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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과 사의 찬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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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해탄의 망망한 바다에 정사한 윤심덕과 사의찬미

윤심덕과 김우진의 사랑은 작열하는 태양이 빙산이라도 다 녹일 만한 열정 속에 취해가고 있었다. 그들은 아름답고 따끈따끈하며 정이 흐르고 변함이 없는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였다. 김우진은 마지막 남긴 유서에서 "이 여자의 사랑앞에는 만사가 사라진다"라고했다. 그러나 윤심덕과 김우진의 이러한 사랑의 밀회는 오래가지 못하고 물거품처럼 사라졌으며 그시대 사랑의 배경을 생각할 때 단순한 낭만적인 정사가 아니라 그들의 현실과 동떨어지게 형성된 사상적 모순과 거기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고뇌를 느끼면서 살아야 했던 현실이었다. 이런 실정 속에서 윤심덕은 시간이 흐를수록 방황의 길로 가기 시작했다.

일본 우에노 음악학교 성악과를 졸업한 윤심덕은 타고난 고운 음성과 미모로 우리나라의 순수음악을 알리기 위해서 계속 무대에 서기도 했다. 1920년대 중요한 연주활동을 살펴보면 어느 음악회이건 윤심덕의 이름이 올라 있다. 사실상 그녀가 출연하지 않으면 음악회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중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윤심덕의 모습과 이름이다. 1920년12월 19일 종로에 있는 YMCA홀에서 우에노 음악학교 동창회 주최로 열린 [베토벤 탄생 150년 기념음악회]의 목차를 보면 김합라, 윤성덕의 피아노연주, 윤심덕과 윤심덕의 남동생인 윤기성의 독창, 홍난파의 바이올린독주, 김영환, 한기주의 피아노독주 등을 볼 수 있다. 1923년 바이올리니스트인 계정식이 독일유학을 가기에 앞서 고별연주회가 있었는데, 여기 연주된 곡목은 헨델의 '소나타'와 사라사데의 '지고이네르바이젠' 등으로 당시 일본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돌아온 김영환과 윤심덕이 찬조 출연했다. 그해 7월7일 윤심덕의 제1회 독창회가 YMCA에서 열렸다. 그날도 입추의 여지가 없이 모인 관객들 앞에서 하얀 드레스를 차려 입고 무대에 오른 윤심덕은, 약간 애수띤 음성으로 아름답고 매력적인 그녀의 창법을 듣는 사람들을 완전히 매혹시키고 있었다. 그녀의 한 곡 한곡이 끝날 때마다 청중들의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정식 양악의 성악 교육을 받은 윤심덕의 노래에 대하여 사람들은 '어찌 여자의 목소리가 장내를 압도 할 것 같은 소리를 저렇게 낼 수 있을까?' 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또 고음역에서 너무 미려하게 잘 넘어가서 청중들 가슴을 찌리하게 하면서 감탄을 연발하게도 만들었다. 1924년 5월11일에는 연희전문학교 음악회가 김영환, 홍난파. 윤심덕, 한기주등의 출연으로 개최되었다. 이와 같이 많은 무대에서 초창기 우리 나라 음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윤심덕은 끊임없는 연주활동을 하였다. 윤심덕은 일본에서 귀국해서 경성사범부속학교 음악교사를 지내면서 음악발전의 일선에 서서 노력하기도 했다.

김우진의 처 정점효

윤심덕이 연극무대에 서게 된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회의 모든 문화가 진보되고 복잡해 질수록 민중의 자각과 영혼을 해방시키는 연극에 대해 아직도 정열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김우진은 윤심덕에게 여배우로 전향할 것을 종용했었다. 운심덕이 토월회에 가입해서 활동 했을 당시인 1926년 2월6일자 동아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일시 조선악단에서 일류의 여류 성악가로 악단의 여왕이라는 찬사까지 들어오던 윤심덕 은 그 후 이상하고 야릇한 세평으로 악단과 인연을 끊어버린 뒤 홀홀히 북국으로 여행 을 떠났다. '할빈'에서 쓸쓸한 객창생활을 계속하다가 인연깊은 경성으로 돌아와서 그 동안은 외로이 세상사람과 교섭이 없이 서대문 자기집에 들어 앉아있는 윤심덕양은 그 동안에 사정상 어떠한 변화가 또 생겼는지 돌연히 그녀의 몸을 조선극단에 던지기로 하여 오늘(6일)밤부터 시내 황금정(지금의 을지로)에 있는 광무대와 토월회무대 위에 그 자태를 나타내게 되었다.]

