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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탑과 석가탑

鄭宇東 0 2234
다보탑과 석가탑
 
경주 佛國寺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
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입니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
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습니다.

불국사의 대웅전 경내에는 다보탑과 석사탑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다보탑과 석가탑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습니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에 있는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
명한다는 "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시키고자
함이었습니다.
 
절의 이름이 참 거창합니다. 불국(佛國) 즉 부처님의 나라란 뜻입니다.
그건 신라인들이 가고 싶어했던 낙원입니다. 신라의 국가 지도이념은 불국
토의 실현이었습니다. 왕 이름도 불교 냄새가 물씬 나는 법흥왕(法興王)이
나 진흥왕(眞興王)으로 짓고, 왕비의 이름에도 "마야 부인"이 있었습니다.
마야는 인도 석가모니 붓다의 어머니 이름입니다. 현실을 불국토로 만드는
일 말입니다. 불국사의 대웅전 앞뜰에는 탑이 둘 있습니다. 석가탑과 다보
탑으로 하나는 무척 단조롭고, 하나는 아주 화려합니다.  

붓다는 일체의 진리를 깨달은 이후 인도의 마가다국의 영축산에서 주로
설법을 했습니다. 영축산에서 붓다가 꽃을 들자 제자인 마하 가섭이 빙긋
이 웃었다는 염화미소와 이심전심의 현장입니다. 붓다는 거기서 ‘묘법연
화경(法華경)’을 설했습니다. 그러자 맞은 편에서 땅을 뚫고 탑이 올라왔
다고 합니다. 여기서 붓다를 석가여래, 탑을 다보여래라 부릅니다. 이것이
두 여래의 이름을 가진 석가탑과 다보탑에 얽힌 불교적 전승입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온 탑을 건설한 백제의 석공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
의 슬픈 전설은 속세의 그림자조차도 허용치 않는 석존진리의 엄정함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 겁니다. 화려한 다보탑은 세속의 그림자를 동반하
는 有影塔이지만 석가탑은 필시 애초부터 無影塔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없는 탑의 그림자를 기다리다 아사녀는 진이 빠져 그만 못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한편 현지에서 아사달을 사모하던 주만도 사랑의 굴레에 얽혀
죽으니 탑을 완성한 아사달은 교차하는 두 여인의 환영을 쫓아 바위위에
그들을 조각하고 보니 그것은 거룩한 부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탑은 원래 부처님의 몸에서 나온 사리를 모신 곳으로
고대 인도에서 성인의 유해를 화장하고 그 유골을 봉안하던 스투파(stupa)
에서 비롯하였습니다. 이것이 탑파(塔婆)이다가 탑(塔)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훗날 폴투갈인이 진출한 남방 불교쪽에서는 세일론어 다투가르바
(dhatugarba : 舍利奉藏所)를 가리키는 다가바(dagaba)의 변형으로 된
"파고다"라 하여 탑을 가리키는 서구어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기원 1세기경 대승불교의 영향으로 불상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가장 중요한
예배대상이었고 불자들이 기도하는 사찰도 탑을 중심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밥그릇을 엎어놓은 듯한 복발형의 인도 스투파는
동아시아에 전해지면서 누각형태로 변하고 복발형의 스투파는 탑 가장 윗
부분의 상륜부로 남게되었습니다. 탑은 재료에 따라 목탑, 석탑, 전탑으로
구분되는데 자연적 여건과 관련되어 중국에서는 전탑, 일본에서는 목탑이
유행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초기에는 목탑이 많이 건립되었지만 대
부분 소실되었고, 삼국시대말 이후에는 석탑이 주로 건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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