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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클래식, 엄숙한 무대서 내려와 생활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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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한 개인 병원.
저녁 퇴근길, 남녀노소 45명이 병원 건물 지하 작은 공간에 모였다.
홍성진(바리톤) 임청화(소프라노)씨가 아리아와 가곡 서너곡을 엮어 15분 남짓 음악회를 열었다.
이날의 ‘메인 디시’는 무료 공개 레슨(마스터클래스).
테너 신동호(47·중앙대교수)씨가 이들 앞에 섰다.
“오늘은 금수현의 가곡 ‘그네’를 배워볼까요.
” 신씨와 관객들은 함께 악보를 보며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는 첫 마디를 못 넘긴다.
“호흡이 짧으니 노래가 연결이 안 되잖아요.
‘세~모시’ ‘세~’ 소리를 만들어서, 입천장에 착 올려서 소리 내 보세요.
다시!”
어렵사리 합창이 끝나자 남녀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와 레슨을 받았다.
관객은 신 교수의 한마디를 놓칠새라 열심히 메모한다.
클래식 음악이 장중한 연주장을 떠나 일상을 파고든다.
반듯한 콘서트홀에서만 공연되는 것이 클래식 음악이라고? 이젠 맞는 말이 아니다.
아파트 모델하우스도 현악사중주 공연장으로 변신하고 공개 강습도 음악 전공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신동호씨의 열강은 계속된다.
“구강을 여세요.
안강·비강·구강, 얼굴 전체를 공명통 삼아서 얼굴 전체가 울리듯 소리를 내보내세요.
호흡은 힘,‘뱃심’이에요.
발음은 욕할 때처럼 ‘씨~’ 확실하게 씹어줘야 해요.
신씨의 익살 가득한 설명에 청강생들은 연방 폭소다.
불려나와 혼나는 ‘학생’은 땀을 뻘뻘 흘리며 틀린 부분을 반복했다.
‘세실 성악아카데미’(02-543-6752)라 이름붙은 이 무료 성악강좌는 신동호씨와 의사 이광식(47·세실내과원장)씨가 3년 전 시작, 매월 첫째 주 목요일마다 열고 있다.
“클래식 음악의 저변을 넓히려면 대중 속으로 더 파고들어야겠다 싶어 클래스를 열었습니다.
” 신 교수는 푸치니·질리·파바로티 콩쿠르 등에서 입상한 중견이다.
가톨릭의대를 나와 한양대 성악과에 편입해 성악을 배운 이광식 원장이 선뜻 병원 지하 공간을 세실아트홀로 꾸며 내주었다.
출연진 초청비와 팸플릿 인쇄비는 하나은행이 지원한다.
관객들은 동호회를 만들어 매월 셋째 주 ‘회원 음악회’도 연다.
청강생은 17세 소년에서 60대까지, 직업도 다양하다.
성우 황일청씨를 비롯 정국주(건축사)·노경자(한국인삼진흥 대표)·박정규(일간스포츠 부장)씨 등이 있고, 정현수(대승농원 대표)씨는 예순 넘어 대학부설 사회교육원에서 성악을 공부할 정도로 열심이다.
동호회 회장 장득상(힘찬개발 대표)씨는 “신 교수의 열정적 강의를 들으려 지방서도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2 경기도 구리시 토평지구 금호베스트빌 2차 아파트 내 중앙공원.
바리톤 김재창(46·중부대 강사)씨가 이끄는 아미치(AMICI) 예술단 성악가들이 ‘아파트 가곡의 밤’ 무대에 올랐다.
관객은 이곳 아파트 주민 800여명.
아파트입주자대표회의와 부녀회, 그리고 500여가구 주민들이 2000여만원을 모아 음악회를 열었다.
김씨를 비롯, 소프라노 이아네스 등 성악가들이 ‘코스모스를 노래함’ ‘별’ ‘산들바람’ 등 가곡과 아리아를 선사했다.
정찬일 아파트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은 “입주 1주년을 맞아 우리 동네를 문화와 예술, 환경이 어우러지는 곳으로 만들자고 시도했는데 주민들 반응이 너무 좋다”고 말했다.
김재창씨도 “아파트 음악회는 처음”이라며 “특별한 장소나 기회가 아닌, 일상으로 파고드는 자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기뻐했다.
‘세실 성악 아카데미’와 ‘아파트 음악회’는 클래식음악이 고전적 존재방식, 딱딱한 연미복의 틀을 깨고 나와 대중속으로 파고드는 ‘오늘’을 보여주는 삽화다.
바리톤 김재창씨가 이끄는 ‘아미치 예술단’은 전국의 정신병원, 장애인 수용시설을 돌며 음악을 선사하고 있다.
해마다 30여회 공연하길 올해로 3년째다.
김씨는 “클래식 음악은 더 낮은 데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2002.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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