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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조선 제일의 작곡가 김순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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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처럼 불렸던 ‘인민항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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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사범학교 재학 시절 합창부를 지휘하는 김순남 <김세원 제공>

“우리의 해방이 만일 진정한 것이었더라면 금년이라는 해는 자유로웁고 원대한 기획이 실제화되는 도정에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정치적 혼란과 갈등은 여지없이 그러한 기획성을 파괴하여 왔고 몇몇의 실천은 반동적 정치성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발전이 저해되었을 뿐더러 그의 방향은 비밀주의이며 제국주의적인 역사의 역행을 하고 있기까지에 이르렀다. 남조선의 이러한 현상은 곧 문화의 발전을 억제하여 왔으며 따라서 우리 악단은 이러한 파문 속에서 헤매이고 있다.”

<백제>라는 예술전문 잡지 1947년 2월호에 조선음악가동맹 작곡부장 김순남이 쓴 ‘악단 회고기’ 첫 대문이다. 악단을 억누르고 있는 여러 비민주적·비음악적 짓거리와 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을 헐뜯는 우익 쪽 음악인들의 반음악적 짓거리를 안타까워 하면서 이렇게 끝을 맺는다.

“창작면은 현실적 조건으로 말미암아 활발히 발표되지 못하였다. 다만 성의 있는 방송음악 편집이 몇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었고 기타는 수많은 작품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발표되지 못하고 있다. (…) 우리 조선의 민족음악 수립을 담당하는 창작활동이 이와 같이 여의치 못하게 현실적 제조건에 구애되고 있음은 참으로 유감천만이다. 우리의 민족음악은 과학적이며 진실성을 갖춘 창작이 모든 연주활동과 더불어 발전하여 나가는 데서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니 이 점으로부터 우리 악단은 참된 발전을 갖추어 국제적 의의에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음악가동맹 작곡부장
8·15를 맞으면서 좌우 대립이 깊어졌다고 하는데, 그 속내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른바 세계관의 골칫거리였다. 민족과 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골칫거리를 놓고 두 갈래로 나뉘어지는 것은 마땅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니, 사물과 현상을 바라보는 눈 제 몸이 달랐던 탓이었다. 을사늑약부터 40년에 걸친 일제식민체제를 씻어내고 새로운 민족국가를 이룩하는 길에서 날카롭게 맞서게 된 두 갈래였다. 혁명노선과 수구노선이 그것으로, 민족주체세력과 반민족친일세력 사이 쟁투사는 정치동네 쪽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음악동네 또한 두 갈래로 나뉘었으니, ‘교향악협회’와 ‘조선음악가동맹’이 그것이었다.

러취 미군정 장관을 명예회장으로 모시고 1946년 9월 15일 생겨난 ‘교향악협회’에는 이사장 현제명, 사무국장 김관수, 그리고 김성태·임원식·전봉초 등 회원이 48명이었다. ‘조선음악예술의 질적 향상과 차에 관한 사업의 발전을 추진함으로써 목적함’이 강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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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러시아 유학 시절 허진과 함께. 왼쪽이 김순남. <김세원 제공>
1945년 9월 10일 79명으로 비롯한 ‘조선음악가동맹’ 회원과 강령이다. 위원장 김재훈. 부위원장 안기수. 서기장 신막. 총무부장 박영근. 사업부장 최창은. 작곡부장 김순남. 연구부장 정종길. 중앙집행위원 김재훈, 안기영, 신막, 정종길, 김순남, 이건우, 이범준, 최창은, 박영근, 정영모, 김훈, 노창진, 신용팔, 강장인, 하길한, 김창섭, 박남수, 노광욱.

강령 1. 일본제국주의 잔재음악의 소탕을 기함. 1. 봉건주의적 유물음악의 청소를 기함. 1. 국수주의적 경향을 배격함. 1. 악단의 비민주주의적 세력의 구축을 기함. 1. 음악의 민족적 유산을 정당히 계승하고 외래음악의 비판적 섭취를 기함. 1. 진보적 민주주의 민족음악문화의 건설을 기함. 1. 국제음악과의 교류협조를 기함.

