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달성의 편편화심- 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꽃이 지누나
기다려도 무심한 봄날
봄이 무거워 꽃이 지누나
진관사 가는 언덕
훨훨 날리는 꽃
꽃은 피어도
님 없는 봄날 꽃이 지누나
몸이 무거워 봄이 지누나
세상에 한 번
피어가는 날까지
소리 없는 자리
님 그리다 마는 자리
하늘이 넓어
산이 깊어 ...
이 가곡은 작곡가 김달성씨의 연가곡집 <사랑이 가기 전에>중에서 가장 널리 불리어지는 가곡으로서 시인 조병화씨의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에서 12편의 시를 골라 작곡한 것이다.
김달성씨는 우리의 고전음악과 서구음악 사이를 넘나드는 예술가로 평가된다.
이것은 우리 양악인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라 할 수 있으나 김씨의 경우는 두 번의 외국유학에서 이미 동.서양간의 정신적.정서적 방황을 깊이 체험한 탓이다.
가곡 <편편화심(片片花心)>이 작곡된 것은 1957년의 초겨울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미국의 저명한 하프주자인 아드 로라와 플룻 주자인 에드워드 비이토를 초청 협주곡의 밤을 열었고 서울 오페라단이 베르디 <춘희>를 서울과 부산에서 공연하는 등 다채로운 음악행사가 전개되고 있었다. 또한 6.25동란 때 음악인들이 모여 창단한 해군정훈음악대가 서울교향악단으로서 변모를 하고 본격적인 연주활동을 시작했을 때이다.
그러나 음악사조면으로 볼 때 아직은 어떤 뚜렷한 창작방향이 통일되어 있지는 않았고 그저 작곡가들은 제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길을 모색할 뿐이었다.
당시 김씨는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하여 부산사범학교에 있다가 서울로 옮겨 막 주변정리가 끝나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넉넉치 못한 교편생활 속에서도 그에게 힘이 되어 주었던 것은 그의 둘째 딸이었다. 딸의 재롱과 막 시작된 걸음마를 보면서 모든 시름을 덜었다.
그러나 불행은 그의 앞을 느닷없이 막아섰던 것이다.
딸의 귀여운 웃음이 그에게는 보람이자 그의 전부였었건만 어느날 그 딸애는 이 세상을 떠나갔다.
그는 그 순간 모든 것을 잃었다.
그의 정신세계가 나날이 황폐해가는것을 스스로 느꼈다.
어린 혈육을 잃은 슬픔은 그를 방황과 좌절, 타락의 나락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한동안 그런 시간을 보내던 김씨가, 뭐든지 하지 않으면 쓰러질 것이란 것을 깨닫고 일어섰을때 그는 조병화의 시집,사랑이 가기 전에>를 찾아내고 작곡을 서둘렀다.
당시 그의 작업은 창작을 한다기 보다는 어린 것의 죽음을 잊기위한 노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그는 예술가였다. 그는 한국적인 선율과 장단, 고전음악의 화성을 어떻게 서구음악의 기교속에서 조화시키고 재현시키느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본격적인 추구를 시도한 것이었다.
그는 '脫서구'작업속에서도 어느 시는 과거와 같은 기법으로 작곡하기도 했다.
이런 미분화적인 창작과정은 그의 정신세계 속의 서양음악의 깊이 때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연가곡은 작곡 이듬해인 1968년 6월 알토 김혜경씨와 계정식 바이얼니스트, 김종명 첼리스트, 김동성 피아니스트의 협연으로 발표되어 호평을 받았다. 조병화씨의 몸살앓이를 하는 듯한 한국적인 정서로 그려진 죽음의 풍경은 <작은 피>를 잃은 작곡가의 슬픔이 촉매가 되어 우리 가곡사에 하나의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것이다.
작곡가는 이 연가곡을 만든 뒤, 전통에의 회귀의 한계점에 부딪혀 소월의 시집을 들고 비엔나로 떠났다.
그는 비엔나 뮤직 아카데미에서 동서양의 조화점을 모색했다.
그러면서 그는 소월의 <먼후일> 등 10여곡의 가곡을 작곡했다. 그후 귀국하여 전통의 탐구에 골몰했으나 다시 벽에 부딪혀 70년 유럽으로 나가 정신적인 방황을 하고 이듬해에 귀국했다.
김씨는 1921년 함남함흥출생으로서 북한의 예술어용화정책에 반발하여 월남했다.
