악을 배웠습니다. 결국
그는 4년동안 외교관 수업과 음악가 수업을 병행하였던 것입니다.
47년 재학시에 첫 작품으로 소월의 <금잔디>를 시작으로, 48년
에 <무서운 시간>, 51년 <낙동강>, 52년 6·25전쟁중 피난지인
대구에서 우리에게 친숙하고 많이 알려진 <명태>를 작곡하였습
니다.
미8군 통역관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감상실인 대구의
‘녹향’을 드나들다가 화가 이중섭, 소설가 최정희 등과 함께 이곳
에 자주 다니던 시인 양명문에게서 시를 받아 작곡하였습니다.
세상살이의 애환을 가난한 시인의 술안주가 되어버린 명태에 빗
댄 이 노래는 친구 베이스 오현명이 훗날 다시 불러 유명해졌습
니다. 초연 당시 평론가로부터 너무 혹평을 받아 충격을 받고
음악계를 떠나 오랫동안 외교관 생활을 하므로써 선생의 음악적
공백기간에 수 많은 걸작들을 노쳐버린 것은 음악계의 크다란 손
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곡은 그가 작곡을 포기하게 만든 악연
의 곡이기도 하지만 훗날 유명해져서 그를 다시 작곡생활로 컴백
하게 한 권토중래의 회심의 곡이기도 합니다.
변훈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하피스트이며 피아니스트인 석은애
여사와 결혼하였기에 그의 작품은 집에서 석여사의 피아노 반주로
성악도이기도 한 그의 가창으로 작시자들 앞에서 불려졌습니다.
석여사는 아까운 음악적 재능을 부군의 외교판과 음악판을 조용히
내조하는데 헌신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선생의 연세대 정치외
교학과 직계 후배인 정공채시인이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동부이촌
동의 변 작곡가의 宅에 드나든 경험담으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50년대의 그의 가곡은 한국적 가락과 홍난파나 현제명류의 여성적
이고 애상적인 기조를 벗어나 진실로 민족가곡답고 남성적인 우람
한 서정이 특징이었으며, 40년대 일본 노래의 세뇌침공을 막고자
산유화 등의 민족가곡을 작곡한 김순남의 해방가 등의 가곡에 이어
지는 듬직한 산맥처럼 우리 국토위에 굳건히 뿌리박고 있습니다.
그중 <명태>는 뒷날의 <쥐>와 더불어 전통적인 장타령조의 가락
과 리듬을 구사하여 연극적인 해학적 구성을 사용한 ‘한국적 리얼
리즘 가곡’의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만년에는 밝고 유머가 넘치는
노래들을 작곡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양명문의 시에 곡을
붙인 <명태> <낙동강>, <떠나가는 배> 등과 <한강>, <임진강>,
<설악산아>(정공채 시), <쥐>(김광림 시), <님의 침묵>(한용운
시) <귀향의 날> (김영삼 시), <갈매기>(자작시) 등이 있습니다.
선생의 작품을 논함에 있어서 무엇보다 먼저
시중에 회자하는 <떠나 가는 배>의 뒷 이야기로
대시인 목월과 어느 문학소녀의 연애(戀愛)는 시인 부인의 선행으
로 바른 자리로 돌아 갔다는 신파류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한국전쟁중 뿔뿔이 헤어진 가족들이 피난한 제주도까지 1주일에 한
번씩 입출항하는 현장의 아픔과 희비를 그리고 있다는 해설이 더 온
당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작품 중에
<갈매기>는 이북에 남기고 온 부인을 그리워하던 장인의 심정과
그 자신 역시 실향민이던 그가 망향의 노래로 작시하고 작곡한 노래
이며, 자유로이 높푸른 하늘을 날며, 아무런 속박없이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유와 정의의 나라를 추구한 한 예술가의 간
절한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선생은 <변훈가곡선집 갈매기>에서
" 이제 모든 것들을 벗어 던지고 차가워진
겨레의 마음 한 구석에나마 따둣한 정서를 불어 넣기 위하여
한 마리의 갈매기가 되어 저 하늘 높이 훨훨 날면서
마음 내키는대로 노래지어 부르며 살고 싶다" 고 하였습니다.
변훈 선생의 음악세계를 알아 보면서
그의 50년 친구인 오현명선생의 회고를 인용하면서 맺습니다.
"그는 커다란 나무였다. 의리를 중히 여기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그의 곁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많았다. 대한민국 작곡가 중 유일하
게 통일을 염원하는 가곡을 많이 작곡한 변훈은 한국가곡의 발전
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홍난파 류의 여성적인 가곡의 흐름을 그는
패기 있고 힘이 넘치는 남성적인 가곡으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특색 있는 레치타티보적인 가곡의 처리는 현대(자유)시를 자연스
럽게 음악과 하나 되게 하였으며 민요의 타령조의 흐름은 그의 가
곡을 누구나 쉽게 접하고 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고 기리며 총평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