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자료실 > 가곡이야기
가곡이야기

고진숙 시, 조두남 곡 <그리움> -2

운영자 7 4813
시인 고진숙은 1950년대말, 마산 중.고교 음악교사였다. 마산에서 예술인들과 가까이 하면서
그는 가곡 '선구자'의 작곡가로 유명한 조두남을 알게 된다.

"한번은 조두남 선생이 만나자고 해 갔더니 '울지마라 봉선화'라는 자작시를 보여 줬다. 이 시는 조선생이 해방 3년전에 지은 것으로 곡을 붙였는데 아무래도 가사가 마음에 차지 않아 개사를 하려 하는데 나더러 해달라는 거였다"
고진숙은 집에 돌아와 한동안 고심을 했다. 그런 그에게 얼핏 '여대생에의 회억'이 다가들었다.
이미 가고 없는 그 여대생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왔다. 아득히 그리움이 일었다. 그는 노트에 쉼없이 끄적거렸다.

기약없이 떠나 가신
그대를 그리며
먼산 위에 흰구름만 말 없이 바라 본다
아, 돌아오라
아, 못오시나
오늘도 해는 서산에 걸려 노을만 붉게 타네

귀뚜라미 우는 밤에
언덕을 오르면
초생달도 구름 속에 얼굴을 가리운다
아, 돌아오라
아, 못오시나
이밤도 나는 그대를 찾아
어둔길 달려 가네

다음날 이 시를 받아 쥔 조두남은 그렇게 흐뭇해 할 수가 없었다. '울지마라  봉선화'라는 가사 대신 이 시가 들어간다. 이것이 가곡 '그리움'이다.
조두남은 '그리움'을 그의 가곡집 <분수>에 담았다. 얼마후 '그리움'은 김자경이 불러 힛트하기 시작했다. '그리움'은 5.16직후 고교 교과서에 실리면서 더욱 긴파장을 그리며 애창곡으로 자리잡았다. 더욱이 한동안 KBS 2TV의 '정다운 노래'시그날 뮤직으로 나가 세인들의 귀에 퍽 친숙해졌다.

고진숙은 황해도 사리원 태생. 8.15이후 부모에 이끌려 월남했다. '그리움'의 무대는 6.25당시의 부산. 그는 고교1년생으로 수정동 판잣집에서 살았다. 당시 부산은 피란민으로 들끓었고 너나없이 고단한 삶을 꾸리던 때였다.
부산 밤바다 . 항구에 부~웅 뱃고동이 울리면 실향민들은 고향을 떠올리며 울었다. 광복동이나 남포동에는 술꾼들이 '아,아, 산이 막혀 못오시나요...'나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를 싸구려 술에 취해 불러 댔다.

고진숙은 수정동 비탈길을 오르내리다 우연히 E여대 3학년생 한정희를 알게 된다. 봄날 항구에 떠있는 배들이 한눈에 잡히는 양지쪽에서나 가을날 비가 흩날리는 대지공원에서 대학생인 정희는 고교생 진숙에게 낭만을 일깨워 주었다. 하이네니 하이든이니 하는 문학이나 모짜르트 등 음악얘기를 끝없이 들려주었다. 정희는 친척 하나 없이 외토리로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늘상 창백한 얼굴위로는 진한 우수가 배어 있었다. 여기다 폐결핵까지 앓게 돼 정희는 휴학을 하게 된다. 그녀에게 치료란 한갖 꿈이었다. 한줌의 쌀을 위해 방직공장 공원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두사람의 만남은 어느결에 단절되고 말았다. 진숙은 왠지 정희가 잊혀지지 않았다.
진숙은 어느날 정희를 만나기 위해 방직공장의 기숙사였던 천막촌을 찾는다.

그러나 정희는 없었다. 아무도 간 곳을 몰랐다. 진숙은 너무나 허탈했다. 여대생 정희와의 황홀했단 만남은 어느새 설움이었다. 그런데도 여름과 가을은 어김없이 갔다. 그런데, 그 정희가 죽었다는 얘기를 풍문으로 듣게 된다. 고교생 진숙은 이제 부산대 사대 음악과 학생이었다. 대학생이 되고서도 그는 불현듯 정희가 그리웠다. 그럴때면 수정동 옛 판잣촌을 찾았지만 그리움만 쌓일뿐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의 첫 부임지가 마산중고교였다.
"지금도 그 여대생은 내 가슴에 선연히 남아 있다. 그녀는 따지고 보면 6.25의 희생자이다."
그래선지 '그리움'에는 전쟁이 던지는 허무함이 짙게 깔려 있다. 

고진숙(본명 고경택)은 1960년 자유문학지에 시 '학'으로 등단한다. 그는 그동안 음악에도 진한 애정을 쏟아왔다.
'산에서 부르는 소리', '갈대', 꽃잎은 시나브로' '열정' 등 70여곡의 가곡에 가사를 붙였다.
시와 가곡의 접목에 신경을 쏟은 것이다. 그는 당시 강동구 성내동에 살았다. 을지로 2가에 '한국문화사'라는 출판사도 가지고 있었다.

"삶은 어찌보면 참 황홀한 것이다. 그러나 한편 치졸한 것이다. 그러나 주어진 삶은 치열하게 살아 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원문출처 - '노래따라 사람따라'(1990년/조선일보) / 내마음의노래 편집
7 Comments
열린세상 2008.09.05 16:12  
[고진숙(본명 고경택)은 1980년 자유문학지에 시 '학'으로 등단한다.]라는 윗 글 가운데
1980년 이라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1960년의 오기가 아닌지요?
고진숙 2008.09.18 12:41  
열린세상님, 꼼꼼하게 읽어 보았군요. 고맙구요.
오식을 바로잡아 지적하여 바로잡게 해 준 것도 꼼꼼한 성격에서 나온 거라 봅니다...

내일 (19. 금) 마산영남 우리가곡부르기의 주인공이 된 것 축하합니다.
내마노문단에 발표한 것을 보고 너무 좋아서 복사해 놓았었어요. 그것이 가락이 붙여져서
우리 신작시신자곡 시리즈에 실려서 나는 본인 못지 않게 기쁩니다.
아내에 대한 시들이 그리 많지 않은데 너무나 리얼하게 그린 사랑하는 마음을
발견하고, 시는 이렇게 써야 한다.
다시 말하면 시적 기교도 필요하지만 꾸밈 없는 진실의 표현이 더 중요하다고..
운영자 2008.09.07 12:53  
그렇습니다, 1960년의 오기였습니다.
해남예술가곡천사 2008.10.25 17:31  
해남군립합창단오디션도전 첫곡이었습니다.
평상시에도 너무도 사랑하는 가곡입니다.
고진숙 2008.11.03 06:48  
해남예술가...님
다 기억해 두었었군요. 조두남 작곡 <그리움>을 애창하고 콩쿠르나 오디션에 이용되는 일
작시자로서는 무한한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규택 2009.04.16 20:46  
저두 이 노래를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이런 사연을 알고보니  노래를 부르면 막연히 느껴지던 그게 무었이었는지를 알게됩니다. "기약없이..  그 시절 6.25 전란의 시절에 우리는 내일이 없는 오늘에 허덕이고 살았었음을 기억합니다. 배 고픔, 추위와......
고진숙 2009.05.05 05:34  
이규택님, 고맙습니다.
변변찮은 것 읽어 주시고 댓글까지 달아 주시니
더욱고맙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