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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근 작곡가의 음악세계

鄭宇東 0 2239
이상근 작곡가의 음악세계

작곡가 이상근(李相根, 1922~2000) 선생은
1922년 진주 봉래동에서 태어나 음악의 딜레탕트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음악에 입문하여 20세기 한국음악을 열정적으로 개척해 나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곡가입니다. 선생은 1950년대 현대음악 태동기에 윤이상,
정회갑과 함께 현대적 기법을 적극 도입한 진보적 성향의 작곡가입니다.
선생은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줄곧 진주와 마산 그리고 마지막에는 부산에
정착하여 생애를 마쳤습니다.

이상근선생은 진주고보를 졸업하고 일제의 강제징용을 피할 수단으로 초등
학교 교사로 근무했지만 음악을 향한 열정을 살리기 위해 일본 도쿄 동양음
악학교(동경음악대학)에서 1년을 수학하다 해방과 더불어 귀국했습니다.
집안 사정으로 일찍 귀국해 진주중학교와 진주농고의 음악교사를 겸임하다
가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 마산여고로 옮기고(이때의 제자로 이화여대
교수를 지냈던 이영애, 동아대의 교수를 지냈던 김진명 등) 나서부터 그의
작품 활동이 시작됩니다. 마산에서 음악인 제일여고의 최인찬선생, 마고의
제갈삼선생, 마여고의 그의 전임자 소프라노 전경애선생과 이상근선생이
모여서 이룬 마산 음악 4인조는 선생이 자리를 부산고교로 옮김에 따라 다
시 만나 부산의 4인조로 음악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게 됩니다.

이상근선생 하면 먼저 떠올리는 작품이 있습니다.
진주고보 재학때인 18세에 작곡한 "해곡(양주동 詩)"이 첫 가곡작품이며
1947년 해방 직후에 그는 국민동요 '새야 새야'를  작곡했습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청포장수 울고 간다".
이 작품은 한국 근대사의 큰 전환점을 가져온 동학혁명의 두령 전봉준을 두
고 불린 전래동요의 하나입니다. '강강수월래'와 함께 우리의 전래동요중 특
이한 서정적 가락으로 우리 가슴에 파고 든 이 노래는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와 같은 가락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김춘수 선생의 시에 의한 가곡 "구름과 장미" "늪"과 연가곡집 "가을
저녁의 시"를 작곡했는데 그 당시 김춘수 시인은 마산중학교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상근선생의 우국충정이 어려있는
전쟁 중에 작곡한 칸타타 <보병과 더불어>는 반세기 만에 그의 사후 고향
에서 초연되었습니다. 특히 이 작품은 6·25사변을 소재로 한 최초의 클래
식 음악으로 청마 유치환 선생의 동명의 시를 가사로 한 칸타타입니다.
이같은 작품은 의식의 노래로 채택되어 자주 연주되어 지기를 바랍니다.

1955년엔 부산 사범대학이 설립되면서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이때 사범대교수 해외파견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미국의 조지피바디 대학
원에서 다시 음악 수학을 할 기회를 갖습니다. 미국 수학에서 돌아와 비로
소 오랫동안 벼르던 청마 유치환의 시에 곡을 입힐 것을 결심합니다.
청마는 오래 전부터 시집이 발간될 때마다 그에게 시집을 부쳐 보냈습니다.
선생은 청마의 인품을 흠모하고 있었고 그의 시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청마의 시에 곡을 입힌 연가곡 '아가'는 모두 12곡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는 귀국 후 어느 날 청마 묘소를 찾아가 머리를 조아린 채 울음을 터뜨리
고 말았습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청마가 서거한 비통함도 있었지만 작곡
가로서 자신의 무능과 나태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었습니다.
연가곡 아가 외에도 청마 시 12편을 골라 뽑아 '그리움2' '파도야 어쩌란 말
이냐' '청령가' 등을 작곡하면서 "눈물 섞인 감동으로 자신을 매질했다"고
술 회하기도 했습니다.

그에겐 부산을 소재로 한 기념비적 작품이 있습니다.
부산시향이 부산 개항 100주년 기념으로 위촉한 교성곡 '분노의 물결'과
1986년에 작곡한 오페라 '부산성 사람들'이 그것입니다. 선생은 평론에도
손을 댔지만 그보다는 지휘자로서 자신의 관현악 작품을 서울시향과
부산시향이 초연할 때도 직접 지휘봉을 들었습니다. 스스로 창단한
프로무지카의 합창 지휘자로서 10회에 걸친 공연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의 가곡은 종래의 가곡과는 사뭇 다른 현대 기법에 따른 곡이었습니다.
듣는 사람들은 가곡이 이렇게 앞서 갈 수 있느냐고 의아해할 정도였습니다.
선생이 당시 가지고 있던 많은 SP 가운데는 드뷔시, 라벨, 포레 등 프랑스
인상파의 음반들이 거의 망라되어 있었습니다. 그의 주위 사람들은 이러한
음악적 소양을 바탕으로 단파 라디오를 통해 해외에서 방송하는 현대음악
을 접하고 새로운 작곡기법을 터득한 것이 아닐까 여기기도 합니다.

이상근선생은 가곡외에도 기악과 관현악곡 작품이 많이 있습니다.
선생은 교향곡과 관현악곡, 실내악곡, 피아노곡, 가곡, 합창곡, 오페라 등
다양한 분야에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대체로
‘한국적 화음’과 ‘선율법의 독창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주요 교향곡으로는 <교향곡1번(서완조) (1955년)>, <교향곡6번(한국의
춤)(1995년)> 등이 있으며,
관현악곡으로는 <축전서곡 55432 (1976년)>, <무악 81(1981년)> 등이
있으며, 피아노곡으로는 <한국의 꽃 (1992년>과 <한국의 춤 (1994년)>
을 비롯하여, 오페라 <부산성 사람들>(1985년), 국악관현악곡인 <조우
(遭遇)시리즈 11곡> 등 다수의 가곡과 합창곡을 남겼습니다.
저서로는<우리가곡 시론 Ⅰ·Ⅱ>, <우연성(불확정성) 기보법에 의한 시론>,
<현대음악의 사조> 등의 저서를 비롯하여, 중학교 음악교과서 및 교사용
지도서를 저술하였습니다.
특히 <피아노 트리오 No.1>은 1952년 12월 6일 전시 수도 부산 이화여대
강당에서 개최된 작곡자의 실내악 발표회에서 초연되었습니다. 개인의 실
내악작품으로 이루어진 작곡발표회로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이었고 피아노
트리오가 작곡된 것도 처음이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이상근 선생은 작곡가로써 뿐만 아니라 훌륭한 교육자였습니다.
초등학교에서 시작하여 중등교육 고등교육의 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오던 선생은 부산교대, 부산사범대학교를 거쳐 부산대 예술대학장을 역임
하여 교수직을 정년으로 마쳤고 많은 후진을 길러 냈습니다. 부산대 음대
의 이언도교수, 김인일교수, 계명대의 임우상교수도 선생의 제자입니다.
선생은 2000년에 운명하기까지 부산-영남파 음악의 대들보로서 충실한
예술혼을 불사르며 참으로 진지하게 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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