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유일 여성 재상 육정
鄭宇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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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7 16:51
중국 유일 여성 재상 육정
ㅡ 중국 유일한 여상 육정
오늘날과 같은 남여 양성 평등시대에는
중국의 유일한 여성재상이라는 것도 별 신통 방통한 벼슬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여성 대통령도 있고 여왕 군주도 있는 세상이니 그렇습니다.
드라마에서 익히 들어온 여재상(女宰相) 육정(陸貞, 본명 令萱)은 모진
역경과 수많은 고난을 이겨내는 지혜와 리더십으로 여자 재상이 되어
북제를 이끌었던 성공한 여인의 일대기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그러나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짧은 제나라의 역사를 망하게 한 요망한
여자로 기록되기도 합니다.
육정은 위진 남북조시대에 북제의 관상 세가 출신으로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지만 착한 심성과 총명함으로 아버지를 도와 가업을 일구어 나갑니다.
그러나 이내 계모의 질투에 갖은 수모를 당하게 되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아버지마져 잃고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의 살해범이라는 누명까지 썼습니다.
그리하여 모반죄로 죽은 남편(낙초)과 자식(뒤에 목제파장군)이 있는 유부
녀로 황실의 궁녀가 되어 강보에 쌓인 고위를 키워 황제의 위에 올리고 이
를 발판으로 권력을 잡아 8년간 재상직에 있었으나 원래가 황음금수왕조인
북제는 개국 28년만에 단명정권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ㅡ 여성 신도비의 주인공
우리나라에서 유일(唯一)하게 여성의 신도비(神道碑)를 세운것은
1497년(연산군3) 왕의 어명에 따라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에 세웠습니다.
바로 그 건너편에 객사한 낭군을 그리워하듯 북쪽을 향해 남양부부인(南
楊府夫人) 홍씨(洪氏)의 묘소와 동서를 바라보고 있는 신도비이며 이 무
덤의 주인공은 인수대비의 어머니이며 조선조 9대 왕인 성종의 외할머니
인 남양홍씨 부부인의 묘소인 것이다.
조선 초기 계유정난으로 단종으로부터 권력을 찬탈한 세조의 핵심 참모 역
할을 한 양절공 한확의 부인이기도 한 그녀는 이조판서 홍여방(洪汝方)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성품으로 가족간에 화합
하여 중간 역할을 잘 함으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한확과 결혼 후 슬하에 3남6녀를 낳았는데 막내딸이 성종의 모후(母后:왕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인 것이다. 막내딸로 태어난 인수대비는 많은 형제들 밑
에서 사랑을 독차지 하였으며 그만큼 어릴 때 고집도 세었고 무엇이든 하고
픈 일이면 꼭 해야하는 습성이 있었다. 어머니인 남양홍씨 부부인의 신도비
를 세우게 된 것도 인수대비가 주동이 되어 세웠다고 한다.
ㅡ 전설로 전해지는 여자 교황
가명으로 요하네스 앙글리쿠스(John Anglicus)라는 이름을 썼고,
교황명은 앙글리아 요한나 폰티펙스 막시무스이다. 서기 850년경에 살았다
고도 전해지고, 1100년경에 살았다고도 전해진다. 여자임을 숨기고 성직자
의 길을 걸어서 추기경이 된 후, 마침내 교황이 되는 것에 성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교황이 된 이후 임신을 해버린다. 교황의 옷으로 배가 불러오는 것은
숨길 수 있었지만, 라테라노 궁전으로 행차하는 도중 길에서 아기를 낳아버
린다. 요한나와 아기는 이를 보고 성이 난 군중들에 의해 맞아 죽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런 일화는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치부인데다가, 페미니스트들과 개신
교 신자들이 가톨릭 교회를 비난하는 용도로도 꾸준하게 써 먹었기 때문에
교황청에서는 그녀의 존재를 부인하며, 1601년 교황 클레멘스 8세에 이르러서
는 정식으로 여자 교황 전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시에나 성당의
여자 교황 흉상의 파괴를 명령했습니다.
