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가 된 시 - 신동엽 '산에 언덕에'
[세계일보]1997-01-12
◎외세… 압제… 「껍데기」 거부한 민족혼/모더니즘 지배 60년대 시단에 투철한 역사의식 우뚝/가난한 이웃에 대한 짙은 애정불굴의 민초삶 형상화『들으라 잊지 못할 나의 벗들이여/ 나를 추모하는 뭇 벗들이여/ 나 대신 그대들의 정열은 갓난 아들 조국에 바치라!/ 이것만이 내 생명의 율동이 요구하는 벗들에 향하는/ 마지막 바람이어라.』(「만약 내가 죽게 된다면」 중에서)
모더니즘의 유희적인 말장난과 관념놀음이 한국 현대시를 지배하던 60년대에 각성된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서정적인 시혼에 접목시켜 짧은 세월 절창으로 노래하다 병마에 잡혀간 신동엽(1930∼1969) 시인. 충남 부여읍 동남리 501의 3번지 그의 집 마당에는 아직 녹지 않은 잔설과 더불어 수국과 장미줄기와 대추나무와 향나무가 마르고 황량한 계절을 견디고 있다.
초가지붕을 개량해 기와를 얹기는 했지만 툇마루와 창살문에선 세월의 오래된 흔적이 그대로 묻어난다. 사람이 살지 않는 흔적은 마루에 그대로 배어 있다. 오랜 세월 먼지가 쌓이고 쌓여 누군가 생각날 때마다 걸레질을 해도 두터운 먼지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 빛바랜 마루는 시인의 육성은 들리지 않은 지 오래인,그저 기념물일 뿐임을 실감케 한다. 방문 위쪽에는 시인의 아내 인병선씨가 써놓은 시편 하나가 검정 목판 속 진노랑 양각으로 새겨져 걸렸다. 「우리의 만남을 헛되이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 싶은 마음이 당신과 내가 처음 맺어진 이 자리를 새삼 꾸미는 뜻이라…」.
담 밑 가장자리에 지난 여름의 탐스러운 수국은 만지면 그대로 금방 바스라져 버릴 것 같은 황갈색 노추로 매달려 있고 새침데기 가시내처럼 온 줄기에 가시를 뻗친 장미 줄기는 채도가 탁한 빨간 열매를 주절주절 달고 서 있다. 마당 가운데에는 빨래 건조대가 아이의 내복 바지와 수건,양말,팬티 등속을 걸치고 차가운 대기 속에 서 있다. 행랑채 댓돌 위에 신발 몇 켤레가 겨울의 냉기는 아랑곳 없이 옛날 이야기라도 나누듯 제 멋대로 놓여있다. 인기척을 눈치 챈 사내 하나가 방문을 나선다.
서산여중 미술교사 임의수씨(38). 교사와 일반인 등 10여명으로 구성된 「신동엽생가관리모임」의 일원인 그는 신동엽의 부친이 아들을 그리며 홀로 생가를 지키다가 지난 90년 이승을 떠난 뒤 아예 이곳 행랑채로 살림을 옮겼다. 그는 이제 1년이면 5백여명이 다녀가는 시인의 생가 안내인이 돼 버렸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연 곰나루의,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껍데기는 가라」 전문)
「껍데기는 가라」와 장편서사시 「금강」은 신동엽을 상징하는 시편들이다. 한반도를 뒤덮은 무기들과 외세에 대한 격렬한 심정적 반발과 함께 순결한 고향의 대지에 맥맥히 흐르는 백제의 정신을 녹여낸 것들이다. 이를 두고 평자들은 『민족문학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시인만이 가질 수 있는 통찰력과 표현력으로 우리의 시대적 과제를 제시한 것』이라거나 『우리의 시의식은 「금강」으로 하여 하나의 새로운 차원을 얻었다』고 칭송했다.
신동엽은 1930년 8월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에서 신연순씨의 1남4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자신에 이어 2대독자로 태어난 아들에게 부친이 쏟아부은 애정은 각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인의 어린 시절은 지독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 독한 가난과 사랑 속에서 부여초등학교를 마친 시인은 학비와 기숙사까지 무료로 제공되는 전주사범학교에 들어간다. 그의 부친은 부여에서 전주까지 백리길을 마다 않고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자전거 뒤에 인절미 따위를 매달고 한달이면 서너번씩을 왕래했다. 사랑은 받아본 사람만이 제대로 줄 줄 아는 법,이렇게 청년기를 보낸 시인의 가슴은 뜨거운 감성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가득 찼다.
