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 류영모(多夕 柳永模) 선생
鄭宇東
0
1879
2011.10.04 12:04
다석 류영모(多夕 柳永模) 선생
多夕 柳永模(1890.3.13 ~ 1981.2.13) 선생은 서울에서 태어 났습니다.
어려서 서당에서 사서삼경등 동양고전을 배웠는데, 한국인으로 첫 YM
CA총무가 된 김정식의 인도로 서울 연동교회 신자가 되어 16세에 세례
를 받았습니다.
1907년 경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수학하였으며
1910년 남강 이승훈선생의 초빙으로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2년간 봉직
1921년 고당 조만식선생의 후임으로 오산학교의 교장이 되어 1년간
재직하였는데 이때 함석헌이 졸업반으로 재학, 이후 사제로서의
인연을 이어갑니다.
1928년 YMCA 연경반모임을 맡아 1963년까지 동양고전을 포함 강의를
했습니다. 생애동안 수 많은 강의를 했지만 저서로는 "다석일지"
만을 남겼습니다.
多夕선생은
성경, 불경 , 동양철학, 서양철학에도 능통했던 대석학입니다.
옛말을 찾아 쓰거나 얼나(眞我) 제나(自我) 씨알 같은 말을 만들어
우리 말과 글로서 철학을 한 최초의 사상가였습니다. 선생은 불교,
노장사상, 공자와 맹자 등을 두루 탐구하였으며, 기독교를 근간으로
삼아 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는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사상체계를 세운 큰 사상가였습니다.
선생은 일찌기 기독교에 입문한 정통 기독교인이었으나 톨스토이
사상의 영향으로 무교회주의자가 되어 교회에 나가지 않고 평생
성경을 읽고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만을
진리로 떠받들고 예수만을 절대시하지는 않았습니다.
선생의 나이 쉰 하나에 믿음에 깊이 들어 삼각산에서 도를 깨치고
이때부터 부인과는 이혼은 하지않은채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는
해혼의식(解婚儀式)을 치루고 수도에 정진하는 성인의 생활에 들어
가 새벽 3시에 일어나 정좌하고 묵상하며
딱딱한 나무판에 홑이불을 깔고 그 위에서 자며
평생 무명이나 베로 지은 거친 옷을 입고 고무신만 신고 다니며
하루 세끼를 저녁에 합쳐 한끼만 먹는다는 뜻으로 아호를 多夕으로
삼았습니다. 나의 고안발명품으로 한때 내세웠던 "날로 세는 나이
일령(日齡)" 도 훗날 알고 보니 다석선생의 아호 발상법에 원줄기를
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동양고전이나 크리스티즘에 소양이 없던 그당시의 나로서는
김교신, 함석헌 등의 스승이라는 것 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는데 그후
선생의 명강의를 들은 사람들의 강의록을 바탕으로 많은 책들이 출판
되어졌습니다. 선생은 동양고전 특히 도덕경에 정통하고, 유불선 3교
의 대석학이었고 톨스토이, 우찌무라간죠(內村鑑三)를 연구하여 무교
회주의적 색채를 띄었으나 그의 기독교에 대한 믿음과 실천생활은
가히 聖人의 경지에 이르렀다 합니다.
多夕 柳永模(1890.3.13 ~ 1981.2.13) 선생은 서울에서 태어 났습니다.
어려서 서당에서 사서삼경등 동양고전을 배웠는데, 한국인으로 첫 YM
CA총무가 된 김정식의 인도로 서울 연동교회 신자가 되어 16세에 세례
를 받았습니다.
1907년 경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수학하였으며
1910년 남강 이승훈선생의 초빙으로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2년간 봉직
1921년 고당 조만식선생의 후임으로 오산학교의 교장이 되어 1년간
재직하였는데 이때 함석헌이 졸업반으로 재학, 이후 사제로서의
인연을 이어갑니다.
1928년 YMCA 연경반모임을 맡아 1963년까지 동양고전을 포함 강의를
했습니다. 생애동안 수 많은 강의를 했지만 저서로는 "다석일지"
만을 남겼습니다.
多夕선생은
성경, 불경 , 동양철학, 서양철학에도 능통했던 대석학입니다.
옛말을 찾아 쓰거나 얼나(眞我) 제나(自我) 씨알 같은 말을 만들어
우리 말과 글로서 철학을 한 최초의 사상가였습니다. 선생은 불교,
노장사상, 공자와 맹자 등을 두루 탐구하였으며, 기독교를 근간으로
삼아 이 모든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는 한국적이면서 세계적인
사상체계를 세운 큰 사상가였습니다.
선생은 일찌기 기독교에 입문한 정통 기독교인이었으나 톨스토이
사상의 영향으로 무교회주의자가 되어 교회에 나가지 않고 평생
성경을 읽고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만을
진리로 떠받들고 예수만을 절대시하지는 않았습니다.
선생의 나이 쉰 하나에 믿음에 깊이 들어 삼각산에서 도를 깨치고
이때부터 부인과는 이혼은 하지않은채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는
해혼의식(解婚儀式)을 치루고 수도에 정진하는 성인의 생활에 들어
가 새벽 3시에 일어나 정좌하고 묵상하며
딱딱한 나무판에 홑이불을 깔고 그 위에서 자며
평생 무명이나 베로 지은 거친 옷을 입고 고무신만 신고 다니며
하루 세끼를 저녁에 합쳐 한끼만 먹는다는 뜻으로 아호를 多夕으로
삼았습니다. 나의 고안발명품으로 한때 내세웠던 "날로 세는 나이
일령(日齡)" 도 훗날 알고 보니 다석선생의 아호 발상법에 원줄기를
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동양고전이나 크리스티즘에 소양이 없던 그당시의 나로서는
김교신, 함석헌 등의 스승이라는 것 밖에는 아는 것이 없었는데 그후
선생의 명강의를 들은 사람들의 강의록을 바탕으로 많은 책들이 출판
되어졌습니다. 선생은 동양고전 특히 도덕경에 정통하고, 유불선 3교
의 대석학이었고 톨스토이, 우찌무라간죠(內村鑑三)를 연구하여 무교
회주의적 색채를 띄었으나 그의 기독교에 대한 믿음과 실천생활은
가히 聖人의 경지에 이르렀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