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이 산처럼… 슬픔이 바닷속처럼, 최영섭 작곡가의 오페라 <雲林>
<오애리의 文化데이트>-문화일보 2009-08-01
기쁨이 산처럼… 슬픔이 바닷속처럼… “오페라 雲林은 깊고 깊었던 내 인생”
마치 한편의 짧은 드라마를 본 듯했다. 오페라의 환희에 넘치는 장면이나 대규모 코러스 부분을 설명할 때 그는 두 손을 위로 치켜들거나 앞으로 쭉 내밀면서 직접 연기를 해보였다. 대사를 읊는 목소리도 한 옥타브쯤 높아져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 위기에 직면하는 장면에서는 얼굴표정이 슬픔으로 가득찼고,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는 장면에서는 절절한 몸짓을 해보였다. 20대 때 가졌던 꿈을 80세에 이룬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오롯이 기쁨일까, 시원섭섭함일까. 아니면 또다시 초조함을 느끼게 될까. 아마도 그 모든 것이 아닐까 싶다.
작곡가 최영섭(80)씨가 평생의 목표이자 꿈이었던 대작 오페라를 드디어 완성했다. 특히 올해는 첫 작곡회를 연 지 꼭 60년째 되는 해란 점에서 의미가 깊다.
7월29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인근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보기에도 무게가 만만치 않을 듯한 대형 악보집을 들고 나왔다. 오페라 ‘운림(雲林)’의 악보 사본이다. 무려 476페이지. 첫장부터 마지막장까지 과연 몇 개의 음표들이 기록돼 있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그만큼 엄청난 분량이다. 무대에 올리면 2시간30분이 넘는다. 작곡가는 지난 50여년의 세월 동안 그 음표 하나하나를 자신의 피와 땀으로 그려넣었을 것이다.
최영섭씨는 ‘그리운 금강산’ 등 수많은 가곡들과 1970, 80년대에 TV,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에서 클래식 세계를 친절하게 안내했던 해설자로 잘 알려진 이다. 요즘이야 ‘해설이 있는 음악회’ 등의 프로그램이 많지만, 당시만 해도 클래식의 대중화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음악가는 거의 없었다.
한국예술가곡진흥위원회 공동대표 등 여전히 현직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는 자신의 첫 오페라이자, 유일한 오페라가 될 ‘운림’을 무대에 올릴 새로운 꿈에 요즘 많이 설레고 있다. 첫 음표를 그려넣었을 때만 해도 20대였던 작곡가는 이제 얼굴에 주름이 깊고 흰머리칼이 무성한 노인이 됐다.
오페라 ‘운림’이 그에게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다. 노 작곡가는 다소 상투적인 질문을 받아놓고 잠시 침묵했다.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던 그는 “기쁨이 산처럼 높았고 슬픔이 바닷속처럼 깊고 깊었던 내 인생”이란 심오한 답을 내놓았다.
‘운림’의 모태는 최영섭씨가 6·25전쟁 직후 헌 책방에서 발견한 설화집에 수록된 ‘운림지’란 이야기이다. 어지러운 세상을 떠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도를 닦던 운림이 부는 피리 소리가 바닷속 용궁나라의 공주 귀에 들어가고, 공주가 바다를 거쳐 호수를 통해 운림을 찾아와 사랑을 이룬다는 것이 대략의 줄거리이다.
어찌보면 흔하디 흔한 사랑이야기에 그는 왠지 마음이 끌렸다. 인천여중에서 음악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그는 이 설화를 모태로 20분짜리 짧은 오페레타 ‘운림’을 만들어 공연했고 주변의 반응이 뜨거웠다. 오페레타를 대작 오페라로 다시 쓰는 작업은 역시 쉽지 않았다. 세월은 하염없이 흘러갔고, 3분의 1 분량밖에 쓰지 못한 상태였던 지난 2007년 덜컥 쓰러져 한달 동안이나 병원신세를 져야 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중환자실에 5일 동안, 일반병실에 한달 동안이나 입원했습니다. 제일 큰 걱정은 오페라 ‘운림’ 작곡이었지요. 죽기 전까지는 꼭 완성해야 하는데, 갑자기 조급해지더라고요. 그때 마음을 다잡았지요. 내가 광복절 50주년 기념 대작 ‘오! 사랑하는 나의 조국’도 완성해 공연한 사람인데, 오페라를 완성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하고요. 퇴원을 말리는 의사들에게 죽더라도 병원을 나가서 죽겠다고 했지요. 이후 2년 동안 바짝 매달린 결과, 지난 5월에 결국 완성했습니다. 그 사이에 네 번이나 원고를 버렸어요. 베토벤도 오페라 ‘피델리오’의 서곡을 네 번이나 찢어버리고 다섯 번째에서야 만족했다고 하더군요. 스트레스가 많았는지 요즘엔 두통에 시달리고 있어요.”
