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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화[김형준 시/홍난파 곡]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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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라노 김천애씨가 지난달 30일 새벽 노환으로 혼자 살고있던 미국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별세했다. .
1942년 동경 무사시노(무장야)음대를 졸업한후 귀국한 고인은 그해 관현악단 서울심포니의 창단멤버로 활약했고 해방직후에는 현제명씨 등과 서울대 음대 전신인 남산음악학교를 설립하는데 참여하는 등 해방후 국내 음악발전에 크게 공헌했으며 72년 이민 가기 전까지 숙명여대교수와 학장으로서 많은 제자를 길렀다.고인이 우리 음악사에 남긴 가장 큰 공헌은 「봉선화」를 무대에서 최초로 불러 우리의 민족가곡으로 승화시켜 활짝 꽃피게 한 점이다. 1942년 동경 무사시노음대를 졸업하면서 각 음대 졸업생 대표들만 참가하는 히비야공회당의 「전일본 신인음악회」에서 당시 23세였던 「김천애양」이 흰색 한복을 입고 출연,독일가곡을 부른후 앙코르곡으로 「봉선화」를 불러 음악회에 참석한 한국 유학생들은 물론 다른 청중들에게도 깊은 감동을 안겨줬던 것.

지난 90년11월 이민간지 18년만에 고국을 방문했던 고인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음악회가 끝난후 한국 학생들이 모두 무대 뒤로 찾아와 동경 한국YMCA로 몰려가 밤새 울면서「봉선화」를 불렀던 감격의 순간을 회상하기도 했다.나라잃은 슬픔을 애조띤 멜로디와 가사로 은유한 「봉선화」가 민족가곡으로 유명해짐에 따라 고인은 해방될때까지 여러번 일경에 불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홍난파가 민족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것은 1915년, 평소 그의 음악적 재질을 아끼던 김인식으로 부터 조선정악전습소 양악부에 교사로 임명되어 3년동안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공부를 게속하는 동안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1918년 일본에서 가장 권위있는 우에노 음악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렇지만 그에게 늘 뒤따라다니고 있는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웠다. 그의 젊음의 욕망은 현실속에 놓여있는 경제적문제와 시대적 배경이, 식민지 나라인 조선의 시골청년이라는 여건의 그를 예술가로 성장시켜 줄 수 있는 환경은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유학기간중 늘 고생과 빈민속에서 시달리다 어렵게 들어간 음악학교를 2년만에 중단하고 귀국한다.

그는 귀국후 1년간을 놀고 지내다 1920년 늦은 봄에 재차 일본 땅을 밟았으나 그가 다니던 우에노 음악학교는 난파가 조선독립운동에 가담해서 소요를 일으킨 불온한 조센징이라는 누명으로 사상이 불온하다 해서 복교가 취소되었다.

이때 그가 느낀 나라 잃은 슬픔과 모멸감은 말할 수 없는 울분의 감정으로 복받쳐 나왔다. 같은 인간으로서 한국인을 천시하는 멸시감을 생각할 때 난파의 젊은 가슴속에는 쓰라린 민족 한을 안은채 침략자의 위선과 저주감을 깊이 새기면서 고국으로 돌아와 방황속에서 생활을 위해서 잠시간 매일신보의 기자로 있었으며 1920년경 몇개의 단편이 실린 그의 창작집 '처녀혼'을 발표했다.

<이하 월간 오디오에서 발췌>

그당시 난파의 이웃집에 살던 김형준의 집에 매년 봉선화가 여름철에 만발해서 지는 모습이 처량하여 마치 나라잃은 슬픈감정으로 비유하면서 홍난파의 요구로 김형준이 가사를 집어넣고 제목을 봉선화로 바꾸었다. 1920년대에 기악곡의 선율이 처음나왔으니 봉선화가 나온 시기도 아마 1920년대가 아닐까 추정된다. 오늘날 우리가 즐겨부르는 '봉선화'의 선율은 창작집 '처녀혼'의 서두에, 처음은 가곡이 아닌 기각곡으로 발표했는데 1925년 초판발행된 '세계명작 합창곡집'에 이 작품이 실려있는 걸로 봐서 그후에 가곡으로 알려진 것이다.

<이하 동아일보 95. 4. 3 기사에서 발췌>

「봉선화」는 고인이 히비야공회당 공연에서 부르기 전까지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곡이었는데 그해 가을 서울 평양등지에서 귀국공연을 가지면서 한민족 애창곡의 하나가 된것. 그 결과 일제는 가사내용을 문제삼아 가창금지는 물론 빅터레코드사에서 제작된 그의 음반까지 판매를 불허했다. 그러나 그는 교회와 학교강당을 중심으로 기회있을 때마다 「봉선화」를 계속 불러 경찰에 연행되거나 유치장에 갇히기도 했다.

1919년 평남 강서에서 태어난 고인은 음악을 좋아하던 아버지(감리교목사)의 영향으로 평양 정의여고를 졸업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는데 무사시노음대 졸업생대표로 선발될 만큼 천부적인 가창력을 인정받았다. 평생을 홀로 지냈는데 『음악활동에 바빠 결혼은 꿈도 꾸지 못했다』고 밝힐만큼 음악과만 살아왔으며 개인 사정으로 미국으로 이민간 후에는 교회연주를 주로 해왔다.그러나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해 고령에도 불구, 특별히 돌봐주는 사람 없이 혼자 생활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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