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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잊을래도[김태홍 시/유신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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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래도 잊을래도
불고간 바람처럼 잊어버릴래도
별처럼 새삼 빛나는
아름다운 이름이여
잊을래도 그리워 잊어버릴래도
참아 그리운 엄마처럼
다정한 피묻은 이름이여

이 가곡은 작곡가가 나이 쉰을 앞에 두고 작곡하였다.
가곡이 여러 음악 장르중에서도 예술가의 정신내용이 가장 직접적이고 육성적인 표현이라 본다면 그 나이에 이런 뜨겁고도 애타는 가곡을 낳은 작곡가 유신씨의 당시의 정신적 생활은 자못 스산함 속에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유씨는 당시 한 젊은 여성과의 만남으로 심각한 고뇌 속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며 따라서 이 가곡 작곡의 직접적인 동기가 여기에 있었는지의 여부는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작곡가가 살매 김태홍 시인의 이 시를 택한 점과 이 가곡에 담겨있는 황량한 정열로 미루어 볼 때 스스로 가누기 어려운 감정 상태에서 뱉어진 소리라고 짐작하고 있다.

작곡가 유씨는 이 곡을 만들기 5년전인 1960년 서정주 시인의 '국화옆에서'를 완성했다.
가곡 '국화옆에서'에 대해 "우리 가곡에는 가락을 멋있게 만든 뒤에 시를 붙인 듯한, 말하자면 시어의 운이나 인터내이션의 딕션이 어색한 것이 적잖은데 나는 이 가곡에서 어디까지나 시구의 액츄얼한 리얼리티를 살리려고 애를 썼습니다."라고 설명한다.
형식면에서는 章節歌謠형식과 通章歌謠형식의 절충형인 작은 3부형식으로 1.3부분이 5음계적 界面調, 중간부는 5도위의 딸림조와 병행단조로 전조를 취하고 있다.
말하자면 서구 예술가곡의 형식속에 한국적인 운율이 짙게 담겨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곡자는 '국화옆에서'가 시의 어려움 때문인지 충분한 그의 감정표현을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늘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잊을래도'에서 '국화옆에서'에서 다하지 못했던 한국적인 이미지를 채워보려 했다,

작곡가는 당시 부산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거칠어진 마음을 창작욕에 용해시키면서 상당히 긴 시간을 들여 이 곡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는 이런 쉽고도 한국적인 가곡이 우리가곡의 하나의 이상적인 형태일것으로 생각하고 보람을 느꼈다. 그는 이 가곡을 완성한 뒤에도 이 곡이 널리 세상에 알려지기를 애쓰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당시 부산여고 음악교사였던 김석준씨가 우리정서가 담긴 음악을 보급하고자 힘을 씀으로써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유신씨의 출생지는 전남 해남, 국민학교때부터 그는 음악에 뛰어난 재질을 보여 바이얼린을 공부했다. 성장하여 그는 일제말기 오사까 음악학교로 진학하여 세계적인 테너가수를 꿈꾸었다. 그는 동경서 1주일에 한번씩 강의차 오사까로 내려오던 유명한 릴릭테너 오쿠다료죠교수의 권유로 동경의 동양음악학교로 옮겼다. 졸업과 동시에 귀국했던 그는 해방이후 다시 수업을 하기위해 밀항을 기도했으나 실패하여 동래중학교 음악교사자리를 얻어 정착함으로써 부산사람이 되었다.
1 Comments
이수현 2007.10.24 01:53  
다정한 피묻은 이름이라.. 묘한 대조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