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숙 시, 조두남 곡 <그리움>
//## 우리나라 가곡은 그리움을 읊은 것이 많다.
빼앗긴 나라와 두고 온 고향, 떠난 님에 대한 그리움 등 그리움의 대상은 실로 다양했다.
내마음의노래 감상실에 실린 가곡만 하더라도 그리움의 제목을 가진 각기 다른 작사,작곡가의 작품이 30여곡 이상이며 제목에 그리움이란 단어만이라도 들어간 가곡은 200여곡을 넘는다. 대중가요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이토록 그리움과 그리워 등의 제목을 가진 노래가 많은 것은 노래가 그만큼 삶과 정서와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석호 조두남의 <그리움>은 온 국민에게 사랑받는 한국의 대표가곡 중의 하나이다.
조두남은 1912년 평양에서 태어나 6.25때 마산으로 피난온 후 작고할 때까지 그의 고향이 되었다. <그리움>은 그가 20대 후반에 직접 작사하고 작곡을 한 곡이지만 훗날 가사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40대 후반(1958)에 고진숙씨에게 개사를 의뢰하였다.
조두남은 평양갑부의 3대독자로 귀하게 자랐으며 가통릭 신자인 조부와 콜럼비아대학을 졸업한 아버지를 둔 가문이었다. 그는 집안의 오르간과 동네 성당에서 피아노를 치며 미국인 선교사에게 작곡 기초를 지도받으면서 음악에 입문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을 돕던 부친이 투옥되어 병을 얻고 세상을 떠나자 21세때에 만주로 유랑을 떠난다. 유랑시절인 1933년, 그는 목단강 근처 여관에서 기이한 인연 윤해영을 만나 용정의 노래라는 시를 받고 선구자를 작곡하였다고 한다,(조두남의 친일사상과 관련하여 회자되고 있는 가곡 선구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가곡이야기 “선구자”를 참조)
<그리움>의 작시자인 고진숙씨(1935~ )는 생전에 조두남과 매우 친했던 마산출신 시인이다. 어느날 그는 <선구자>에 대해 의문을 품은 일이 있다고 한다. 1960년 어느날 “박태준이 1922년에 작곡한 순례자의 노래와 흡사하다. 표절이 아닌가” 라고 물었는데 조두남은 하필 왜 그런 작곡가와 나를 비교하냐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박태준과 조두남은 선후배 사이로써 평양과 마산에서 함께 산 일도 있었다.
<선구자>에 대한 표절시비는 1982년에도 한 평론가가 두 사람의 악보를 비교하면서 16마디중 13마디가 비슷하거나 똑같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당시 조두남은 병중이었고 박태준은 미국체류중이어서 당사자들의 변을 듣지 못하고 지나버렸다. 고씨는 조두남이 착하고 치밀하고 인정많은 성격이나 예술에서만은 마산의 황제라는 그의 별명만큼이나 자존심과 오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그가 생전에 살던 마산시 오동동 집은 20평도 안되는 마당도 없는 곳이었지만 사람을 좋아했던 그는 늘 그들의 대부로 통했었고, 그의 집엔 언제나 문인과 음악가 등 예술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
<그리움>에 대한 고진숙씨의 회고는 이렇다.
1958년 평소 친하던 조두남이 멜로디만 주면서 거기에 맞는 가사를 붙여달라고 부탁했고 시인은 그리움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위해서 6.25때 헤어진 사람들, 그중에서도 얼굴이 대리석처럼 희었던 한 여대생을 떠올리며 시를 썼다. 고진숙씨는 부산사대 음악과를 졸업했지만, 본래 문학청년이었던 그의 옆집에 혼자 월남한 여대생이 살았었고 그녀도 돈을 벌기 위해 중노동을 하는 문학도였던지라 환경과 취향이 같은 두 사람은 남매처럼 가깝게 의지했었다, 그러나 어느날 과로로 그 여대생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가곡 <그리움.의 가사는 바로 꽃봉오리로 숨져간 그 여대생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것이었다.