고루한 사람들이 여배우를 천시하던 그 시절 신문학을 배운 윤심덕은 과감하게 여배우로 전향하여 무대에 출연하게 된다. 1927년 2월16일 경성방송국에 의한 JODK국이 개국하기 전 1926년부터 시험전파를 보내기 시작하자 방송극이 편성되어서 윤심덕은 6월에 방송성우로도 출연하게된다. 그러나 그녀의 집념과는 달리 현실적으로 너무나 판이하게 다른 일반인들의 순수음악에 대한 인식과 무관심은, 그녀로 하여금 좌절감과 더불어 예술과 인생에 대해서 윤심덕의 가슴 속에 깊은 충격을 주었다.

윤심덕과는 달리 신식교육이란 것도 접해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직 전통적인 가정교육에 얽매어 살아온 김우진의 처 정점효는, 결혼은 했지만 남편의 사랑이라고는 한번도 받아 본적이 없이 그저 만석군의 지주집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전형적인 한국 여인처럼 묵묵히 시집살이를 하고 있었다. 신사상을 접한 남편은 얼굴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홀로 독수공방을 지킨 본처 정점호는 어떤일이 있더라도 여자는 가정을 지켜야되며 일부종사를 해야된다는 교훈과 층층시하의 가정 속에서 자라난 숙명적인 기질이 있는 여인이었다.

남편이 이마를 맞대고 늘 같이 지내면서 살아도 힘든 시집살이일턴데 하물며 매일같이 홀로 살아가는 시집살이로서야 그녀의 심정이 오죽했을까마는 이런저런 정한을 삼키면서 묵묵히 살라가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궁중의 중전마마가 한 가정으로 볼 때 남편인 임금이 희빈들에게 정신없이 정을 쏟고 있어 남편의 정 이라고는 자신의 곁에서 떠났지만, 오로지 궁중의 권위와 법도를 위안삼아 살았던 것처럼, 남편 없는 시집살이를 눈물과 한숨으로 위로하면서 만석꾼의 맏며느리로 또 자기 자식이 버리다시피 하고 간 며느리가 측은해서 감싸주는 시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속담에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하듯이 시아버지의 정신적 위로와 맏며느리로서의 대접과 인정 속에서 맺힌 한을 풀면서 집안의 권속들을 다스리면서 살아가는 전형적인 가정형의 여자였던 것이다.

김우진의 인간적인 갈등

윤심덕의 일생은 화려하고도 비참했고 행운과 수난이 뒤섞일만한 충분한 여지가 있었다. 천성적인 사교성과 성악가의 첨단을 걷는 여성 윤심덕을 아름다운 이상의 선망 속에 접근한 남성들이 결국 그녀의 꿈을 산산이 깨어버리게 했다. 그가 한때 낙산부호 이용문과의 불미스런 염문으로 사회로부터 받은 그녀에 대한 좋지 못한 평판 또한 그녀를 절망하게 한 내적 상처이기도 했다. 이러한 방탕은 김우진을 한때 괴롭혔고, 또한 서로의 상통점에서 용서하고 결합하게 된 순간이라도 둘이 영원히 애인관계로 남게는 할 망정 가정을 꾸며서 살게 할 수 있는 부부관계는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이들이, 가정이라는 테두리에서 얽매여 살기에는 서로의 개성이 너무나 뚜렷하고 한치의 양보도 없이 둘 다 우뚝 솟은 태양이었기 때문에 결코 결합할 수 없었던 까닭이었다.

옛말에, 달도 차면 기울고, 십 년 세도 없다고 했고, 양지가 있으면 음지도 있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열기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식어지듯이 윤심덕과 김우진의 만남도 뜸해지기 시작했다. 미혼자도 아닌 유부남인 만석꾼 지주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우진은 평소 이러한 갈등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했다.