김순남(金順男)은 1917년 서울 낙원동에서 태어났다. 본이름 현명(顯明). 어렸을 적부터 덕수보통학교 교사였던 어머니한테 피아노를 배웠다. 14살에 교동보통학교를 나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와 경성사범학교 두 군데에 합격하였으나, 경성사범학교에 들어갔다. 1935년 경성사범학교와 1937년 경성사범학교 연구과를 마친 다음 잠깐 보통학교 교사를 하였다. 같은 해 ‘한 트렁크의 작곡 작품을 가지고’ 일본 동경으로 가서 구니다치 음악학교에서 작곡 공부를 하였고, 동경제국음악학원 작곡과를 나왔다.

가곡집 ‘산유화’ ‘자장가’ 펴내
1944년 귀국하여 ‘성연회’라는 지하써클에서 프롤레타리아 음악운동을 목대잡았다. 같은 해 교사였던 문세랑(文世娘)과 혼인하였고, 다음 해 7월 1일 무남독녀인 세원(世媛)이 태어났다. 1945년 9월 조선음악가동맹 일을 하면서 평론 ‘음악’과 ‘조선작곡계의 신발족’ 발표. 46년 순수아카데미즘을 파고드는 ‘음악가의 집’ 동인으로 여러 작품을 발표하였다. 47년 10월 우리나라 첫 음악교과서인 <임시중등음악교본>에 ‘건국행진곡’이 실렸고 가곡집 <산유화>를 펴냈다. 48년 가곡집 <자장가>를 펴냈는데, 이 가운데 2편 자장가는 딸 세원을 위하여 스스로 시를 써서 곡을 붙인 것이다.

잘 자거라 우리 아기 귀여운 아기
엄마 품은 꿈나라의 꽃밭이란다
바람아 부지 마라 물결도 잠자거라
아기 잠든다 우리 아기 꿈나라 고개 넘으면
엄마의 가슴 우에 눈이 나린다
잘 자거라 우리 아기 착한 아기야
뒷동산에 별 하나 반짝여준다

잘 자거라 우리 아기 귀여운 아기
엄마 품에 고이 안겨 어서 잘자라
사나운 가마귀떼 모진 바람 몰아다 너를 울린다
너 자라서 이 겨레의 햇빛이 되어
엄마의 이 눈물을 씻어주렴아

흘러가는 것은 강물만이 아닌가. 김순남이 오도독오도독 소리가 나게 꼭꼭 깨물어 먹고 싶을 만큼 너무도 사랑홉던 딸 세원은 42살 중년이 되었다. 아버지 핏줄을 이은 것인가. 라디오 음악프로 진행자로 물망 높은 성우 김세원은 아버지한테 편지를 쓴다. <가정조선> 89년 1월호.

(… 어느날 밤 제가 국민학교 1, 2학년쯤이었을 겁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제가 잠든 줄 알고 작은 소리로 말씀하고 계셨어요. 그 내용은 아버지의 불 같은 성격, 아버지가 교동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사범과 제일고보(지금 경기고), 이 두 일류학교를 다 합격하자 교장선생님이 아버지를 업고 운동장을 다섯 바퀴 돌았다는 이야기, 아버지에 대한 원망, 그리고 나의 어린 가슴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아버지가 유명한 <산유화>를 만든 월북 작곡가라는 얘기였습니다. 그날 이후 ‘김순남’은 절대 입 밖에 내지도, 나의 아버지라 밝힐 수도 없는 이름이란 걸 알았습니다. 그건 감옥살이와도 같았어요. 더구나 어린 나이에 그 비밀을 지키기란 너무나도 벅찼습니다. 때론 나도 딴 아이처럼 아버지 자랑을 하고 싶었으니까요. 다른 아이들 다 가지고 있는 눈깔사탕을 나만 안 가지고 있어 처마 끝에 쪼그리고 앉은 작은 아이 같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산처럼 쌓여 갔습니다. 통일이 되면 만날 수 있겠지… 아버지의 손도 만지고 얼굴도 만져보고 싶었습니다. (…)

아버지, 모스크바에서 아버지를 만난 쇼스타코비치는 동양에도 이런 귀재가 있었느냐고 했다죠? 미군정 때 음악고문 헤이모워츠는 ‘조선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라는 글을 남겼다고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오히려 저를 더 가슴 아프게 만듭니다. 일찍이 숙청되어 창작활동을 못하셨다니, 상처받았을 자존심을 생각하면 제 가슴이 저려와요. (…)

김세원이 아버지 자취를 찾아 모스크바에 갔을 때였다. 89년 9월. 아버지 사진을 보게 된 김세원은 왈칵 울음을 터뜨린다. <나의 아버지 김순남>에 나오는 김세원 글이다.

