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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집념(執念) - 이상근교수의 음악세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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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집념(執念) - 이상근교수의 음악세계 –

처음으로 이상근교수를 만나게 된 것은 꽤 오래전의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까 해방 이듬해인가? 당시 구(舊)6년제 마산중학에 필자가 있었고, 마산여중에 이교수가 재직하고 있었을 때였다. 마산여중에서 연구발표회가 있어서 참관하러 가게 되었고, 그때에 처음으로 그의 음악수업을 통하여 그를 알게 된 것이 오늘까지 30유년(有年)을 알고 지내게 된 기연(奇緣)이라고 생각한다.
그때에 놀란 것은 가창 교재가 그의 자작곡이었다는 것과 그후로 널리 애창되고 있는 합창곡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들었을 때였다. 지금도 아직은 그 타당성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그 당시는 우리 가곡이 찬송가조(調)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무렵이었던 만큼 그의 <한국적 발상>은 내게 놀라움을 안겨 주었다.

내자신 아직 음악에 대한 분명한 주장이나 자각을 가지지 못하였던 시기였기에, 나이는 몇살 연장 밖에 되지 않는 터였으나, 음악에 있어서는 훨씬 앞질러가고 있었으므로 그로부터 여러가지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것은 지금도 여전한 것으로 느껴진다. 그때 그는 이미 포레, 듀파르크, 드뷔시 등의 프랑스 가곡에 심취해 있었고 그 귀한 SP반(盤)을 틀어서 들려주고 하던 것이 기억에 새롭다.

그는 그후 49년 고향의 진주사범학교로 옮겼다가 51년 9월에 다시 마산으로 돌아와서 마산여고에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때 이 학교에는 소프라노 김경애(金慶愛)여사(현재 부산여자대학 교수)가 재직하고 있었다. 작년에는 이 김교수가 회갑을 지냈고 올해는 이교수가 회갑을 맞았으며, 몇년 후에는 필자 또한 이 갑을 맞게 되는데, 지금도 20대의 이 젊음의 기이한 만남을 그것도 그후 30년을 두고 친교할 수 있는 계기가 된이 만남을 생각하면 그 감회가 너무도 크다.
그의 값진 가곡은 실로 이때부터 터져나오기 시작하였는데, 클라라를 맞은 슈만의 고사(故事)와는 다르다 할지라도, 유능한 소프라노의 존재가 그로 하여금 가곡에 몰두하게 한 원인(遠因)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김춘수(金春洙)의 시에 의한 가곡집 「구름과 장미」, 「늪」, 「가을 저녁의 시」 등도 이 무렵의 작품으로 기억된다. 시인 김춘수씨는 그때 마산중학에 재직하고 있었으니, 이 또한 뜻있는 만남이기도 했던 것이다.

<제1회 이상근 작곡발표회>는 이때에 있었는데, 발표장은 부림(富林)극장이었다. 물론 노래는 김경애가, 피아노는 내가, 그리고 바이올린은 전 부산시향의 악장이었던 김진문(金鎭文)이 각각 맡게 되었는데, 위에 든 가곡이나 「피아노를 위한 전주곡」을 접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참신한 작풍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전문적 얘기가 되겠지만, 독일을 중심한 고전 낭만파의 삼화음 조직을 바탕한 음악에만 접하고 있던 우리에게는 인상주의적 작곡가들이 애용한 4도 조직의 화성을 원용(援用)하여 한국적인 것을 시도하고 있는 그의 음악은 참신할 수 밖에 없었다. 가사처리에 있어서도 한국적이라기보다는 현대적인 감각과 리듬, 그리고 낭독조의 슈프레히 클 등의 양식을 채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그때 마산제일여고 교사 최인찬(崔仁讚)씨(현재 안동대학 교수)와 더불어 가히 4인조를 이루어 새로운 음악에 대한 관심과 이해와 추구에 열을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 이 글은 본래 제갈삼선생이 이상근선생의 회갑을 축하하기 위하여 『輪座』 제 13집 (문성출판사 1982)에 기고한 것이다. 이 글을 여기 그대로 싣는 것은 최근 수삼년동안 여러 음악잡지에 <이상근의 삶과 작품>이란 제호로 소개된 짧은 글들이 모두 이 글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중앙에 있는 음악인들이 새로운 음악에 대하여 그다지 활발한 반응을 보이지 않던 시기였으나, 마산이란 지역이 NHK 가청지역이어서, 우리가 종전후 일본을 휩쓸고 있던 현대음악에 대한 계통적인 교양 프로를 자유로이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고, 고무적이었다. 또 미군들이 팔고 간 구형 녹음기로 그런 방송들을 녹음하여 듣는 감격은 지금 청년들이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1953년의 일이다. 그는 부산고교로 자리를 옮겨갔는데, 아직 마산에 머물고 있던 내가 무슨 일로 부산의 그의 집(부고 김하득金夏得교장의 사택 일부)을 찾은 일이 있었는데. 이때는 그 학교에 동직중(同職中)에 있던 지금은 고인이 된 박용규(朴龍圭)선배와 동석하여 소주잔을 바꾸면서 정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후 마산의 4인조는 모두 부산으로 모이게 되었는데, 김여사는 구 부산사대로, 최인찬씨는 동래여고를 거쳐 남성여고로, 나는 부산여중을 거쳐 경남여고로 각각 자리잡게 되었고, 이교수는 다시 구 부산사대로 옮기게 되었다. 이무렵 그는 서울에서 <관현악작품 발표회>를 가지게 되었는데, 연주는 서울 시향이 맡았고 이것이 아마도 한 작곡가에 의한 관현악작품의 단독 발표의 효시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때에 발표된 것이 「세폭의 그림」, 「피아노 협주곡 1번」, 「교향곡 2번」등이며, 4악장제 교향곡의 발표도 아마 이것이 처음인상 싶다.
이보다 앞서 김생려(金生麗) 지휘의 해군교향악단의 연주로 그의 「한국선율에 의한 서완조(徐緩調)」가 발표되었는데, 이 곡은 여러 차례 연주되었을 뿐 아니라 작년에는 임원식(林元植) 지휘로 또다시 연주되었고 금년에는 작곡자 자신의 지휘로 연주된다고 하니, 그에 대한 기대가 크다.