'나는 깊이 나의 운명에 대한 저주를 들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나를 협박하는 악마이다. 이 악마의 포위 속에서 한시라도 마음의 안일을 준 것은 그녀였다. 아아 나는 자기만을 위한 사람일까? 자기 충만을 위해서만 사랑을 하는 자인가? 그리고 이 자기를 위한 자와 자기만족을 충족시킨 뒤에는 다시 그녀에게 무관심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나의 변덕스러운 마음이 변하여 바뀜이 왔을 때 나는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과연 옳은 일이었는가? 도덕적 양심은 나를 구속하나 그 보다도 나를 괴롭히는 것은 자기의 약함이다. 자기의 운명적 견인이다. 아아! 나는 힘이 필요하다. 눈과 살과 피가 넘치는 비장한 힘이 필요하다.'

내용으로 보아 부친의 엄명으로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했지만, 정은 없어도 자식은 낳는 다는 말처럼, 목포에 본처와 자녀까지 둔 김우진이 윤심덕과의 만남을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 점이 유부남인 그의 심정 속에 잘 나타나고 있다.

예술가로서 유행가는 취입할 수 없다.

1926년 7월 16일 무더웠던 한 여름, 경성역(지금의 서울역)에서 양장을 한 미모의 한 여인을 전송하기 위해서 일행이 나와 있었다. 양장한 여인은 바로 윤심덕이었는데 그녀는 일본으로 레코드 취입을 하러가기 위해서였다. 당시 연극계의 원로이자 레코드 취입주선 등을 하고 있던 이기세, 동아일보 사회부기자 남상일을 비롯 기자, 극작가와 작사가이며 토월회를 창립한 이서구씨가 나왔다. 일본의 닛토 축음기 주식회사로 가기 위해서 경성역을 떠나는 윤심덕에게 이기세는 이렇게 말했다. [취입 잘 해야 돼. 마이크 무서워하지 말구, 평소실력을 발휘하란 말이야.] 닛토 축음기 주식회사는 1920년 3월 20일 설립한 축음기회사로 당시 초창기 희귀음반을 남기게 한 회사 중 하나지만 빅타, 콜럼비아 축음기회사가 한국상권을 점차 장악하자 1930년 이후부터는 사양길로 접어든 오사카에 있는 축음기회사였다. 그때 윤심덕은 갑부 플레이보이 이용문과의 염문 후 피로한 심신을 휴식할 겸 만주 할빈으로 가 있다가 서울에 다시 돌아와서 서대문 자기집을 나와 종로3가에 있던 오까다 사진관 뒷집에 방을 빌어 혼자서 지내면서 두문불출하다시피 지냈는데, 그때 이기세와 이서구가 윤심덕을 찾기 시작했다. 닛토 회사에서 한국음반을 몇 장 만들자고 급히 연락이 왔다. 그러나 얼마전까지 인기 속에 있다가 자취를 감추고 있던 윤심덕을 만나서 이기세는 먼저 10곡의 선금으로 5백원(당시 쌀 한 가마 5원)을 주었다. 윤심덕은 자존심이 강해서 돈이 떨어져도 남에게 구차 한소리를 하지 않는, 아직까지도 콧대높은 여인이었다. 윤심덕이 우에노 음악학교를마치고 왔을 당시 이기세가 그녀에게 레코드 취입을 알선하려고 권유했을 때 '예술가로서 유행가를 취입할 수는 없다'고 자존심을 앞세우기도 했던 적이 있었다. 윤심덕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이서구가 '예술이란 고하가 있는가, 사람에게도 등급이 없는 시대가 아닌가. 유행가는 예술이 아닌가'라고 끈덕직 설득과 선금, 그리고 동생의 구미 유학길 전송 등으로 승낙을 한 것이다.