1백50여편의 가곡작품이 있고 <김달성가곡집>,<사랑이 가기 전에> 등을 펴냈다. 단국대 교수를 역임. 현재 동 대학 명예교수
기다려도 무심한 봄날
봄이 무거워 꽃이 지누나
진관사 가는 언덕
훨훨 날리는 꽃
꽃은 피어도
님 없는 봄날 꽃이 지누나
몸이 무거워 봄이 지누나
세상에 한 번
피어가는 날까지
소리 없는 자리
님 그리다 마는 자리
하늘이 넓어
산이 깊어 ...
이 가곡은 작곡가 김달성씨의 연가곡집 <사랑이 가기 전에>중에서 가장 널리 불리어지는 가곡으로서 시인 조병화씨의 시집 <사랑이 가기 전에>에서 12편의 시를 골라 작곡한 것이다.
김달성씨는 우리의 고전음악과 서구음악 사이를 넘나드는 예술가로 평가된다.
이것은 우리 양악인들의 일반적인 경향이라 할 수 있으나 김씨의 경우는 두 번의 외국유학에서 이미 동.서양간의 정신적.정서적 방황을 깊이 체험한 탓이다.
가곡 <편편화심(片片花心)>이 작곡된 것은 1957년의 초겨울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미국의 저명한 하프주자인 아드 로라와 플룻 주자인 에드워드 비이토를 초청 협주곡의 밤을 열었고 서울 오페라단이 베르디 <춘희>를 서울과 부산에서 공연하는 등 다채로운 음악행사가 전개되고 있었다. 또한 6.25동란 때 음악인들이 모여 창단한 해군정훈음악대가 서울교향악단으로서 변모를 하고 본격적인 연주활동을 시작했을 때이다.
그러나 음악사조면으로 볼 때 아직은 어떤 뚜렷한 창작방향이 통일되어 있지는 않았고 그저 작곡가들은 제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길을 모색할 뿐이었다.
당시 김씨는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하여 부산사범학교에 있다가 서울로 옮겨 막 주변정리가 끝나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넉넉치 못한 교편생활 속에서도 그에게 힘이 되어 주었던 것은 그의 둘째 딸이었다. 딸의 재롱과 막 시작된 걸음마를 보면서 모든 시름을 덜었다.
그러나 불행은 그의 앞을 느닷없이 막아섰던 것이다.
딸의 귀여운 웃음이 그에게는 보람이자 그의 전부였었건만 어느날 그 딸애는 이 세상을 떠나갔다.
그는 그 순간 모든 것을 잃었다.
그의 정신세계가 나날이 황폐해가는것을 스스로 느꼈다.
어린 혈육을 잃은 슬픔은 그를 방황과 좌절, 타락의 나락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한동안 그런 시간을 보내던 김씨가, 뭐든지 하지 않으면 쓰러질 것이란 것을 깨닫고 일어섰을때 그는 조병화의 시집,사랑이 가기 전에>를 찾아내고 작곡을 서둘렀다.
당시 그의 작업은 창작을 한다기 보다는 어린 것의 죽음을 잊기위한 노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그는 예술가였다. 그는 한국적인 선율과 장단, 고전음악의 화성을 어떻게 서구음악의 기교속에서 조화시키고 재현시키느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본격적인 추구를 시도한 것이었다.
그는 '脫서구'작업속에서도 어느 시는 과거와 같은 기법으로 작곡하기도 했다.
이런 미분화적인 창작과정은 그의 정신세계 속의 서양음악의 깊이 때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 연가곡은 작곡 이듬해인 1968년 6월 알토 김혜경씨와 계정식 바이얼니스트, 김종명 첼리스트, 김동성 피아니스트의 협연으로 발표되어 호평을 받았다. 조병화씨의 몸살앓이를 하는 듯한 한국적인 정서로 그려진 죽음의 풍경은 <작은 피>를 잃은 작곡가의 슬픔이 촉매가 되어 우리 가곡사에 하나의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것이다.
작곡가는 이 연가곡을 만든 뒤, 전통에의 회귀의 한계점에 부딪혀 소월의 시집을 들고 비엔나로 떠났다.
그는 비엔나 뮤직 아카데미에서 동서양의 조화점을 모색했다.
그러면서 그는 소월의 <먼후일> 등 10여곡의 가곡을 작곡했다. 그후 귀국하여 전통의 탐구에 골몰했으나 다시 벽에 부딪혀 70년 유럽으로 나가 정신적인 방황을 하고 이듬해에 귀국했다.
김씨는 1921년 함남함흥출생으로서 북한의 예술어용화정책에 반발하여 월남했다.
1백50여편의 가곡작품이 있고 <김달성가곡집>,<사랑이 가기 전에> 등을 펴냈다. 단국대 교수를 역임. 현재 동 대학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