유난히 감수성이 예민했던 전주사범 시절,시인은 문학과 철학서적을 읽으며 홀로 고독을 생활처럼 씹었다. 그의 개성적인 시편들과 투철한 자존의 논리,역사적인 시각은 모두가 당시의 독서량과 사색에 힘입은 결과라고 친우들은 술회한다. 전주사범을 졸업하고 부친의 권유로 부여에 머물며 한학을 공부하던 시절에 시인은 서구적인 가치질서에서 벗어나 동양의 정신과 만난다. 주위에 산재한 수많은 백제 유물들에 새삼스런 관심을 쏟으며 백제정신에 심취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시인은 부친 곁을 떠나 49년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곧 6·25가 닥쳤고 반도에 널려 있던 시체더미와 처참한 상처들을 기억 속에 슬프게 저장해야 했던 시인은 전쟁통에 얻은 병으로 충남 보령에 있는 주산농고 교사로 있다가 끝내 각혈을 하고 집에서 요양을 하게 된다. 요양 중에 썼던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돼 시인은 본격적인 시업의 길로 들어섰다. 시인의 길로 접어들자마자 신동엽은 또다시 역사적인 4·19를 만난다. 혁명의 기운은 시인의 세계관과 맞물려 민족의식의 정화를 담은 독보적인 시편들을 한국 현대시사에 줄줄이 쏟아내게 만들었다.
『동학이여 동학이여./ 금강의 억울한 흐름 앞에/ 목 터진,정신이여/ 때는 아직도 미처 못다 익었나본데.』(「삼월」)
『미치고 싶었다./ 사월이 오면/ 곰나루서 피 터진 동학의 함성,/ 광화문서 목 터진 사월의 승리여』(「사월은 갈아엎는 달」)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에 회올려/ 하늘에 불 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진달래 산천」)
시인은 그러나 69년,데뷔 10년만에 간암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모더니즘에서 출발해 민족과 역사에 눈 뜨기 시작하던 그의 절친한 벗 김수영 시인이 창졸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지 1년만에 그 또한 그렇게 쉽게 가버렸다. 시인은 병석에서 죽음을 예감하고 「산에 언덕에」를 썼고 이 시편은 부여 나성터 백마강변에 서 있는 그의 시비에 음각됐다. 작곡가 오동일은 그 시를 노래로 만들었다.
산에 언덕에
신 동 엽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외세… 압제… 「껍데기」 거부한 민족혼/모더니즘 지배 60년대 시단에 투철한 역사의식 우뚝/가난한 이웃에 대한 짙은 애정불굴의 민초삶 형상화『들으라 잊지 못할 나의 벗들이여/ 나를 추모하는 뭇 벗들이여/ 나 대신 그대들의 정열은 갓난 아들 조국에 바치라!/ 이것만이 내 생명의 율동이 요구하는 벗들에 향하는/ 마지막 바람이어라.』(「만약 내가 죽게 된다면」 중에서)
모더니즘의 유희적인 말장난과 관념놀음이 한국 현대시를 지배하던 60년대에 각성된 민족의식과 역사의식을 서정적인 시혼에 접목시켜 짧은 세월 절창으로 노래하다 병마에 잡혀간 신동엽(1930∼1969) 시인. 충남 부여읍 동남리 501의 3번지 그의 집 마당에는 아직 녹지 않은 잔설과 더불어 수국과 장미줄기와 대추나무와 향나무가 마르고 황량한 계절을 견디고 있다.
초가지붕을 개량해 기와를 얹기는 했지만 툇마루와 창살문에선 세월의 오래된 흔적이 그대로 묻어난다. 사람이 살지 않는 흔적은 마루에 그대로 배어 있다. 오랜 세월 먼지가 쌓이고 쌓여 누군가 생각날 때마다 걸레질을 해도 두터운 먼지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 빛바랜 마루는 시인의 육성은 들리지 않은 지 오래인,그저 기념물일 뿐임을 실감케 한다. 방문 위쪽에는 시인의 아내 인병선씨가 써놓은 시편 하나가 검정 목판 속 진노랑 양각으로 새겨져 걸렸다. 「우리의 만남을 헛되이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 싶은 마음이 당신과 내가 처음 맺어진 이 자리를 새삼 꾸미는 뜻이라…」.
담 밑 가장자리에 지난 여름의 탐스러운 수국은 만지면 그대로 금방 바스라져 버릴 것 같은 황갈색 노추로 매달려 있고 새침데기 가시내처럼 온 줄기에 가시를 뻗친 장미 줄기는 채도가 탁한 빨간 열매를 주절주절 달고 서 있다. 마당 가운데에는 빨래 건조대가 아이의 내복 바지와 수건,양말,팬티 등속을 걸치고 차가운 대기 속에 서 있다. 행랑채 댓돌 위에 신발 몇 켤레가 겨울의 냉기는 아랑곳 없이 옛날 이야기라도 나누듯 제 멋대로 놓여있다. 인기척을 눈치 챈 사내 하나가 방문을 나선다.
