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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조선 제일의 작곡가 김순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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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농민 함께 부른 ‘빨치산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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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사범 재학 시절 전교생 앞에서 피아노 독주회 모습. <김세원 제공>

“애국가 혁신운동.
가장 절실한 문제의 하나인데도 불구하고 그 보수적인 태도에서 혁신이 못 되고 있다. 적어도 일국의 애국가가 타국의 가요로써 대용될 수 없을 것이며 더욱 보수적인 민족주의자들이 이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음악에 무지한가를 폭로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가요가 아닌 안익태씨 작곡도 역시 8·15 이전 것이며 야소찬미가조로 된 것이어서 그 멜로디나 리듬에 있어 예컨대 마르세즈 같은 애국적인 감격이 표현되지 못한 작품이라는 것은 시위행렬시에 애국부인들이 겨울밤에 부르고 다니는 처량한 소리 같은 것임을 들어 알 것이다.”

‘인민항쟁가’ ‘해방의 노래’ 등 100여 곡
<예술연감> 1947년 판에서 박영근(朴榮根)이 말하는 ‘음악계’ 진단이다.
“본래 이 곡이 ‘그리운 옛날’을 추억하는 노래였는데 일제시대에는 송별가로 졸업식에서 부르는 노래였음은 다 알 것인데 선배가 우연한 기회에 음악에 대한 상식부족으로 정한 것을 보수적으로 망국 당시의 추회로 그냥 부르고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봉건·종교적 잔재인 애국가(특히 안익태 작곡)과 김순남 작곡인 ‘해방의 노래’를 비교해 보면 잔재 여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항일투쟁에 몸 바쳤던 민족주체세력이 모인 자리에서는 반드시 불렸던 ‘해방의 노래’였다. 임화(林和)가 쓴 노랫말이다.

1.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보아라
우렁차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을
시위자가 울리는 발굽 소리와
미래를 고하는 아우성 소리
2. 노동자와 농민들은 힘을 다하여
놈들에게 빼앗겼던 토지와 공장
정의의 손으로 탈환하여라
제놈들의 힘이야 그 무엇이랴

김순남(金順男)이 북조선으로 간 것은 1948년 4월이다. 48개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가 열릴 때였는데, 체포령이 떨어져 있었다. ‘인민항쟁가’며 ‘해방의 노래’ 같은 빨치산 노래를 만들었다는 죄목이다. ‘한라산 빨치산 노래’ ‘오대산 빨치산 노래’ 같은 김순남이 작곡한 빨치산 노래며, ‘우리의 노래’ ‘독립의 아침’ ‘농민의 노래’ ‘청총가’ ‘여맹가’ ‘인민의 소리’ 등 100곡이 넘는다.

김순남이 만든 빨치산 노래는 야산대나 인민유격대 같은 빨치산들만 부르는 게 아니었다. 노동자도 부르고 농민도 불렀다. 어른도 부르고 아이들도 불렀다. 일제와 그 졸개들에게 고통받던 피압박·피착취 대중들이 목이 터지도록 불러보는 ‘인민의 노래’였다. <나의 아버지 김순남>을 보자.

“나는 강동정치학원 원장으로 있던 박병률입니다. 나는 여기서 순남 선생의 따님을 만나게 되어 아주 감격스럽습니다. 순남 선생은 1948년 강동정치학원에 오셔서 많은 문화사업을 하셨습니다. 순남 선생은 눈이 빛나고, 불 같은 성격에 천재이셨습니다.”

박병률 선생님은 82세라고 하셨다. 그런데도 눈이 반짝이고 말씀하시는 기억력에는 총기가 엿보였다. 박 선생님은 아버지의 노래를 수도 없이 부르셨다. 참으로 감격스러웠다.

89년 9월 김세원이 아버지 자취를 찾아 모스크바에 갔을 때였다. 아버지가 연구원으로 다녔던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에도 가보고, 그 안에 있는 볼쇼이 홀 아버지가 앉았던 걸상에도 앉아보며 아버지를 그리워하던 김세원은 또다시 슬픈 울음을 터뜨린다. 극작가 함세덕(咸世德)이 작사하고 김순남이 작곡한 <산사람> 이야기를 들을 때였다. 제주도 4·3이야기였다. 그때 강동정치학원에는 4·3을 목대잡았던 김달삼(金達三)도 있었다고 하였다.

