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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화 작곡가 홍난파(기인열전 내 멋에 산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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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1998-05-05 16면

 ◎창가시대 막내린 근대음악 선구자/기독집안서 자라 개화사상 싹터/첫 바이얼린 독주­기악곡 작곡/시­소설도 쓴 다재다능 천재/변영로 충고듣고 절필 음악전념/3·1운동 참가혐의로 투옥 당해/고문후유증­합병/43세로 세상떠

홍난파는 서양음악 개화기의 선각자이자 스타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널리 불려졌던 「봉선화」의 작곡가로 우리나라 최초로 바이올린 연주회를 가졌고,기악곡과 관현악 組曲(조곡)을 작곡하여 우리나라 근대음악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사람이다. 「봉선화」 이전의 우리나라 음악계는 권학가 운동가 망국가 등의 단순하고 유치한 창가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봉선화」는 창작 음악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나라 음악계의 일대 전환점이 된 최초의 예술가곡이다. 1920년에 작곡된 이 가곡은 순식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가 일제는 급기야 이 곡을 금지시켰고 이 곡을 부르는 사람을 사상불경죄로 투옥하기까지 했다.

홍난파는 1898년 4월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읍 활초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양,호는 난파,본명은 永厚(영후)다. 아주 가끔 예명으로 羅素雲(나소운)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그가 태어나던 그 시기에 한반도는 격동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있었다. 동학농민전쟁,단발령,명성황후 시해,을미의병,러일전쟁…. 조선은 세계 열강의 압력에 의한 강제 개항 이후 개혁에 실패하고 근대산업국가로의 변신에 실패한 채 무기력과 혼란 속에 빠져 있었다. 1897년 고종황제는 연호를 「광무」로,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광무개혁을 추진하지만 그도 실패하고 만다. 홍난파는 이런 불행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태어났다.

홍난파가 「서양음악」을 자신의 진로로 선택하게 된 것은 환경의 영향이 컸다. 그의 부친은 거문고와 양금을 잘 다루었으며 그의 형은 조선정악전습소 조선악부 현금과를 졸업했던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완구 악기류로 창가와 찬송가들을 곧잘 연주하곤 했다. 홍난파의 음악은 개화된 집안의 이런 음악적 환경 속에서 꽃필 수 있었다. 홍난파는 일곱살 나던 해에 이화학당 근처인 서울 정동 14번지의 외인주택 경내로 이사했다. 선교사 언더우드의 신임을 받고 있던 홍난파의 팔촌형 홍정후의 천거로 그의 선친이 언더우드의 우리말 선생으로 초빙됐기 때문이다. 홍난파는 어려서 외인주택 경내에 있던 정동교회에서 서양음악을 접하고 혼자의 힘으로 찬송가의 讀譜法(독보법)을 익히며 천부의 음악적인 소양을 꽃피웠던 것이다.

그의 숙부 홍호는 『홍난파는 남달리 좋은 환경에서 성장하였으며 일찍 개화된 민주적 자립정신으로 노작하는 부지런함을 체득하였고 자기 소질과 적성을 계발할 줄 아는 슬기로 독서를 하였으며 항상 부지런하였고 무엇인가 쉴새없이 꾸미고 즐기는 취미가 있었다』고 말한다. 홍난파 자신도 『내가 조그마한 소질이라도 갖추어 갖게 된 직접 동기와 원인은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데 唯存(유존)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고 인정했다. 집에서 사서삼경을 배우다가 중앙기독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하면서 정식 교육을 받던 그는 1912년에 그곳을 졸업하고 근대 이후 최초의 전문음악기관인 조선 正樂(정악)전습소 서양악부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음악 교육을 받았다.

홍난파는 그 전습소에서 김인식에게서 바이올린 연주법과 樂典大要(악전대요)를 배웠다. 그러나 1년쯤 지나자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다. 홍난파는 『김선생도 독습으로 시작했으니까 특별한 기술이라는 것이 없었으므로 1년을 같이하고 나니까 기술이 같아져서 더 배우려고 해도 별로 배울 것이 없을 만큼 되었지요』라고 술회했다. 그해 겨울 홍난파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크리스마스 축하회에서 독주회를 가졌다. 연주자로 섰던 그의 첫 무대였다.

