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고파[이은상 시/김동진 곡]
「가고파」의 바다에 해가 진다. 아직도 해는 창창하게 남아 갈수록 사위어갈 그 빛을 바다에 뿌릴 무렵이지만,무학산 아래에 자리 잡은 마산 앞바다는 산 뒤에 가려진 해로 인해 벌써 그늘진다. 산 너머로 숨어든 해는 그 빛을 비스듬히 하늘로 쏘아올려 장마 뒤 끝 합포만 상공에 떠 있는 뭉게구름에 반사된다. 그 구름이 석양을 되비쳐내니 마산 앞바다 합포만은 바야흐로 엷은 장미빛 물감이 풀어져 있는 듯 하다. 시조시인 노산 이은상(1903∼1982)이 「가고파」를 쓴 것은1932년 이화여전 교수를 그만두고 동아일보사에 재직할 때였다.식민지시대에 객지살이를 하던 그에게는 세상사가 힘들면 힘들수록 고향은 항상 돌아가고 싶은 안온한 어머니같은 존재였다. 노산은 난해한 기교없이 고향과 유년기를 그리는 심정을 자연스럽게 「가고파」에 담아냈다. 오늘날 노산은 가장 대중적인 시조시인으로 부각돼 소월과 함께 가장 많은 작품이 작곡돼 널리 노래로 불려지고 있지만,그중에서도 「가고파」는 다른 노래들에 비해 더 많이 알려진 노산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당시 노산과 절친한 친구였던 국문학자 양주동은 숭실전문학교 2학년 국어시간에 학생들에게 이 시를 낭송해주었다. 그 자리에 마침 작곡가의 꿈을 키우던 김동진씨가 학생으로 앉아 있었고,뭉클한 감회를 느낀 김동진은 즉석에서 「가고파」의 4장까지 작곡해 오늘의 유명한 가곡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고파」의 대중적 인기는 김씨가 6.25때 남으로 피난내려오다 휴전선 부근에서 아군의 검문에 걸렸던 당시의 일화로도 충분히 입증된다.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을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던 김동진씨는 검문하는 군인에게 『「가고파」라는 노래를 아느냐,내가 바로 그 노래의 작곡자다』고 말해 무사히 검문소를 통과했다는 것이다.
<이하 김동진 자전에세이 "가고파"에서 정리>
김동진은 이후 가고파의 나머지 6수에 대한 작곡을 미루어오다 (본인의 자서전에서는 음율을 찾아 40여년을 헤메었다고 표현하였음) 1973년 봄 마산에서 노산선생의 시비건립때 초대되어 간 자리에서 모인 사람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가고파 전편을 직접 부르게 되었고 이때 사람들이 나머지 6수는 왜 작곡하지 않느냐고 채근하였다. 김동진은 이 때 나머지 6수에 대한 작곡을 마무리하기로 결심하고 착수하여 1973. 12. 10 노산선생의 고희 기념때 맞추어 숭의여전 강당에서 테너 김화용씨의 노래로 발표하게 된다.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으며 전편보다도 훨씬 낫다는 평을 듣게 된다. 20대의 감성과 60대의 감성이 같지 않을진대 가고파 후편은 40년을 뛰어넘은 시간을 이어 주는데에도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김동진선생은 이 가고파 후편을 쓰러져 가는 자신을 다시 일으켜세운 작품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하 세계일보 기사중에서>
노산은 서울사람이었으나 동래로 내려갔다가 노산을 낳던 해 마산으로 이사간 이승규씨의 6남매중 둘째로 태어났다. 노산은 기독교적인 다복한 가정분위기에서 자라났다.한의사였던 부친은 노산을 낳은 이듬해에 신자가 되어 마산에서는 첫교회를 세우는 한편,창신학교(현 창신중고교)를 설립한 지방유지였다. 노산은 아버지가 설립한 학교를 마친후 그 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연희전문에 입학한다. 이후 와세다대학 사학부에 청강생으로 들어갔다가 동양문고에서 국문학을 연구한 뒤 귀국,각종 사회단체 학계 언론계 등에 몸담아 온 다채로운 경력을 지녔다.
그가 시조에 본격적으로 손을 댄 것은 1923년 등단작 「고향생각」이후 1927년 경 일본에 있을 때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시조집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발간한 것은 「가고파」를 짓던 해인 1932년. 식민지시대의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그는 고향을 희망의 등불로 마음 속에 밝혀놓은 것이다. 이후 노산은 전래의 시조형식을 현대적으로 소화한 새로운 시조시형식을 개척하며 2천여편의 뛰어난 시와 시조를 남겼다.「가고파」 외에도 「성불사」「옛동산에 올라」「고향생각」「사우」등이 모두 노래로 만들어져 대중과 친숙하다.