“작곡이야 순남 선생이 세계적이잖소. 빨치산노래는 모두 순남 선생이 작곡했지요.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순남 선생은 세원 선생처럼 양머리(곱슬머리)였소. 눈 있는 데가 순남 선생과 비슷합니다. 아버지 모습이 있어요. 순남 선생은 아주 정열적이셨습니다. 온화하고 강했지.”
박병률은 그러면서 두 손을 흔들며 열렬히 ‘제주도 빨치산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한라산 깊은 골짝 우리의 진지
아- 아- 제주도 빨치산은
아- 조국의 자유를 지킨다
침략을 반대하고 일떠선 동포
우리는 삼천만의 아들과 딸이다

김세원은 차이코프스키 음악원 연구원 입학원서를 보았다. 러시아말로 된 간동한 자필 이력서였다. 김순남은 1952년 여름에 모스크바로 가서 러시아말을 공부하였고, 정식 입학을 한 것은 12월 23일이다. 이력서 뒷장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서 보낸 소환명령장이 붙어 있었다. 김순남 운명을 갈라버린 종이쪽이었다.

“시인 임화에 이어 이태준(李泰俊), 김남천(金南天), 이원조(李源朝) 등 문인 그룹과 작곡가 김순남, 연극인 황철(黃澈) 등 월북 예술인들이 무더기로 검거돼 조사를 받았다. ‘문화혁명’ 식으로 소부르주아사상과의 투쟁이라는 간판 밑에 남로당파의 월북 예술인들을 말살하는 숙청작업의 일환이었다. 이 숙청작업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김일성 수상을 비롯, 당·정 고위 인사들 대부분이 소속 정파를 초월해 이태준, 김순남, 최승희(崔承喜) 세 사람을 ‘우리 조선민족을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천재적인 예술가들’이라며 공·사석을 가리지 않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강상호(姜尙昊, 1909~?) 증언이다. 그때 내무성 부상이던 강상호는 ‘소련파’ 간부 가운데 하나였다. 강상호는 “박헌영·이승엽 간첩사건은 김일성의 뜻에 따라 박금철, 박창옥, 박정애, 박영빈 등이 추진한 정치공작의 결과이다”라고 말했다. 이들 월북 예술인은 박창옥, 기석복, 정률, 정국록, 박길룡, 전동혁 같은 소련파 간부들과 어울려 탁주를 마시며 일제하 조선예술인들의 항일투쟁 등에 대하여 토론하기도 하였다. 강상호도 빠짐없이 끼어 있었다.

이태준·최승희와 함께 ‘3대 예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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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니다치 대학 유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한 김순남(맨 오른쪽). <김세원 제공>
“이들은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남조선에서 추억을 회상하면서 ‘우리는 봉건주의 잔재가 있고 친일파들이 설치는 사회(남조선)에서는 주체성 있는 예술을 진흥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사회주의 사상이 선진사상이고 사회주의운동만이 예술의 본질을 살릴 수 있다는 신념으로 월북했다. 특히 우리의 이 같은 진보적인 예술활동은 애국자 박헌영 동지가 충분히 보장해줄 것이라고 믿고 그를 따라 공화국으로 올라왔다. 그러나 막상 올라와 보니 처음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크게 사정이 달랐다’며 자신들의 월북 자체를 후회하기도 했다.

이들은 특히 ‘당이 모든 작품활동을 사상의 테두리 속에 너무 맞추려 하다 보니 예술활동이 억압받게 된다’면서 ‘이런 환경에선 올바른 예술이 발전할 수 없다’고 친빨치산파 찬양 위주의 풍토에 노골적인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아울러 이들은 ‘이제 공화국에서도 해외에서 빨치산운동을 했던 사람의 항일운동만 추켜세우지 말고 국내의 일본놈들 밑에서 모진 탄압을 받으며 항일운동을 했던 국내파나 박헌영 동지의 불굴의 애국정신도 함께 인정해주는 풍토가 되어야 한다’는 등 ‘박헌영 찬양론’도 잊지 않았다.”