조두남은 고씨가 쓴 새 가사를 보고 흡족해 하였으며 5.16혁명 후 중.고교 교과서에 실리고 김자경씨가 처음 녹음하고 이어 김성길 씨 등 수 많은 성악가들이 연주하면서 대중에게 알려졌다. <그리움>으로 인하여 작곡가 조두남과 작사가 고진숙은 더욱 친밀한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거의 매일 같이 고씨는 조두남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 분은 생활에는 무관했죠. 오직 음악과 담배.술에만 젖어 살았습니다, 줄담배를 피우는데 양손에 담배를 들고 하루 세 갑의 담배를 피웠지요, 거의 매일 새벽 4시까지 음악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졸면 불호령을 내렸죠” (고진숙씨의 회고)
조두남의 학력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독학을 했고 음악도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숭실전문 교수였던 말스베리의 개인지도를 받았는데 말스베리의 집에서 안익태, 바이올리니스트 계정식, 작곡가 박태준과 음악활동을 같이 했다고 한다. 조두남의 대표가곡으로는 산도화(박목월 시),청산별곡(신석정 시), 분수,뱃노래,산,새타령 등과 오페레타 에밀레종과 교성곡 <농촌>등 200여곡이 넘는다. 1984년 11월 9일 중풍으로 세상을 떠난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그의 수 많은 제자들은 그해 12월 20일 추모음악회를 마련했다.
고진숙씨는 1953년에 동인지 ‘시영토’에 처녀작 <학>을 발표했고 그후 자유문학 추천으로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지금까지 그의 시에 김연준씨가 작곡한 곡이 <석류> 등 70여편이었고 조두남 등 많은 작곡가가 그의 시에 곡을 붙였다. 1988년 KBS의 위촉으로 신작가곡 <산에서 부르는 소리>를 작사하였다. <산에서 부른 소리>는 고씨가 17세때 경북 영천 고경면에서 요양을 하던 중에 산에서 느낀 감정을 회상해서 지었다고 하며 작곡가 김희조 씨의 두 번째 작품이 되었다.
글 : 내마음의노래(참고문헌 : 가곡의 고향(이향숙 저)
빼앗긴 나라와 두고 온 고향, 떠난 님에 대한 그리움 등 그리움의 대상은 실로 다양했다.
내마음의노래 감상실에 실린 가곡만 하더라도 그리움의 제목을 가진 각기 다른 작사,작곡가의 작품이 30여곡 이상이며 제목에 그리움이란 단어만이라도 들어간 가곡은 200여곡을 넘는다. 대중가요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이토록 그리움과 그리워 등의 제목을 가진 노래가 많은 것은 노래가 그만큼 삶과 정서와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리라.
석호 조두남의 <그리움>은 온 국민에게 사랑받는 한국의 대표가곡 중의 하나이다.
조두남은 1912년 평양에서 태어나 6.25때 마산으로 피난온 후 작고할 때까지 그의 고향이 되었다. <그리움>은 그가 20대 후반에 직접 작사하고 작곡을 한 곡이지만 훗날 가사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40대 후반(1958)에 고진숙씨에게 개사를 의뢰하였다.
조두남은 평양갑부의 3대독자로 귀하게 자랐으며 가통릭 신자인 조부와 콜럼비아대학을 졸업한 아버지를 둔 가문이었다. 그는 집안의 오르간과 동네 성당에서 피아노를 치며 미국인 선교사에게 작곡 기초를 지도받으면서 음악에 입문하였다.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을 돕던 부친이 투옥되어 병을 얻고 세상을 떠나자 21세때에 만주로 유랑을 떠난다. 유랑시절인 1933년, 그는 목단강 근처 여관에서 기이한 인연 윤해영을 만나 용정의 노래라는 시를 받고 선구자를 작곡하였다고 한다,(조두남의 친일사상과 관련하여 회자되고 있는 가곡 선구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가곡이야기 “선구자”를 참조)
<그리움>의 작시자인 고진숙씨(1935~ )는 생전에 조두남과 매우 친했던 마산출신 시인이다. 어느날 그는 <선구자>에 대해 의문을 품은 일이 있다고 한다. 1960년 어느날 “박태준이 1922년에 작곡한 순례자의 노래와 흡사하다. 표절이 아닌가” 라고 물었는데 조두남은 하필 왜 그런 작곡가와 나를 비교하냐면서 화를 냈다고 한다. 박태준과 조두남은 선후배 사이로써 평양과 마산에서 함께 산 일도 있었다.