최영섭씨에 따르면 오페라 ‘운림’의 줄거리는 20% 정도만 원작 설화에서 가져오고, 나머지 80%는 그 자신이 직접 창작했다. 남자주인공 운림이 인생에 대해 고민하면서 산신령과 대결하는 부분이나, 용궁공주와의 사랑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향한 더 큰 사랑과 헌신의 의미를 깨닫고 진선미애(眞善美愛)를 실천하는 설정은 순수하게 그가 만들어낸 것이다.
“부제를 ‘사랑바다’로 붙였어요. 북한이 자랑하는 가극 ‘피바다’의 반대 개념인 셈이지요. 혼탁한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큰 사랑이란 제 자신의 철학을 담아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곡도 작곡이지만 대본을 직접 쓰는 작업도 쉽지 않았는데, 어려서부터 대작소설과 희곡을 많이 탐독해왔던 것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오페라 ‘운림’은 일반 오페라와 달리 레시타티브(대사를 노래로 처리하는 것)가 거의 없고 연극처럼 대사연기로 이뤄지는 것이 가장 큰 특징. 따라서 출연하게 되는 성악가에겐 연기력이 필수다. 동서양의 음악과 무용을 과감하게 결합했고, 특히 최영섭씨가 직접 채록한 우리 민요 ‘이별가’가 새롭게 편곡돼 가미돼 있는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이처럼 서양과 한국을 하나로 잇는 작업에 대해 그는 “내가 해놓고도 참 잘했다는 느낌”이라며 “왜냐하면 나는 한국사람이니까”라고 말했다.
작곡가 최영섭에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역시 국민가곡 ‘그리운 금강산’이다. 1960년대초 어느 날 단 하루 만에 써내려갔던 이 곡은 최영섭을 대표하는 작품이 됐다. 그는 “한상억씨의 시 원고를 처음 읽었을 때 가슴이 뭉클해졌을 만큼 시어가 주는 충격이 컸다”고 작곡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남들은 창작자로서 국민가곡으로 불리는 작품을 남겼으니 얼마나 행복하냐고들 하더군요. 사실 이 곡이 내게 명예와 경제적 부를 가져다줬지요. 하지만 여전히 분단이 계속 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큽니다. 차라리 ‘한때 한반도의 분단현실을 노래한 곡’쯤으로 기억됐더라면 하는 생각도 많이 하지요. 개인적으로는 ‘그리운 금강산’ 때문에 다른 곡들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점도 있으니, 제겐 영광이자 짐인 셈입니다.”
국민적 사랑을 받아온 작곡가에게도 회한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인생이 왜 이리 빨리 흘러가 버렸는지, 어떻게 내가 80세가 돼버렸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될 때가 있다”는 것. 30여년 전에 조강지처를 저세상으로 떠나 보냈고, 그 뒤에 찾아온 사랑에 실패했는가 하면, 4년 전엔 방송사 프로듀서로 근무하던 셋째 아들을 과로사로 잃는 일까지 겪었다. “그런 이야기는 쓰지 말라”는 그의 말에서 진한 아픔이 전해져 왔다.
“단 하루도 먼저간 아내와 아들 그리고 90세 넘어서까지 장수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기도를 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어머니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어머니, 어제 과음했어요. 죄송합니다’라고 사죄도 하지요.”