한때 부친의 강권에 의해 세브란스의전에 적을 두기도 했지만 음악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가 없어 아내와 사별한 아픔을 가슴에 품은 채 부친 몰래 일본으로 건너가 우에노 음악학교에 입학한다. 이 학교는 일본 유일의 관립음악 전문기관이었다. 그는 음악 공부에 매달리는 한편 평론과 문학에도 재능을 보였다.

1919년 2월 홍난파는 일본 도쿄에서 음악 미술 문학을 두루 다루는 예술잡지 「삼광」을 창간했다. 이 잡지를 통해 홍난파는 음악평론과 시­소설 등을 발표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홍난파는 곧바로 귀국하여 재일유학생이 중심이 된 항일운동에 가담하고 대한매일신보 기자로 활동한다. 이듬해 학교에 복학하기 위해 두번째로 일본에 건너가지만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복학은 좌절되고 홍난파는 즉시 귀국한다. 이 무렵 창작단편집 「처녀혼」을 출간하면서 이 책의 앞머리에 「애수」라는 곡명의 악보를 게재했다. 이것이 나중에 「봉선화」로 알려진 바로 그 노래다. 한민족의 한과 설움을 그 가락에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이 「호소력이 강한」 노래는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다재다능했던 홍난파는 음악활동 외에도 여러 잡지에 시와 수필 소설 등을 선보이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었다. 그가 樹州(수주) 변영로에게서 크게 꾸짖음을 당한 것은 1924년 설날이었다. 여러 예술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변영로는 홍난파에게 뼈아픈 충고를 했다.

『너는 도대체 음악이나 하면 했지 주제넘게 소설은 다 무엇이냐? 그래 開天地 通萬古(개천지 통만고)해서 두가지 예술에 대성한 천재란 누구란 말이냐?』
홍난파는 변영로의 말을 듣고 집에 돌아와 창작집 원고를 불살라버렸다. 그리고 이때부터 일체의 문필활동을 중단한 채 음악활동에만 전념했다.

1926년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신교향악단(현 NHK교향악단) 단원으로 활약했다. 그 무렵 홍난파는 「세계음악곡집」을 편찬하고 「조선음악백곡집」 상­하권(1929),「조선가요창작곡집」(1933) 등을 펴내기도 했다. 홍난파는 스무살 때 첫 부인과 사별하고 오래 독신으로 지내다 36세 때에 소프라노 가수인 이대형과 결혼했다. 이때 그는 경성보육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1936년 홍난파는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곧 경성방송관현악단을 조직하고 지휘자로 활약하였다. 그해 7월23일 그는 경성방송관현악단을 이끌고 모차르트의 교향곡 제41번 C장조 일명 「주피터 교향곡」 전악장을 지휘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 교향악 운동의 효시가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홍난파는 연주­저술활동 외에도 빅터레코드의 양악부장을 역임한 바 있고 이영세 등과 난파트리오를 조직하여 실내악 활동도 펼쳐나갔다. 이 시기가 그의 음악인생에서 절정기였다.

정력적으로 음악활동을 펼치던 홍난파는 미국 유학시절 「불온집단」인 흥사단 단가를 작곡했다는 혐의와 3.1절에 독립기념식을 열고 만세를 불렀다는 혐의로 안창호 이광수 등과 함께 종로경찰서에 72일간 구금되어 고문을 당했다. 고문 후유증과 미국 유학시절 자동차 사고로 늑골을 다친 것이 재발되어 1941년 7월15일 경성요양원에 입원했다. 이때 결핵균이 뇌에 침윤되는 바람에 요양원에서 퇴원한 뒤 불과 닷새만에 홍난파는 세상을 버렸다. 1941년 8월30일,홍난파 나이 43세였다. 홍난파는 『내가 죽거든 연미복을 입혀서 화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언에 따라 새문안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친 그의 유해는 홍제동에서 화장되었다.

사람은 떠났지만 노래는 남는다. 오늘 이 땅 어디에선가는 지금도 「봉선화」 「봄처녀」 「고향생각」 「옛동산에 올라」 「성불사의 밤」 「금강에 살으리랏다」,그리고 우리 마음 속에 영원한 고전으로 살아 남을 「고향의 봄」이 불려지고 있을 것이다.<장석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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