“소련에 와서 아버지 얼굴을 처음 보는 것이다. 그 사진 속에는 날카로운 코와 넓은 이마와 아주 약간의 미소띤 입술, 그리고 외로움이 배어 있는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가 있었다. 조각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갑자기 솟구치는 눈물을 손으로 막았다.”
아버지는 북한으로부터 소환장을 받고 평양으로 가기 며칠 전, 운명이 달라질 것을 전혀 예측도 못한 채 이 사진을 찍고 잠깐 다녀오마며 가서 숙청을 당하고 말았다. 허 선생님은 아버지보다 아홉 살 아래였다. 이북에서도 서로 알고 지냈지만, 특히 소련 유학 때 더욱 가까웠다고 한다. 허 선생님은 바로 어제 일인 듯 말씀하셨다.

“그분은 참 하이칼라였어요. 생각이 하이칼라죠. 즉흥 연주곡은 따라갈 사람이 없었어요. 하차투리안이 김 선생의 곡을 편곡해서 발표도 했지요. 하차투리안은 김 선생을 이북에 보내는 것은 죄악이라고 했어요. 6개월 만이라도 자기와 더 같이 있게 해달라고 했지만 결국 소환당했지요. 그분은 정열적이었어요. 흥분을 하면 말이 막 빨라졌지요.”

무남독녀 김세원씨 성우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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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부민관에서 열린 제1회 작곡발표회 시상 후 기념사진. 맨 오른쪽이 김순남. <김세원 제공>
평양과 소련 합작으로 문을 연 평양식당으로 가는 차 속이었다. 허진은 두 손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시늉을 하면서 김순남 노래를 불렀다. 너무도 서정적이면서 또 전투적으로 힘찬 노래였다. 러시아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작곡가 하차투리안이 편곡한 김순남 곡이었다. 허진이 말하였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예술가란 이 세상에 다시 나올 수 없는 거거든요. 바로 그 예술가는, 때문에 그분이 작곡한 것은 남는 것입니다. 그가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만큼 민중에게 손해로 남는 겁니다. 따라서 예술가나 작가에 대해서는 사상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정치가야 얼마든지 나오죠. 물론 좋은 정치가가 나오면 행복한 일이지만, 정치는 뜻만 있으면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예술은 생각만 가지고는 안 되는 일이죠.”

“전 아버지의 음악을 들으면 첨 듣는 것 같지 않아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 중의 하나인데… 정확하게 곡도 모르고 가사도 모르고… 그저 감정만 좀 내보겠어요… 고향은 하늘가 아득히 멀고, 덤불길 헤치며…”
허 선생님은 눈을 감으며 열심히 불렀다. 워낙 노래를 잘하고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시는 분 같았다.

“가사가 전혀 안 돼. 한없이 서정적이고…”
허 선생님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안타까워하셨다. 나는 그저 고수가 장단 맞추듯 한숨만 쉴 수밖에 없었다.
“김순남 선생 하면 당시 소년단으로부터 직업적인 가수까지 누구할 것 없이 다 부르던 노래가 있습니다. 아마 북한 땅에서는 아리랑이나 도라지 못지않게 널리 알려져 있었고, 내 알기로는 한국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김순남이 조선인에게 ‘조선 최고의 작곡가’로 알려지게 된 것은 ‘인민항쟁가’였을 것이다. 1947년에 나온 이 노래는 남북조선 모두에서 애국가처럼 불리었다. 임화(林和)가 쓴 노랫말이었다.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는
우리의 주검을 슬퍼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
그렇게 죽엄을 맹서한 깃발을

<김성동>
1 Comments
찬송가 2015.02.24 11:39  
임용준비중에있는데 선생님을 잊을수가 없습니다
선생임의 음악인생멋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