이들이 한 말과 움직임이 당에 보고된 것은 물론이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고자는 박창옥이 틀림없다고 보는 강상호이다. 53년 봄 어느 날 새벽 권총으로 무장한 내무서원 3명이 이태준을 끌고가 사상검토를 할 때였다고 한다.

“박헌영을 어떻게 생각하나?”
“그의 정치노선을 지지했다. 민족통일을 위해서는 그의 혁명노선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
“해방 후 서울에서 미제들의 앞잡이 노릇을 했지 않았는가?”

“해방의 공간에서 서울은 다소 우왕좌왕했다. 그러나 미국의 간첩활동을 한 적은 결코 없으니 날조하지 말라.”

이태준은 이승엽 등 남로당 핵심간부 12명의 재판이 끝난 다음 산골 협동농장에 끌려가 감자재배 등 막노동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산간 협동농장 부근 외딴집에서 병들어 돌아간 것이 60년대 초였다. 김순남도 이태준과 거의 같은 시기에 연행되어 사상검토를 받았다. 강상호의 증언이다.

“당·정 고위 간부들과 외국 귀빈들이 참석한 연회석상 등에서 그의 즉흥적인 피아노 독주는 가위 천재적이었다. 1948년 9월 중순, 평양 시내 모 음식점에서 남로당파 간부와 월북 예술인 등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박헌영의 부수상 겸 외무상 등용 환영연회가 열렸다. 이태준 선생의 축사와 임화의 축시에 이어 이승엽의 건배 제창으로 환영연회가 점점 무르익어 가고 있을 즈음 김순남이 박헌영을 환영하는 즉흥 피아노 독주를 연주, 분위기를 절정으로 몰아넣었다. 이 피아노 독주가 훗날 그에 대한 숙청 구실이 됐다. 그에게는 동료 월북 예술인들처럼 지하감옥에 감금해 조사한 후 산간오지로 정배 보내지 않고 창작 금지만 내려졌다.”

10년간 폐결핵 앓다 1982년쯤 숨져
김순남과 가까웠던 전 문화성 부상 정률(鄭律, 본명 정상진, 1918~ ) 증언이다.
“53년 봄 창작 금지 명령을 받고 2년여 집에 박혀 있던 김순남이 54년 말 우리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는 ‘선생님, 예술가에게 창작 금지는 사형이나 다름없습니다. 먹고 자고 숨만 쉬는 동물 같은 생활이 계속된다면 차라리 대동강 물고기 밥이 되겠습니다’라며 빗물 같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를 그대로 방치해 두면 자살을 택할 것 같았습니다. 나는 ‘좋은 곡을 창작하면 당에서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니 춘향전을 가극으로 만들어 발표하자’고 제의했지요. 춘향전을 가극으로 만들던 중 당에 알려져 중단됐습니다.”

김순남처럼 월북한 작곡가에 안기영(安基榮)과 이건우(李建祐)가 있다. 둘 다 음악가동맹에서 함께 일했던 동지였다. 이건우는 6·28때 서대문형무소를 나왔는데, 리어카에 병든 아내와 자식 셋을 실어 친척집에 맡기고 북으로 갔다고 한다. 옥바라지 끝에 얻은 병으로 아내는 숨을 거두었고 한 살짜리 막내는 죽었으며 아들 종국은 70년대 초쯤 머리 깎고 출가하였다고 한다.


김순남이 눈을 감은 것은 1982년쯤으로 알려진다. 10년 동안 폐결핵을 앓던 뒤끝이었다는 게 ‘김순남 광신도’인 노동은 교수 말이다. 러시아로 중국으로 미국으로 아버지 자취를 찾아다니던 김순남 딸따니 김세원이 일본에 갔을 때였다. <해방일보> 기자 출신으로 남로당 마지막 조직을 추스렸던 박갑동(朴甲東, 1919~ )이 말했다.

“박헌영 선생도 김순남 선생을 매우 좋아하셨고, 김순남 선생 같으신 분은 우리 민족의 보배일 뿐 아니라 세계의 보배라고 하셨지. 세원이가 아버질 많이 닮았는데, 아버지는 얼굴에 재기가 배어나왔고 타고난 천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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