서산여중 미술교사 임의수씨(38). 교사와 일반인 등 10여명으로 구성된 「신동엽생가관리모임」의 일원인 그는 신동엽의 부친이 아들을 그리며 홀로 생가를 지키다가 지난 90년 이승을 떠난 뒤 아예 이곳 행랑채로 살림을 옮겼다. 그는 이제 1년이면 5백여명이 다녀가는 시인의 생가 안내인이 돼 버렸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연 곰나루의,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껍데기는 가라」 전문)
「껍데기는 가라」와 장편서사시 「금강」은 신동엽을 상징하는 시편들이다. 한반도를 뒤덮은 무기들과 외세에 대한 격렬한 심정적 반발과 함께 순결한 고향의 대지에 맥맥히 흐르는 백제의 정신을 녹여낸 것들이다. 이를 두고 평자들은 『민족문학의 중심부에 자리잡은 시인만이 가질 수 있는 통찰력과 표현력으로 우리의 시대적 과제를 제시한 것』이라거나 『우리의 시의식은 「금강」으로 하여 하나의 새로운 차원을 얻었다』고 칭송했다.
신동엽은 1930년 8월18일 충남 부여읍 동남리에서 신연순씨의 1남4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자신에 이어 2대독자로 태어난 아들에게 부친이 쏟아부은 애정은 각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인의 어린 시절은 지독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 독한 가난과 사랑 속에서 부여초등학교를 마친 시인은 학비와 기숙사까지 무료로 제공되는 전주사범학교에 들어간다. 그의 부친은 부여에서 전주까지 백리길을 마다 않고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자전거 뒤에 인절미 따위를 매달고 한달이면 서너번씩을 왕래했다. 사랑은 받아본 사람만이 제대로 줄 줄 아는 법,이렇게 청년기를 보낸 시인의 가슴은 뜨거운 감성과 가난한 이들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가득 찼다.
유난히 감수성이 예민했던 전주사범 시절,시인은 문학과 철학서적을 읽으며 홀로 고독을 생활처럼 씹었다. 그의 개성적인 시편들과 투철한 자존의 논리,역사적인 시각은 모두가 당시의 독서량과 사색에 힘입은 결과라고 친우들은 술회한다. 전주사범을 졸업하고 부친의 권유로 부여에 머물며 한학을 공부하던 시절에 시인은 서구적인 가치질서에서 벗어나 동양의 정신과 만난다. 주위에 산재한 수많은 백제 유물들에 새삼스런 관심을 쏟으며 백제정신에 심취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시인은 부친 곁을 떠나 49년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곧 6·25가 닥쳤고 반도에 널려 있던 시체더미와 처참한 상처들을 기억 속에 슬프게 저장해야 했던 시인은 전쟁통에 얻은 병으로 충남 보령에 있는 주산농고 교사로 있다가 끝내 각혈을 하고 집에서 요양을 하게 된다. 요양 중에 썼던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돼 시인은 본격적인 시업의 길로 들어섰다. 시인의 길로 접어들자마자 신동엽은 또다시 역사적인 4·19를 만난다. 혁명의 기운은 시인의 세계관과 맞물려 민족의식의 정화를 담은 독보적인 시편들을 한국 현대시사에 줄줄이 쏟아내게 만들었다.
『동학이여 동학이여./ 금강의 억울한 흐름 앞에/ 목 터진,정신이여/ 때는 아직도 미처 못다 익었나본데.』(「삼월」)
『미치고 싶었다./ 사월이 오면/ 곰나루서 피 터진 동학의 함성,/ 광화문서 목 터진 사월의 승리여』(「사월은 갈아엎는 달」)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 그리움에 회올려/ 하늘에 불 붙도록,/ 뼛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진달래 산천」)
시인은 그러나 69년,데뷔 10년만에 간암으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모더니즘에서 출발해 민족과 역사에 눈 뜨기 시작하던 그의 절친한 벗 김수영 시인이 창졸간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지 1년만에 그 또한 그렇게 쉽게 가버렸다. 시인은 병석에서 죽음을 예감하고 「산에 언덕에」를 썼고 이 시편은 부여 나성터 백마강변에 서 있는 그의 시비에 음각됐다. 작곡가 오동일은 그 시를 노래로 만들었다.
산에 언덕에
신 동 엽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