ㅡ 올림픽경기 참가 첫 여자선수
고대올림픽 경기대회는 그리스에서 시작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고대그리스인들이 B.C.9세기부터 올림픽 경기대회를 진
행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학자들은 B.C.776년경에 진행된 경기대회를 첫
고대올림픽 경기대회로 규정하고 있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각 부락들간의 싸움으로 전쟁이 그칠새 없었다. 이로부터
사회적으로 육체가 튼튼하고 행동이 민첩한 무사들이 요구됐는데 이러한 무사
들은 체육운동을 통해 육성됐다. 체육운동으로부터 조직적인 경기로 발전한
고대올림픽 경기대회는 4년에 한번씩 진행됐다. 제1차 고대올림픽 경기대회
는 달리기 종목 하나만으로 진행됐으나 그 후 여러 종목으로 늘어났다.
B.C.444년부터는 문학예술도 올림픽 경기종목의 하나로 선정되어 이 시기 문
화교류도 발전하게 됐다. B.C.146년 로마인들은 마케도니아를 격파하고 전체
그리스를 로마의 통치하에 두었으며 A.D.392년 로마황제는 그리스도교를 국
교로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제우스에게 제를 지내는 행사의 하나로 진행하던
고대올림픽 경기대회는 이단적인 활동으로 치부되여 A.D.394년에 폐지됐다.
고대올림픽 경기대회가 폐지된지 1500년이 지난 1894년에 국제올림픽위원회
가 조직됐으며 1896년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제1차 올림픽 경기대회가
열림으로써 현대올림픽경기대회의 서막이 열리게 됐다.
현대올림픽 경기대회에서 여자선수들의 인기와 활약은 남자들 못지않다.
하지만 최초의 올림픽에서는 여자선수가 참가할 수 없었다. 여성의 경기참가
는 고대올림픽때부터 엄격히 금지됐었다. 그 결과 제1차 아테네올림픽 경기
대회에서도 경기참가자는 전부 남자였고 전부가 나체로 출전하였숩니다.
하지만 제2차 파리올림픽 경기대회에 프랑스,영국 등 나라들에서는 11명의
여자선수들을 참가시켰다. 비록 여자선수들은 국제올림픽위원회의 인정을 받
지 못하고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지만 이것은 여성들의 세계체육계진출이라는
전례를 만든 것으로 평가받는다. 1912년 스톡홀름올림픽 경기대회 수영경기에
처음으로 여자선수들이 참가했다. 마침내 1923년에 진행된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여자선수들의 경기참가가 승인됐다.
ㅡ 중국 유일한 여상 육정
오늘날과 같은 남여 양성 평등시대에는
중국의 유일한 여성재상이라는 것도 별 신통 방통한 벼슬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여성 대통령도 있고 여왕 군주도 있는 세상이니 그렇습니다.
드라마에서 익히 들어온 여재상(女宰相) 육정(陸貞, 본명 令萱)은 모진
역경과 수많은 고난을 이겨내는 지혜와 리더십으로 여자 재상이 되어
북제를 이끌었던 성공한 여인의 일대기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그러나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짧은 제나라의 역사를 망하게 한 요망한
여자로 기록되기도 합니다.
육정은 위진 남북조시대에 북제의 관상 세가 출신으로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지만 착한 심성과 총명함으로 아버지를 도와 가업을 일구어 나갑니다.
그러나 이내 계모의 질투에 갖은 수모를 당하게 되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아버지마져 잃고 설상가상으로 아버지의 살해범이라는 누명까지 썼습니다.
그리하여 모반죄로 죽은 남편(낙초)과 자식(뒤에 목제파장군)이 있는 유부
녀로 황실의 궁녀가 되어 강보에 쌓인 고위를 키워 황제의 위에 올리고 이
를 발판으로 권력을 잡아 8년간 재상직에 있었으나 원래가 황음금수왕조인
북제는 개국 28년만에 단명정권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ㅡ 여성 신도비의 주인공
우리나라에서 유일(唯一)하게 여성의 신도비(神道碑)를 세운것은
1497년(연산군3) 왕의 어명에 따라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에 세웠습니다.
바로 그 건너편에 객사한 낭군을 그리워하듯 북쪽을 향해 남양부부인(南
楊府夫人) 홍씨(洪氏)의 묘소와 동서를 바라보고 있는 신도비이며 이 무
덤의 주인공은 인수대비의 어머니이며 조선조 9대 왕인 성종의 외할머니
인 남양홍씨 부부인의 묘소인 것이다.