마산에서 만난「합포문화동인회」회장 조민규씨(60·대한적십자사 마산지부 사무국장)는 노산 생전에 친아들처럼 관계가 돈독했던 인물이다. 조씨는 노산의 생가터와 「내 놀던 옛동산」의 무대를 일일이 안내하며 노산의 추억을 더듬었다. 그는 노산을 두고 『인간적으로는 다정다감했고 국토를 사랑하는 마음과 자연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분』이라고 말한다. 그처럼 자연과 고향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노산에게 70년대 이래 공업화의 상징도시로 변해버려 그가 사랑했던 「가고파」의 마산 앞바다가 황폐해지는 모습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조씨는 『생전에 마산이 공업화 돼서 바다가 죽어가고 자연경관이 훼손되는 것에 대해 노산선생은 눈시울을 적실 정도로 애석해했다』며 합포만을 응시한다.노산은 조선일보 편집국 고문으로 일하다 1938년 그만두고 국토순례길에 올라 자연과 인생의 교감을 시조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이 때 지은 숱한 기행문과 기행시조는 노산문학의 특징으로 자리잡는다. 가곡으로 유명한 「장안사」나 「성불사의 밤」도 이 때 만들어진 것들이다.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강화될 무렵 그는 일제의 검속을 피해 은신생활을 하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돼 이듬해 9월 기소유예로 풀려난다. 전남 광양에서 금광을 하는 친구에게 의탁해 또다시 긴 은신생활을 하던 노산은 45년 1월,사상 예비검속에 걸려 구금됐다가 8·15을 맞아 풀려난다. 광복 이후 노산의 행로는 교수로,각종 기념사업회 활동 등으로 분주하게 살아온 화려한 길이었다.
「노산」이라는 호는 마산시 상남동 그의 생가 뒷산이었던 「노비산」에서 따온 것이다. 노산의 생가터에는 3층짜리 대형 극장이 들어서 있었고 노산의 출생을 기념해 그의 부친이 파서 아들의 이름을 붙였다는 「은상샘」은 도로변 남의 집 쇠창살 문 안쪽에 초라한 우물로 숨어 있다. 노비산 또한 산이라기보다는 이제는 작은 언덕배기에 불과할 정도로 산비탈에 밀집한 주택가 끄트머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노산은 어린시절 자주 이 동산에 올라와 한 눈에 바라보이는 마산 앞바다를 굽어보며 놀았다. 시인은 가고 없는 이 「옛동산」에는 해바라기 몇 그루만 따가운 석양을 가득 안고 바람에 흔들거린다.
『내 놀던 옛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구료 // 지팽이 더저 짚고 산기슭 돌아나니 / 어느 해 풍우엔지 사태져 무너지고 / 그 흙에 새 솔이 나서 키를 재려 하는구료』(「옛동산에 올라」 전문)
"내고향 남쪽 바다 /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 꿈엔들 잊으리오 /
그 잔잔한 고향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어릴제 같이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간들 잊으리오/그 뛰놀던 고향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이은상이 마산 출신임을 자랑스러원하는 마산 사람들은 산호공원과 돝섬 정상, 무학산 아래 있는 약수터에 『가고파』시비를 세웠다.
이곳 마산의 지역 음악인들은 '노산문학의 밤'을 해마다 열어 그를 추모하고 있다.
세계일보 96. 8. 24
1988년에는 가고파와 선구자를 소재로 한 기념우표가 음악시리즈중 하나로 발행된바 있다.(위 사진: 당시 발행된 우표)
당시 노산과 절친한 친구였던 국문학자 양주동은 숭실전문학교 2학년 국어시간에 학생들에게 이 시를 낭송해주었다. 그 자리에 마침 작곡가의 꿈을 키우던 김동진씨가 학생으로 앉아 있었고,뭉클한 감회를 느낀 김동진은 즉석에서 「가고파」의 4장까지 작곡해 오늘의 유명한 가곡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고파」의 대중적 인기는 김씨가 6.25때 남으로 피난내려오다 휴전선 부근에서 아군의 검문에 걸렸던 당시의 일화로도 충분히 입증된다.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을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던 김동진씨는 검문하는 군인에게 『「가고파」라는 노래를 아느냐,내가 바로 그 노래의 작곡자다』고 말해 무사히 검문소를 통과했다는 것이다.
<이하 김동진 자전에세이 "가고파"에서 정리>
김동진은 이후 가고파의 나머지 6수에 대한 작곡을 미루어오다 (본인의 자서전에서는 음율을 찾아 40여년을 헤메었다고 표현하였음) 1973년 봄 마산에서 노산선생의 시비건립때 초대되어 간 자리에서 모인 사람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가고파 전편을 직접 부르게 되었고 이때 사람들이 나머지 6수는 왜 작곡하지 않느냐고 채근하였다. 김동진은 이 때 나머지 6수에 대한 작곡을 마무리하기로 결심하고 착수하여 1973. 12. 10 노산선생의 고희 기념때 맞추어 숭의여전 강당에서 테너 김화용씨의 노래로 발표하게 된다.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으며 전편보다도 훨씬 낫다는 평을 듣게 된다. 20대의 감성과 60대의 감성이 같지 않을진대 가고파 후편은 40년을 뛰어넘은 시간을 이어 주는데에도 아무런 무리가 없었다. 김동진선생은 이 가고파 후편을 쓰러져 가는 자신을 다시 일으켜세운 작품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하 세계일보 기사중에서>
노산은 서울사람이었으나 동래로 내려갔다가 노산을 낳던 해 마산으로 이사간 이승규씨의 6남매중 둘째로 태어났다. 노산은 기독교적인 다복한 가정분위기에서 자라났다.한의사였던 부친은 노산을 낳은 이듬해에 신자가 되어 마산에서는 첫교회를 세우는 한편,창신학교(현 창신중고교)를 설립한 지방유지였다. 노산은 아버지가 설립한 학교를 마친후 그 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연희전문에 입학한다. 이후 와세다대학 사학부에 청강생으로 들어갔다가 동양문고에서 국문학을 연구한 뒤 귀국,각종 사회단체 학계 언론계 등에 몸담아 온 다채로운 경력을 지녔다.