그는 아직도 이뤄야 할 꿈이 많다. 여러 단체 회장직을 정리하고 창작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낼 계획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운림’을 무대에 올리는 일이 급하다. 현재 서너 군데 민간 오페라단으로부터 공연제안을 받은 상태. 공연까지 넘어야 할 산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예술작품과 예술인을 사랑하는 국가가 진정한 문화선진국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문화에 대한 투자가 여전히 너무 인색한 듯해요. 음악가로서 우리 음악문화가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선 좀더 많은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기울여졌으면 하는 바람이 큽니다.”
aeri@munhwa.com" rel="nofollow">aeri@munhwa.com
작곡가 최영섭은
▲1929년 인천 강화군 화도면에서 출생 ▲경복고등중학교(현재의 경복 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음대 작곡과 졸업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 칼 웨스터라이히 교수에게서 지휘 사사 ▲1949년 첫 작곡발표회를 비롯해 총 5회의 작곡발표회 개최 ▲1956~63년 인천 애협 교향악단을 창립해 상임지휘자 역임 ▲1961년 ‘그리운 금강산’이 포함된 칸타타 ‘아름다운 내 강산’ 발표 ▲인천 여중고, 이화여고, 한양대, 상명여대, 세종대 등에서 교직 생활 ▲KBS, MBC, TBS, 교육방송 등의 음악방송 고정 해설자 및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 힘씀.
▲‘추억’‘모란이 피기까지는’‘목계장터’ 등 가곡 200곡, 피아노 환상곡 ‘해변의 추상’, 광복 50주년 기념 ‘오 ! 사랑하는 나의 조국’ 등 다수의 작품 작곡 ▲인천시 문화상(1959년), 경기도 문화상(1961년), MBC 방송대상(1987년), MBC 가곡공로대상(1994년), 한국음악상(1996년), 세종문화상(1998년), 서울시 문화상(2001년) 등 수상 ▲한국음악협회 부이사장, 한국작곡가협회 부회장, 한국작곡가회 회장, 서울 내셔널 심포니오케스트라 명예단장 등 역임 ▲현재 한국예술가곡 진흥위원회 공동대표, 한국예술가곡연합회 회장, 서울작곡가포럼 고문, ‘우리 가곡의 날’ 제정위원회 위원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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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이 산처럼… 슬픔이 바닷속처럼… “오페라 雲林은 깊고 깊었던 내 인생”
마치 한편의 짧은 드라마를 본 듯했다. 오페라의 환희에 넘치는 장면이나 대규모 코러스 부분을 설명할 때 그는 두 손을 위로 치켜들거나 앞으로 쭉 내밀면서 직접 연기를 해보였다. 대사를 읊는 목소리도 한 옥타브쯤 높아져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남녀 주인공의 사랑이 위기에 직면하는 장면에서는 얼굴표정이 슬픔으로 가득찼고,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는 장면에서는 절절한 몸짓을 해보였다. 20대 때 가졌던 꿈을 80세에 이룬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오롯이 기쁨일까, 시원섭섭함일까. 아니면 또다시 초조함을 느끼게 될까. 아마도 그 모든 것이 아닐까 싶다.
작곡가 최영섭(80)씨가 평생의 목표이자 꿈이었던 대작 오페라를 드디어 완성했다. 특히 올해는 첫 작곡회를 연 지 꼭 60년째 되는 해란 점에서 의미가 깊다.
7월29일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인근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보기에도 무게가 만만치 않을 듯한 대형 악보집을 들고 나왔다. 오페라 ‘운림(雲林)’의 악보 사본이다. 무려 476페이지. 첫장부터 마지막장까지 과연 몇 개의 음표들이 기록돼 있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그만큼 엄청난 분량이다. 무대에 올리면 2시간30분이 넘는다. 작곡가는 지난 50여년의 세월 동안 그 음표 하나하나를 자신의 피와 땀으로 그려넣었을 것이다.
최영섭씨는 ‘그리운 금강산’ 등 수많은 가곡들과 1970, 80년대에 TV,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에서 클래식 세계를 친절하게 안내했던 해설자로 잘 알려진 이다. 요즘이야 ‘해설이 있는 음악회’ 등의 프로그램이 많지만, 당시만 해도 클래식의 대중화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음악가는 거의 없었다.
