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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미인 에피소드

鄭宇東 0 3187
중국 미인 에피소드

중국에서는 미인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어휘가 있습니다.
‘침어낙안 폐월수화’인데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를 각각 '沈魚-落雁
閉月-羞花' 라는 대명사로 일컬었습니다. 이렇게 중국의 고대 4대 미녀는
서한 원제(元帝) 때의 궁녀 왕소군(王昭君)과 삼국 시대의 초선(貂蝉),
당대의 양귀비(杨贵妃), 춘추 시대 월국(越國)때의 서시(西施)입니다.
아쉽게도 4대 미인에 탈락한 미녀가 있는데 그녀가 바로 조비연이고
미인은 여자라는 관념때문에 미인이 못된 미남 난릉왕 장유가 있습니다.

조비연이 탈락한 이유는 그녀의 특징이 아름다움보다는 몸가짐이 가벼움
에 치우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비연를 지칭할 때에는 항상 4대 미인
의 한 사람인 양귀비와 더불어 거론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연수환비'로 그 뜻은 조비연는 말랐으나 미인이었고,
양귀비는 뚱뚱했으나 미인이었습니다. 또는 흔히 조비연은 날씬한 미인의
대명사로, 임풍양류형 미인이고, 양귀비는 풍만한 미인의 대명사로 부귀
모란형 미인이라고 한답니다.

 * 왕소군
왕소군(王昭君, 기원전 1세기)은 본래 한나라 원제의 궁녀였습니다.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 복주누약제 선우(復株累若鞮單于)의
알씨(선우의 처)로, 이름은 장(嬙)이며 자를 昭君이라고 하여 보통 왕소
군이라고 불리며 후일 사마소(司馬昭)의 휘(諱)를 피하여 명비(明妃),
왕명군(王明君) 등으로도 일컬어졌습니다. 형주 남군(현 호북성 사시)
출신으로 양귀비, 서시, 초선과 함께 고대 중국 사대 미인의 한 사람에
손꼽힙니다. 초상화중 제일 추한 초상화의 주인을 흉노족에게 시집보내
기로 하였는데 뇌물을 주지않아 가장 추하게 그려져 출발인사 간 것을
왕이 보고는 엉터리로 그린 화공의 목을 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 초선
초선(貂蟬, 175~199)은 <삼국지연의>에서 왕윤의 수양딸로 등장해
동탁과 여포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는
여포가 동탁의 시녀와 염문을 가졌다는 정사의 기록과 왕윤이 여포를 부추
겨 동탁을 죽이게 했다는 사실을 연의에서 각색한 것입니다.
‘초선(貂蟬)’이란 이름은 담비의 꼬리와 매미의 날개로 만든 당상관 전용 관
모인 초선관(貂蟬冠)을 관리하는 시녀의 관직명으로 동탁이 상국에 올랐기
때문에 그에따라 동탁의 초선관을 관리하는 시녀로 할당되었습니다.

 * 양귀비
양귀비(楊貴妃, 719~ 756)는 중국 마웨이(馬嵬) 사람으로
중국 당(唐)나라 현종(玄宗 : 712~756 재위)의 귀비(貴妃)가 되었습니다.
현종이 그녀에게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자 잇달아 반란이 일어났고, 그로 인
해 당조(618~907)의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유명한
중국 시와 희곡의 주제가 되어왔습니다. 고관의 딸이었던 그녀는 중국 역사
상 절세의 미인으로 통하는 몇몇 풍만한 체구의 여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처음에는 현종 아들의 비였으나 그녀에게 매혹된 60세의 현종은 아들에게
그녀와 헤어질 것을 요구했습니다. 얼마 후 그녀의 두 자매도 현종의 비로
맞아들여졌고, 사촌오빠인 양국충(楊國忠)은 재상이 되었습니다. 돌궐족
출신의 젊은 장군 안녹산(安祿山)은 양귀비의 득세를 등에 업고 엄청난 권
세를 누렸습니다. 그녀는 그를 양자로 맞아들였는데 실제로는 연인 사이였
다는소문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든든한 배경을 지닌 안녹산은 20만 대군의
통수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양국충의 권세를 질투하여 황제를
배반하고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756년 반란으로 인해 수도가 점령
당하자 현종과 황실은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도망중에 황제의 친위병들은
당의 몰락이 양씨일가 때문이라고 여겨 양귀비와 양국충을 처형했습니다.

 * 서시
중국 춘추시대 월(越)나라의 미녀입니다.
그녀는 원래 浙江省 주지[諸曁] 저뤄 산[苧蘿山]의 서쪽에 살며 땔나무를
팔아 생계를 이었습니다. 오(吳)나라에 패한 월왕 구천(句踐)은 회계(會稽)
의 치욕을 씻으려고 대부(大夫) 종(種)의 책략을 이용하여, 두 미녀 서시와
정단(鄭旦)을 데려와 아름다운 옷을 입히고 여러 가지 기예를 가르친 뒤 재
상 범려(范蠡)를 사신으로 보내 오왕 부차(夫差)에게 바쳤습니다. 오왕은
서시의 미모에 사로잡혀 정사를 게을리하여 마침내 월에 패했습니다.
서시에 관한 이야기와 전설은 매우 많은데, 오나라가 망한 뒤 범려를 따라
오호(五湖)에서 놀았다고도 전해지며, 일설에는 오나라 사람이 분노하여
서시를 붙잡아 강에 빠뜨려 죽였다고 합니다.

 * 절세미남 난릉왕
난릉왕입진곡은 북송시대 주방언(周邦彦)이 지은 무악(舞樂) 이름의 하나
로 중국 북제(北齊)의 난릉왕인 장공(長恭)이 周나라 군사를 금용성(金墉
城) 아래서 무찌른 일을 노래한 것입니다.
난릉왕은 중국 역사상 여자로도 착각할 만큼 아름다운 미남이었고 굉장히
뛰어난 무장이였습니다. 전장에서 싸울 때에는 반드시 무서운 도깨비가면
을 쓰고 싸웠다 합니다. 미인박명이라고 하더니 난능왕은 남자지만 미인이
라서 그래서 역시 요절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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