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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의 애환

鄭宇東 0 1898
보리밭의 애환

윤용하 선생의 가곡 보리밭을 부르노라면 그 가사와 곡조에서
우리는 일렁거리는 그 푸른 파도에서 힘찬 생명력을 느끼고
헤어진 옛 벗과의 아련한 추억이 서리 서리 피어 올라 회상에 잠깁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나를 멈춘다
옛 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
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
돌아 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어쩐지 서글픈 정조에 더하여 청량하고 개운한 느낌을 가집니다.
이런 느낌은 고대교수 이숙자화가의 보리밭의 이브 연작에서
굵어가는 보리알로, 임신한 여인의 배처럼 보리이삭을 베고 있습니다.
청맥의 청신한 색감과 황금빛으로 영근 보리이삭은 성장과 풍요의 상징입
니다. 보리밭에 누드로 등장하여 바깥의 구경꾼을 바라보는 이브의 시선은
당당하기만 합니다. 시골 출신의 악동들이 제일 낭만이라고 거품물고 우겨
대는 보리밭에서 정사를 가진 처녀총각 남여보다 더 당당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未堂 서정주 시인의 문둥이는 오직 병이 낫기만을 지상의 과제로 삼는 문둥
이와는 달리 먹물먹은 문둥이는 보리밭에 달뜨듯이 이성으로 양심이 밝아지
면 아가의 붉은 피로 되살아난 천형의 몸을 붉은 눈물로 후회합니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이 시는 전 5행에 불과한 짧은 형식이지만, 언어의 관능적 용법과 생명 현상
에 대한 집착으로 대표되는 생명파 시인으로서의 미당의 초기 시 세계를 잘
보여 주는 작품입니다. 먼저, 피를 토하듯 우는 슬픈 울음을 ‘꽃처럼 붉은 울
음을 밤새 울었다.’로 표현한 데서 언어의 관능적 용법을 찾아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꽃처럼 붉은 피가 배어나는 처절한 울음에서는 단순한 감각적 차원
을 넘어선 근원적인 체험 의식까지 갖게 해 줍니다.

그리고 생명 현상에 대한 집착은 ‘애기 하나 먹’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어둠
속에서 숨어 살며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쉽게 드러내지 못하는 ‘문둥이’는
그저 ‘해와 하늘빛이’ 서러울 뿐입니다. 그러므로 해와 하늘빛이 있는 대낮
거리를 마음껏 활보하며 살아가는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는 그는 살기 위한
원초적 욕망으로 ‘애기 하나 먹’음으로써 병을 고치려 하지만, 이 같은 생에
대한 집념이 부도덕함을 깨닫고, 마침내 자신의 숙명적 운명에 대한 몸부림
으로 인하여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작품은 시인의 체험이 아닙니다. 그러나 시인의 풍부한 상상력과 함
께, 인간성이 파멸된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성이 회복된 건강한 삶을 희구하
는 그의 강한 생명 의식이 이 <문둥이>를 낳게 한 것입니다.


한하운의 "보리피리"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던
고향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還)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 ㄹ 닐니리.

작자는 나병 환자로서의 비통과 울분과 괴로움을 시적 여과 장치를 통하
여 극복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고독 속에서 고향과 어린 시절 그리고 세상사가 그리워 보리피리를 부는
시인의 글은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청운의 뜻이 어허, 천형의 문둥이가 되고 보니 지금 내가 바라보는 세계란
오히려 아름답고 한이 많다. 아랑곳없이 다 잊은 듯 산천 초목과 인간의 애
환이 다시금 아름다워 스스로 나의 통곡이 흐느껴진다. 나를 사로잡는 것,
그것은 울음 속에서 터지는 모든 운율이 나의 노래가 되고 피리가 되어 조
국땅 흙 속에 가라앉을 것이다."

나병으로부터 오는 절망과 세상 사람들과 유리된 채 유랑생활을 해야 하는
제1연에는 새파란 보릿대를 꺾어 피리를 만들어 불던 옛날 고향의 봄 언덕
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제2연에서는 보리피리를 불면서 떠오르는, 유년 시절의 고향 - 꽃동산과 청
산 -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그렸습니다.
제3연에서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던 거리와 뭇 인간들의 삶과 일을 그리
워하고 있습니다.
제4연에서는 자신이 방랑하던 여러 산과 강, 그 눈물나던 언덕들에 얽힌 한
맺힌 비애의 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시의 음악성은 '보리피리 불며', '피 - ㄹ 닐니리'를 반복함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이 보리피리 소리는 화자의 가슴속에 추억, 그리움, 향수와 병으로
인한 고통까지를 진한 감동으로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배고픈 보리고개의 이야기입니다.
조상 전래의 오랜 속담으로 제일 높은 고개는 보리고개라 하였습니다.
이 지음의 젊은 사람들은 당해 보지 않은  모르는 낯선 말입니다.
보리고개는 옛날 백성들이 가을에 쌀추수를 하는데 저장한 쌀이 다 떨어
지면 먹을 것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다음 추수인 보리추수를 하기까지 기
다려야 합니다. 쌀 떨어지는 그때부터 보리 추수할때까지 먹을것이 없어
서 어른 아이 할것 없이 배고프고 어려운 시절을 지내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덜 익은 보리라도 베어다가 쪄서 말린 보리쌀로 밥을 지어 배
고픔을 면하였습니다. 이것이 유사 이래로 이어져온 서민생활의 어려운
실상이었습니다. 1960년대 이후에야 이러한 배고픔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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