그가 시조에 본격적으로 손을 댄 것은 1923년 등단작 「고향생각」이후 1927년 경 일본에 있을 때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시조집을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발간한 것은 「가고파」를 짓던 해인 1932년. 식민지시대의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그는 고향을 희망의 등불로 마음 속에 밝혀놓은 것이다. 이후 노산은 전래의 시조형식을 현대적으로 소화한 새로운 시조시형식을 개척하며 2천여편의 뛰어난 시와 시조를 남겼다.「가고파」 외에도 「성불사」「옛동산에 올라」「고향생각」「사우」등이 모두 노래로 만들어져 대중과 친숙하다.
마산에서 만난「합포문화동인회」회장 조민규씨(60·대한적십자사 마산지부 사무국장)는 노산 생전에 친아들처럼 관계가 돈독했던 인물이다. 조씨는 노산의 생가터와 「내 놀던 옛동산」의 무대를 일일이 안내하며 노산의 추억을 더듬었다. 그는 노산을 두고 『인간적으로는 다정다감했고 국토를 사랑하는 마음과 자연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분』이라고 말한다. 그처럼 자연과 고향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노산에게 70년대 이래 공업화의 상징도시로 변해버려 그가 사랑했던 「가고파」의 마산 앞바다가 황폐해지는 모습은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조씨는 『생전에 마산이 공업화 돼서 바다가 죽어가고 자연경관이 훼손되는 것에 대해 노산선생은 눈시울을 적실 정도로 애석해했다』며 합포만을 응시한다.노산은 조선일보 편집국 고문으로 일하다 1938년 그만두고 국토순례길에 올라 자연과 인생의 교감을 시조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이 때 지은 숱한 기행문과 기행시조는 노산문학의 특징으로 자리잡는다. 가곡으로 유명한 「장안사」나 「성불사의 밤」도 이 때 만들어진 것들이다.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강화될 무렵 그는 일제의 검속을 피해 은신생활을 하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돼 이듬해 9월 기소유예로 풀려난다. 전남 광양에서 금광을 하는 친구에게 의탁해 또다시 긴 은신생활을 하던 노산은 45년 1월,사상 예비검속에 걸려 구금됐다가 8·15을 맞아 풀려난다. 광복 이후 노산의 행로는 교수로,각종 기념사업회 활동 등으로 분주하게 살아온 화려한 길이었다.
「노산」이라는 호는 마산시 상남동 그의 생가 뒷산이었던 「노비산」에서 따온 것이다. 노산의 생가터에는 3층짜리 대형 극장이 들어서 있었고 노산의 출생을 기념해 그의 부친이 파서 아들의 이름을 붙였다는 「은상샘」은 도로변 남의 집 쇠창살 문 안쪽에 초라한 우물로 숨어 있다. 노비산 또한 산이라기보다는 이제는 작은 언덕배기에 불과할 정도로 산비탈에 밀집한 주택가 끄트머리에 자리잡고 있었다. 노산은 어린시절 자주 이 동산에 올라와 한 눈에 바라보이는 마산 앞바다를 굽어보며 놀았다. 시인은 가고 없는 이 「옛동산」에는 해바라기 몇 그루만 따가운 석양을 가득 안고 바람에 흔들거린다.
『내 놀던 옛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구료 // 지팽이 더저 짚고 산기슭 돌아나니 / 어느 해 풍우엔지 사태져 무너지고 / 그 흙에 새 솔이 나서 키를 재려 하는구료』(「옛동산에 올라」 전문)
"내고향 남쪽 바다 / 그 파란 물
눈에 보이네. / 꿈엔들 잊으리오 /
그 잔잔한 고향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어릴제 같이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간들 잊으리오/그 뛰놀던 고향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이은상이 마산 출신임을 자랑스러원하는 마산 사람들은 산호공원과 돝섬 정상, 무학산 아래 있는 약수터에 『가고파』시비를 세웠다.
이곳 마산의 지역 음악인들은 '노산문학의 밤'을 해마다 열어 그를 추모하고 있다.
세계일보 96. 8. 24
1988년에는 가고파와 선구자를 소재로 한 기념우표가 음악시리즈중 하나로 발행된바 있다.(위 사진: 당시 발행된 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