<선구자>에 대한 표절시비는 1982년에도 한 평론가가 두 사람의 악보를 비교하면서 16마디중 13마디가 비슷하거나 똑같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당시 조두남은 병중이었고 박태준은 미국체류중이어서 당사자들의 변을 듣지 못하고 지나버렸다. 고씨는 조두남이 착하고 치밀하고 인정많은 성격이나 예술에서만은 마산의 황제라는 그의 별명만큼이나 자존심과 오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그가 생전에 살던 마산시 오동동 집은 20평도 안되는 마당도 없는 곳이었지만 사람을 좋아했던 그는 늘 그들의 대부로 통했었고, 그의 집엔 언제나 문인과 음악가 등 예술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
<그리움>에 대한 고진숙씨의 회고는 이렇다.
1958년 평소 친하던 조두남이 멜로디만 주면서 거기에 맞는 가사를 붙여달라고 부탁했고 시인은 그리움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위해서 6.25때 헤어진 사람들, 그중에서도 얼굴이 대리석처럼 희었던 한 여대생을 떠올리며 시를 썼다. 고진숙씨는 부산사대 음악과를 졸업했지만, 본래 문학청년이었던 그의 옆집에 혼자 월남한 여대생이 살았었고 그녀도 돈을 벌기 위해 중노동을 하는 문학도였던지라 환경과 취향이 같은 두 사람은 남매처럼 가깝게 의지했었다, 그러나 어느날 과로로 그 여대생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가곡 <그리움.의 가사는 바로 꽃봉오리로 숨져간 그 여대생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것이었다.
조두남은 고씨가 쓴 새 가사를 보고 흡족해 하였으며 5.16혁명 후 중.고교 교과서에 실리고 김자경씨가 처음 녹음하고 이어 김성길 씨 등 수 많은 성악가들이 연주하면서 대중에게 알려졌다. <그리움>으로 인하여 작곡가 조두남과 작사가 고진숙은 더욱 친밀한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거의 매일 같이 고씨는 조두남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 분은 생활에는 무관했죠. 오직 음악과 담배.술에만 젖어 살았습니다, 줄담배를 피우는데 양손에 담배를 들고 하루 세 갑의 담배를 피웠지요, 거의 매일 새벽 4시까지 음악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졸면 불호령을 내렸죠” (고진숙씨의 회고)
조두남의 학력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독학을 했고 음악도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숭실전문 교수였던 말스베리의 개인지도를 받았는데 말스베리의 집에서 안익태, 바이올리니스트 계정식, 작곡가 박태준과 음악활동을 같이 했다고 한다. 조두남의 대표가곡으로는 산도화(박목월 시),청산별곡(신석정 시), 분수,뱃노래,산,새타령 등과 오페레타 에밀레종과 교성곡 <농촌>등 200여곡이 넘는다. 1984년 11월 9일 중풍으로 세상을 떠난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그의 수 많은 제자들은 그해 12월 20일 추모음악회를 마련했다.
고진숙씨는 1953년에 동인지 ‘시영토’에 처녀작 <학>을 발표했고 그후 자유문학 추천으로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지금까지 그의 시에 김연준씨가 작곡한 곡이 <석류> 등 70여편이었고 조두남 등 많은 작곡가가 그의 시에 곡을 붙였다. 1988년 KBS의 위촉으로 신작가곡 <산에서 부르는 소리>를 작사하였다. <산에서 부른 소리>는 고씨가 17세때 경북 영천 고경면에서 요양을 하던 중에 산에서 느낀 감정을 회상해서 지었다고 하며 작곡가 김희조 씨의 두 번째 작품이 되었다.
글 : 내마음의노래(참고문헌 : 가곡의 고향(이향숙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