그는 1959년 교육사절로 와있던 피바디대학팀과의 연계로 60년까지 미국으로 유학하게 되는데 이는 그의 작품활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중요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도미전의 작품을 초기로 삼는다면 그것은 하나의 모색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유학은, 불혹의 연령에 접어든 그의 인간적인 성숙과 더불어, 음악에 있어서의 서구적 이론적인 기반을 한층 굳게 다지는 계기가 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과연 그후의 그의 작품에서는 다분히 논리적인 구성이 강하게 나타나는 듯 하였다. 그러면서 서구적인 구성과 한국 고유악기와의 대비를 꾀한 <조우>(遭遇) 1·2·3·4곡이 시리즈를 이루게 된다. 가곡에서는 고청마(故靑馬)의 시집 <아가>(雅歌)를 음악화한 것이 그의 연륜을 말해주는 듯 하다. 근년에 와서는 합창곡 <청산별곡>(靑山別曲), 칸타타 <분노의 물결> (金泰洪詩) 등에서 역작을 낳았고, <무악> 1·2곡이 발표되고 있으니 우리는 여기서 그의 한국적 정신세계에 대한 집념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창작이란 내용과 방법에 있어서 자기세계를 구축하지 않고서는 견디기 어렵다는 것은 다 잘 아는 사실이나, 이미 서구인들이 웬만한 실험은 다 해버린 현시점에서 자기를 남달리 지탱한다는 것은 지난(至難)의 작업이 아닐 수 없는데, 교직에 있으면서도 거의 해마다 신작을 내놓고 있음을 볼 때에 참으로 그 정력과 “음악을 향한 끝없는 집념”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 한국적인 정서의 본질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문제에 논급된 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는 그것은 한(恨)이 아니겠는가 하였으니 우리는 그의 탁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쓰다 보니 <작가론>도 아니요 <인물론>도 아닌 모호한 글이 되어버린 것 깉다. 사실 현재의 나로서는 그의 인간이나 작품세계를 객관적으로 체계화할 수 있는 처지가 못된다. 그저 비교적 그와 가까이 지내오면서 옆에서 넘어다 본대로 시력(時曆)을 따라서 적어 본 것이다. 그러나 이순(耳順)에 접어든 그이지만, 항상 학생들에게 얼러주었듯이 그는 성실과 근면을 에누리없이 실천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여기서 빠트릴 수 없는 것은 그의 교육인으로서의 면모이다. 그의 교육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정열 그리고 솔선수범은 이미 정평이 나 있는 것이다. 흔히들 그를 성급하다고 하지만, 「가을 저녁의 시」를 작곡했을 무렵에 “10년후에 보자”고 한 그의 말을 상기한다면 그가 얼마나 시대에 앞서가는 미래지향적인 인간인가를 알 수가 있고, 그의 가곡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더욱 이해되고 불려질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또 더러는 그를 직선적이고 무뚝뚝하다고도 한다. 때로는 그런 일면때문에 둘레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고 필요없는 오해를 가지게 되는 것도 사실이나, 이제 그는 반백머리의 고담(枯淡)함과 더불어, 옛 고속(高俗)들이 지녔던 그 격조높은 직선처럼 주위사람들을 오히려 흐믓하게 하고 아무런 허식없이 대할 수 있게끔 하는 그런 원숙의 계절로 접어들었음을 느끼게 한다.