한국예술가곡진흥위원회 공동대표 등 여전히 현직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는 자신의 첫 오페라이자, 유일한 오페라가 될 ‘운림’을 무대에 올릴 새로운 꿈에 요즘 많이 설레고 있다. 첫 음표를 그려넣었을 때만 해도 20대였던 작곡가는 이제 얼굴에 주름이 깊고 흰머리칼이 무성한 노인이 됐다.
오페라 ‘운림’이 그에게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물었다. 노 작곡가는 다소 상투적인 질문을 받아놓고 잠시 침묵했다.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던 그는 “기쁨이 산처럼 높았고 슬픔이 바닷속처럼 깊고 깊었던 내 인생”이란 심오한 답을 내놓았다.
‘운림’의 모태는 최영섭씨가 6·25전쟁 직후 헌 책방에서 발견한 설화집에 수록된 ‘운림지’란 이야기이다. 어지러운 세상을 떠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도를 닦던 운림이 부는 피리 소리가 바닷속 용궁나라의 공주 귀에 들어가고, 공주가 바다를 거쳐 호수를 통해 운림을 찾아와 사랑을 이룬다는 것이 대략의 줄거리이다.
어찌보면 흔하디 흔한 사랑이야기에 그는 왠지 마음이 끌렸다. 인천여중에서 음악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그는 이 설화를 모태로 20분짜리 짧은 오페레타 ‘운림’을 만들어 공연했고 주변의 반응이 뜨거웠다. 오페레타를 대작 오페라로 다시 쓰는 작업은 역시 쉽지 않았다. 세월은 하염없이 흘러갔고, 3분의 1 분량밖에 쓰지 못한 상태였던 지난 2007년 덜컥 쓰러져 한달 동안이나 병원신세를 져야 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말았다.
“중환자실에 5일 동안, 일반병실에 한달 동안이나 입원했습니다. 제일 큰 걱정은 오페라 ‘운림’ 작곡이었지요. 죽기 전까지는 꼭 완성해야 하는데, 갑자기 조급해지더라고요. 그때 마음을 다잡았지요. 내가 광복절 50주년 기념 대작 ‘오! 사랑하는 나의 조국’도 완성해 공연한 사람인데, 오페라를 완성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하고요. 퇴원을 말리는 의사들에게 죽더라도 병원을 나가서 죽겠다고 했지요. 이후 2년 동안 바짝 매달린 결과, 지난 5월에 결국 완성했습니다. 그 사이에 네 번이나 원고를 버렸어요. 베토벤도 오페라 ‘피델리오’의 서곡을 네 번이나 찢어버리고 다섯 번째에서야 만족했다고 하더군요. 스트레스가 많았는지 요즘엔 두통에 시달리고 있어요.”
최영섭씨에 따르면 오페라 ‘운림’의 줄거리는 20% 정도만 원작 설화에서 가져오고, 나머지 80%는 그 자신이 직접 창작했다. 남자주인공 운림이 인생에 대해 고민하면서 산신령과 대결하는 부분이나, 용궁공주와의 사랑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향한 더 큰 사랑과 헌신의 의미를 깨닫고 진선미애(眞善美愛)를 실천하는 설정은 순수하게 그가 만들어낸 것이다.
“부제를 ‘사랑바다’로 붙였어요. 북한이 자랑하는 가극 ‘피바다’의 반대 개념인 셈이지요. 혼탁한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큰 사랑이란 제 자신의 철학을 담아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작곡도 작곡이지만 대본을 직접 쓰는 작업도 쉽지 않았는데, 어려서부터 대작소설과 희곡을 많이 탐독해왔던 것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오페라 ‘운림’은 일반 오페라와 달리 레시타티브(대사를 노래로 처리하는 것)가 거의 없고 연극처럼 대사연기로 이뤄지는 것이 가장 큰 특징. 따라서 출연하게 되는 성악가에겐 연기력이 필수다. 동서양의 음악과 무용을 과감하게 결합했고, 특히 최영섭씨가 직접 채록한 우리 민요 ‘이별가’가 새롭게 편곡돼 가미돼 있는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이처럼 서양과 한국을 하나로 잇는 작업에 대해 그는 “내가 해놓고도 참 잘했다는 느낌”이라며 “왜냐하면 나는 한국사람이니까”라고 말했다.