조선 초기 계유정난으로 단종으로부터 권력을 찬탈한 세조의 핵심 참모 역
할을 한 양절공 한확의 부인이기도 한 그녀는 이조판서 홍여방(洪汝方)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성품으로 가족간에 화합
하여 중간 역할을 잘 함으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한확과 결혼 후 슬하에 3남6녀를 낳았는데 막내딸이 성종의 모후(母后:왕의
어머니)인 인수대비인 것이다. 막내딸로 태어난 인수대비는 많은 형제들 밑
에서 사랑을 독차지 하였으며 그만큼 어릴 때 고집도 세었고 무엇이든 하고
픈 일이면 꼭 해야하는 습성이 있었다. 어머니인 남양홍씨 부부인의 신도비
를 세우게 된 것도 인수대비가 주동이 되어 세웠다고 한다.
ㅡ 전설로 전해지는 여자 교황
가명으로 요하네스 앙글리쿠스(John Anglicus)라는 이름을 썼고,
교황명은 앙글리아 요한나 폰티펙스 막시무스이다. 서기 850년경에 살았다
고도 전해지고, 1100년경에 살았다고도 전해진다. 여자임을 숨기고 성직자
의 길을 걸어서 추기경이 된 후, 마침내 교황이 되는 것에 성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교황이 된 이후 임신을 해버린다. 교황의 옷으로 배가 불러오는 것은
숨길 수 있었지만, 라테라노 궁전으로 행차하는 도중 길에서 아기를 낳아버
린다. 요한나와 아기는 이를 보고 성이 난 군중들에 의해 맞아 죽었다고 한다.
당연히 이런 일화는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치부인데다가, 페미니스트들과 개신
교 신자들이 가톨릭 교회를 비난하는 용도로도 꾸준하게 써 먹었기 때문에
교황청에서는 그녀의 존재를 부인하며, 1601년 교황 클레멘스 8세에 이르러서
는 정식으로 여자 교황 전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시에나 성당의
여자 교황 흉상의 파괴를 명령했습니다.
ㅡ 올림픽경기 참가 첫 여자선수
고대올림픽 경기대회는 그리스에서 시작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고대그리스인들이 B.C.9세기부터 올림픽 경기대회를 진
행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학자들은 B.C.776년경에 진행된 경기대회를 첫
고대올림픽 경기대회로 규정하고 있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각 부락들간의 싸움으로 전쟁이 그칠새 없었다. 이로부터
사회적으로 육체가 튼튼하고 행동이 민첩한 무사들이 요구됐는데 이러한 무사
들은 체육운동을 통해 육성됐다. 체육운동으로부터 조직적인 경기로 발전한
고대올림픽 경기대회는 4년에 한번씩 진행됐다. 제1차 고대올림픽 경기대회
는 달리기 종목 하나만으로 진행됐으나 그 후 여러 종목으로 늘어났다.
B.C.444년부터는 문학예술도 올림픽 경기종목의 하나로 선정되어 이 시기 문
화교류도 발전하게 됐다. B.C.146년 로마인들은 마케도니아를 격파하고 전체
그리스를 로마의 통치하에 두었으며 A.D.392년 로마황제는 그리스도교를 국
교로 선포하였다. 그리하여 제우스에게 제를 지내는 행사의 하나로 진행하던
고대올림픽 경기대회는 이단적인 활동으로 치부되여 A.D.394년에 폐지됐다.
고대올림픽 경기대회가 폐지된지 1500년이 지난 1894년에 국제올림픽위원회
가 조직됐으며 1896년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제1차 올림픽 경기대회가
열림으로써 현대올림픽경기대회의 서막이 열리게 됐다.
현대올림픽 경기대회에서 여자선수들의 인기와 활약은 남자들 못지않다.
하지만 최초의 올림픽에서는 여자선수가 참가할 수 없었다. 여성의 경기참가
는 고대올림픽때부터 엄격히 금지됐었다. 그 결과 제1차 아테네올림픽 경기
대회에서도 경기참가자는 전부 남자였고 전부가 나체로 출전하였숩니다.
하지만 제2차 파리올림픽 경기대회에 프랑스,영국 등 나라들에서는 11명의
여자선수들을 참가시켰다. 비록 여자선수들은 국제올림픽위원회의 인정을 받
지 못하고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지만 이것은 여성들의 세계체육계진출이라는
전례를 만든 것으로 평가받는다. 1912년 스톡홀름올림픽 경기대회 수영경기에
처음으로 여자선수들이 참가했다. 마침내 1923년에 진행된 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에서 여자선수들의 경기참가가 승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