여기에서, 그의 작품을 그 영역별로 정리해 보는 것도 뜻이 있으리라고 믿어져서 작곡자의 힘을 빌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
모두 61곡이 되는데, 18살을 기점으로 하여도 한 해에 평균 1.5곡을 작곡한 셈이 된다. 그리고 그중 27곡이 연주되었다는 것은 한국 작곡가로서는 드문 행운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상근 년보)

1922.1. 경남 진주 태생 - 가족상황·부모?
1940.3. 진주 공립중학교 졸업
1943.6. 일본 동경음악학교 전과 수학
1955.5. 구제 부산사범대학 전임강사
1958.10. 구제 부산사범대학 부교수
1959.12. 제3회 부산시 문화상(음악)
1960.1. 녹조 소성 훈장
1960.8. 미국 죠지 피바디 대학원 수학
1960.8. 미국 탱글우드 하기음악학교 수학
1962.8. 경상남도 문화공로 포상
1962.9. 부산교육대학 교수
1972.6. 제14회 눌원문화상
1972.10. 제20회 교육공로 포창
1973.4.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부교수
1975.7. 부산대학교 사범대학 교수
1975.10. 제2회 한국 작곡상
1976.1. 제23회 전국 교육공로 표창
이상근 작곡 년보
1) 가 곡
곡 명 작곡 출판 초연 기타
김안서 가곡집 「해곡」 1940
김춘수연가곡집 「가을저녁의 시」 1940 1970
유치환연가곡집 「아가」 12곡 1968 1970 82 변선엽 독창회
2) 합창곡
「새야 새야 파랑새야」 1946 1947 문교부제정 중등교재
「산」, 「나그네」, 「임」 1947 73 연대 합창단 일본대판
「사계절의 노래」 1967 1975
「청산별곡」 1975 1975 ? 연대 합창단 서울음악제 위촉작
교성곡 「분노의 물결」 1976 ? 부산 시향 개항100주년 기념위촉작
「한국의 꽃」 1977 ? 계명대 합창단
3) 피아노곡
「임프로비제이숀」 1966 1970 ? 윤미경 정진우교수 위촉작
「환상조곡」 1967 1970 ? 이경숙 정진우교수 위촉작
「프로젝션 No.1」 1974 1974 ? 이성균 이성균교수 위촉작
「프로젝션 No.2」 1981 1981 ? 제갈삼 제갈삼교수 위촉작
4) 실내악곡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네」 1947 ? 백창규·정봉렬
「현악사중주」 No.1 1949 ? 원경수·전봉초 등
「피아노 트리오」 No.1 1950 ? 안용구·전봉초·신재득
「콘체르트아트레」 1954 ? 이재현·양재표 등
「첼로를 위한 모자이크 조곡」 1964 ? 양재표 세계문화자유회 위촉작
「현악사중주」 No.2 1969 ? 서울 현사중주단 서울음악제 위촉작
「소프라노와 실내악을 위한
네 계절의 노래」 1969 ? 창악회 연주회
「2대의 가야금을 위한 조우 1/71」 1970 1972 ? 창악회 연주회
「가야금과 대금을 위한 조우 1/72」 1971 1973 ? 창악회 연주회
「소프라노와 가야금을 위한 조우」 1/73 1972 1974 창악회 연주회
「오보에와 피아노를 위한 <44321>」? 1978 1976? ? 이한성 이한성 위촉작
5) 괸현악곡
「한국 선율에 의한 서완조」 1955 ? ? 김생려지휘·해군교향악단
「팀파니와 현을 위한 콘트라스트」1956 ? ? 한국 작곡가의 밤
「세폭의 그림」 1957 ? ? 서울시향 엄경원
「피아노 협주곡」 No.1 1957 ? ? 서울시향 이노영
「교향곡 2번」 1956 ? ? 서울시향 김생려
「목관·현을 위한 희유곡」 1962 ? ? 서울시향 김만복
「교향곡 3번」 1963 ? ? KBS 임원식
「콘첼토 크롯소」 1964 ? ? 작곡자지휘·서울시향 정진우
「금관과 현을 위한 희유곡」 1965 ? ? 작곡자지휘·KBS
「교향곡 4번」 1967 ? ? 국향 오펠라 ?
「피아노 협주곡 2번」 1968 ? ? 임자향·임원식 KBS
「교향곡 5번」 1968 ? ? 김만복·서울시향(서울음악제)
「가야금·대금·관현악을
위한 조우」 1/73 1974 1975 ? 문예진흥원 위촉작
「축전 서곡」 1975 1977 ? 국향 20주년 기념 위촉작
「피리·아쟁·관현악을
위한 조우」 1/74 1976 ? ? 홍연택·국향
「무악 79」 1979 ? ? 국향 위촉작
「무악 81」 1981 ? ? 박은성지휘·KBS
[대금·가야금·현을 위한
조우」 80 1979 ? 미발표 서울음악제 위촉작
입력: 조선우 1993.7.24.


글 - 제갈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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