윤심덕의 동생 윤성덕은 이화전문의 교비생으로 미국으로 떠나기로 되어있었다. 동생을 전송할 겸 취입날짜를 잡아서 일본의 요코하마까지 가는길에 오사까에 있는 닛토축음기회사에서 취입하기로 했다. 그곳 여관에 머물면서 사흘동안에 예정대로 10곡의 노래를 취입했다.
취입 마지막날 윤심덕은 특별히 회사에 요청하여 자신의 유작시에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푸른물결'을 멜로디로 한 '사의찬미'라는 예정에 없던 곡을 그의 동생 윤성덕의 피아노반주로 취입했다. 이때의 '사의 찬미' 가사는 다음과 같다.

1절 :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드냐
쓸쓸한 이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로 가느냐

(후렴)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2절 : 웃는 저 꽃과 우짖는 뭇새가 그 운명이 모두 다 같으니
생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위에 춤추는 자이다

3절 : 허영에 빠져서 날뛰는 인생아 너 속았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에 모두 다 없도다.

윤심덕의 레코드 취입당시 김우진은 옛친우 조명회에게만 행방을 알리고 독일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에 와 있었다. 김우진은 윤심덕에게도 알리지 않았으므로 윤심덕은 조명회를 졸라서 김우진의 주소를 알아가지고 일본으로 갔다. 그때 김우진은 만석꾼의 부호인 그의 부친이 여비도 넉넉히 못갖고 가서 떠돌이 생활을 하는 자식을 염려해 돌아올 것을 간곡히 청했으나 응하지 않았다.

윤심덕은 늘 "내 처지를 돌아보면 세상에 나 같은 불행한 여자는 없을 것야"라고 말하곤 했다. 윤심덕이 레코드 취입과 동생을 미국으로 본낸 후 도쿄에 있는 김우진에게 자살하겠다는 전보를 띄워 놀란 김우진이 급히 오사카로 갔다. 김우진이 오사카로 가면서 친구 홍해성에게 윤심덕의 자살을 말리지 못하면 곧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으나 그후로는 소식이 없었다고 한다.

1926년 동아일보 8월 5일자 신문에는 "현해탄 격랑중에 청년남녀의 정사"란 주먹만한 특호활자가 나왔다. 남자는 극작가 김우진, 여자는 음악가 윤심덕. 당시의 신문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지난3일 오후 11시에 시모노세끼를 떠나 부산으로 향하던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가 4일 오전 4시경에 대마도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부근을 수색하였으나 그 종적을 찾지 못하였으며, 그 선적명부에는 남자는 전남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30), 여자는 경성부 서대문정 이목동 173번지 윤영선(30)이라 하였으나 그것은 본명이 아니오 남자는 김우진이요, 여자는 윤심덕이었으며, 유류품으로는 윤심덕의 돈지갑에 현금 백사십원과 장식품이 있었고 김우진의 것으로는 현금 이십원과 금시계가 들어있었는데 연락선에서 조선사람이 정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더라'

윤심덕과 김우진은 먼동이 터오는 새벽4시 바다에 투신한 것이다. 한 심리학자는 인간이 자살하는 빈도가 가장 높은 시간이 먼동이 터오는 시점이라고 했다. 심리적으로 밤새도록 삶과 죽음의 갈등속에서 번민하다가 또 하루가 다가오는 밝음이 오면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두려움때문이라고 한다.

윤심덕의 죽음에 대하여 투신자살이라는 설도 있고 닛토 축음기주식회사의 상술에 의한 인기로 가장된 타살이라는 설도 있고, 윤심덕이 정부와의 둘만의 꿈을 위해서 아무도 모르게 닛토축음기회사와 결탁하고 해외로 도피했다는 설도 있었으며, 한국의 어디엔가서 창시개명하여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는 분분한 의견이 있었지만, 윤심덕은 현해탄의 수중고혼이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결론지어진다.

'사의 찬미'는 이런 계기로 닛토축음기회사에서는 '현해탄에 정사한 윤심덕의 마지막 목소리'라고 선전을 한 상혼의 입김과 더불어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가 예술과 인생에 패배한 심정을 간직한 채 현해탄의 물결속에 한의 고뇌를 씻기 위해서인지, 저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를 소망이나 하듯이 망망한 바다에 자신들을 던져버린 , 시대가 만든 가련한 주인공들이었다.

이중훈(영남대 교수)/월간오디오 198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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