작곡가 최영섭에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역시 국민가곡 ‘그리운 금강산’이다. 1960년대초 어느 날 단 하루 만에 써내려갔던 이 곡은 최영섭을 대표하는 작품이 됐다. 그는 “한상억씨의 시 원고를 처음 읽었을 때 가슴이 뭉클해졌을 만큼 시어가 주는 충격이 컸다”고 작곡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남들은 창작자로서 국민가곡으로 불리는 작품을 남겼으니 얼마나 행복하냐고들 하더군요. 사실 이 곡이 내게 명예와 경제적 부를 가져다줬지요. 하지만 여전히 분단이 계속 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큽니다. 차라리 ‘한때 한반도의 분단현실을 노래한 곡’쯤으로 기억됐더라면 하는 생각도 많이 하지요. 개인적으로는 ‘그리운 금강산’ 때문에 다른 곡들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점도 있으니, 제겐 영광이자 짐인 셈입니다.”
국민적 사랑을 받아온 작곡가에게도 회한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인생이 왜 이리 빨리 흘러가 버렸는지, 어떻게 내가 80세가 돼버렸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될 때가 있다”는 것. 30여년 전에 조강지처를 저세상으로 떠나 보냈고, 그 뒤에 찾아온 사랑에 실패했는가 하면, 4년 전엔 방송사 프로듀서로 근무하던 셋째 아들을 과로사로 잃는 일까지 겪었다. “그런 이야기는 쓰지 말라”는 그의 말에서 진한 아픔이 전해져 왔다.
“단 하루도 먼저간 아내와 아들 그리고 90세 넘어서까지 장수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기도를 하지 않은 날이 없습니다. 어머니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어머니, 어제 과음했어요. 죄송합니다’라고 사죄도 하지요.”
그는 아직도 이뤄야 할 꿈이 많다. 여러 단체 회장직을 정리하고 창작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낼 계획을 가지고 있고, 무엇보다 ‘운림’을 무대에 올리는 일이 급하다. 현재 서너 군데 민간 오페라단으로부터 공연제안을 받은 상태. 공연까지 넘어야 할 산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예술작품과 예술인을 사랑하는 국가가 진정한 문화선진국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문화에 대한 투자가 여전히 너무 인색한 듯해요. 음악가로서 우리 음악문화가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선 좀더 많은 사회적 관심과 지원이 기울여졌으면 하는 바람이 큽니다.”
aeri@munhwa.com" rel="nofollow">aeri@munhwa.com
작곡가 최영섭은
▲1929년 인천 강화군 화도면에서 출생 ▲경복고등중학교(현재의 경복 중·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음대 작곡과 졸업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대 칼 웨스터라이히 교수에게서 지휘 사사 ▲1949년 첫 작곡발표회를 비롯해 총 5회의 작곡발표회 개최 ▲1956~63년 인천 애협 교향악단을 창립해 상임지휘자 역임 ▲1961년 ‘그리운 금강산’이 포함된 칸타타 ‘아름다운 내 강산’ 발표 ▲인천 여중고, 이화여고, 한양대, 상명여대, 세종대 등에서 교직 생활 ▲KBS, MBC, TBS, 교육방송 등의 음악방송 고정 해설자 및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클래식 음악의 대중화에 힘씀.
▲‘추억’‘모란이 피기까지는’‘목계장터’ 등 가곡 200곡, 피아노 환상곡 ‘해변의 추상’, 광복 50주년 기념 ‘오 ! 사랑하는 나의 조국’ 등 다수의 작품 작곡 ▲인천시 문화상(1959년), 경기도 문화상(1961년), MBC 방송대상(1987년), MBC 가곡공로대상(1994년), 한국음악상(1996년), 세종문화상(1998년), 서울시 문화상(2001년) 등 수상 ▲한국음악협회 부이사장, 한국작곡가협회 부회장, 한국작곡가회 회장, 서울 내셔널 심포니오케스트라 명예단장 등 역임 ▲현재 한국예술가곡 진흥위원회 공동대표, 한국예술가곡연합회 회장, 서울작곡가포럼 고문, ‘우리 가곡의 날’ 제정위원회 위원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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