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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비목[한명희 시/장일남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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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 당시 격전지였던 강원도 화천군 북한강 평화의 댐 일대에서 육군소위로 DMZ(비무장지대)에 근무하던 한명희(교수, 현 국립국악원장)는 어느날 순찰도중 썩어가는 칼빈총 한 자루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총의 주인이 누구일지를 생각하며 전쟁당시의 상황을 그려본다.
모윤숙의 "국군은죽어서 말한다"에서 처럼 고향의 아내는?
아니 그리운 초동친구, 애틋한 연인, 인자하신 양친, 학력에, 사랑의 설계,인생의 꿈은?...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은 바람따라 구름따라 포연에실려 무산되고 말았다.일체가 뜬구름이요 일체가 무상이다.
유명한 가곡 "비목"의 시상(詩想)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한명희는 비목을 처음 발표할 때에 그 가사의 생경성과 그 사춘기적 무드의 치기가 부끄러워서 한일무라는 가명을 썼다.
여하튼 그로부터 6월의 녹음은 더더욱 한명희에게 각인되어 갔다. 녹음이 있기에 자연은 아름답고 젊음이 있기에 인생이 아름답다지만 바로 그 녹음, 그 젊음이 실은 가없는 비탄의 바다요, 통곡의 물결일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그때 그곳에서 실감했다.

이렇게 왕년의 격전지에서 젊은 비애를 앓아가던 어느날 초가을의 따스한 석양이 산록의 빠알간 단풍의 물결에 부서지고 찌르르 산간의 정적이 고막의 환청을 일으키던 어느 한적한 해질녘, 한명희는 어느 잡초우거진 산모퉁이를 지나며 문득 흙에 깔린 돌무더기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필경 사람의 손길이 간 듯한 흔적으로 보나 푸르칙칙한 이끼로 보나 세월의 녹이 싸이고 팻말인 듯 나뒹구는 썩은 나무등걸 등으로 보아 그것은 결코 예사로운 돌들이 아니었다. 그렇다. 그것은 뜨거운 전우애가 감싸준 무명용사의 유택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어쩌면 그 카빈총의 주인공, 자랑스런 육군소위 계급장이 번쩍이던 그 꿈많던 젊은 장교의 마지막 증언장이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한명희는 그 후 전역하게 되고 2년 가까이 정들었던 그 능선 그 계곡에서 나와 속절없이 도회적인 세속에 부평초처럼 표류하게 되었지만 그의 뇌리, 그의 정서의 텃밭에는 늘 그곳의 정감과 환영이 걷힐 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시절, 그러니까 한명희가 당시 TBC 음악부 PD로 근무하면서 우리가곡에 의도적으로 관심을 쏟던 의분의 시절이다. 평소 방송일로 자주 만나던 작곡가 장일남으로부터 신작가곡을 위한 가사 몇편을 의뢰받았다. 바로 그때 제일 먼저 그의 머리속을 스치고간 영상이 다름아닌 그 첩첩산골의 이끼덮인 돌무덤과 그 옆을 지켜섰던 하얀 산목련이었다. 그는 이내 화약냄새가 쓸고 간 그 깊은 계곡 양지녘의 이름모를 돌무덤을 포연에 산화한 무명용사로, 그리고 비바람 긴세월 동안 한결같이 그 무덤가를 지켜주고 있는 그 새하얀 산목련을 주인공따라 순절한 여인으로 상정하고 당시의 정감들을 그의 본연의 감수성으로 꿰어봤다. 바로 지금의 "비목의 시가 완성된 것이다.그리고 장일남의 작곡으로 드디어 노래가 되어 온 국민의 마음을 울리게 된다.

비목(碑木)은 그 가사를 두고도 별의 별 이야기들이 있었다. 한때 비목이 사전에도 나와있지 않다보니 패목(牌木)의 오기였을것이라는 국어학자도 있었고 화약연기를 뜻하는 "초연(硝煙)을 "초연하다"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궁노루는 사향노루를 뜻한다. " 당시 어느날 사향노루 한 마리를 잡았는데 홀로 남은 암놈이 매일밤을 울어댔다. 그당시의 가슴저미는 감회와 회한이란 필설로 대신할 수가 없었다" 고 한명희는 회고한다. 비목의 2절은 이같은 단장의 비감이 서려있는 것이다.

(이상 월간조선 1987. 6 에서 발췌 편집)

『진실로 오늘 우리는/그날 그대들이 흘린 피값으로 편히 잠들고/그대들이 바친 목숨으로 자유로히 노래한다/조국의 소명으로 꽃잎처럼 산화해간…』(홍윤숙)

젊은 혼령을 무슨 말,무슨 노래로 위로할 것인가. 6.25가 터지고 학도호국단으로 편제됐던 학원은 그대로 병영이 되었다.중학교 4학년이상은 교복을 그대로 입은 채 목총을 메고 낙동강 전선으로 떠났다.그러나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를 부르며 의기양양하게 전선으로 간 소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학도병이라는 이름으로 군번도 없이 전사한 것이다. 또 대부분의 병사들은 제 이름조차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농촌출신 장정들이었다. 오죽하면 논산훈련소에 한글을 깨우치게 하는 한글학교가 있었을까.그 의로운 죽음으로 이 나라는 이 만큼이라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오늘만이라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지난 역사를 너무도 쉽게 잊는다. 이름없는 골짜기에서 전우가 만들어 준 돌무덤에 묻히고 그 위에 꽂힌 비목만이 『먼 고향 초동친구,두고 온 하늘가』를 그리고 있으리라. 무명용사의 외로운 혼령은 오늘도 휴전선에서 떠돌 것이다. 초연이 쓸고 간 계곡에는 다시 들꽃이 피고 이름없는 비목에는초여름의 따가운 햇볕이 눈부시다. 다시 그 무성한 유월이 오고 무명용사의 명복을 빌때다.

〈이상 세계일보 96. 6. 6 문화칼럼 중에서 인용〉

한 명희 : 1939년 충북 중원 출생, 충주고, 서울음대 국악과, TBC프로듀서, 서울 시립대 음대 교수 역임
1 Comments
Pacem 2008.02.16 14:35  
"궁노루"는 이노래를 부르고 나서 처음 알았습니다.
몰랐을 때는 "궁노루산"이 휴전선 어딘가에 있는 줄 알았고...
50이 넘어서야 비목공원을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