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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최영섭 선생, '그리운 금강산'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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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 : 작곡가 최영섭 선생, '그리운 금강산'의 비밀 
 
[CBS노컷뉴스 새해 특별대담] "금강산 관광 재개는 남북통일 필수조건…실제로 가보니 알프스보다 좋아"

2009년이 밝아오면서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이에 구랍 30일 '노래하는 CEO' 이정식 CBS 사장과 작곡가 최영섭 선생이 만나 국민 가곡 '그리운 금강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1929년 생으로, 올해 팔순을 맞이한 최 선생은 또렷한 기억력으로 '그리운 금강산'에 대해 회고했다.
▶이정식 CBS 사장: 통일의 염원을 담은 가곡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하게 된 동기는 무엇입니까?

-최영섭 선생: "1961년에 단숨에 작곡된 가곡입니다. 그 당시 여의도가 아닌 남산 KBS 방송국에서 '이주일의 노래'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먼저 '한강의 노래'를 작곡해 그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졌는데 반응이 좋아서 계속해 의뢰가 들어왔고, '낙동강 칠백리' '백두산은 솟아있다' '압록강은 흐른다' 등이 탄생했습니다. 모두 한상억 선생이 작시 한 것입니다. 당시 이 가곡들이 '이주일의 노래'를 통해 들려지면서 해외 교포들한테도 팬 레터가 올 정도였습니다. 그 후 어느 날 KBS 국제방송 관계자를 만났는데, 그 분이 '한강의 노래', '낙동강의 노래', '백두산의 노래' 등 우리나라 자연산천을 주제로 한 노래들이 인기를 모으고 있는데 어찌 가장 아름다운 산인 금강산에 대한 노래는 없냐고 했습니다. 이 말을 한선생에게 전했더니, 그렇지 않아도 금강산에 관한 시를 써놨다면서 그 자리에서 보여줬습니다. 그 시는 하루 이틀 전에 쓴 게 아니라 적어도 반년전에 쓴 시로 보였습니다. 가사가 너무 애절하고 좋아서, 그날 곧장 작곡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운 금강산'을 30년 넘게 불러 왔습니다. 노래 첫 부분에 '주제'라는 가사가 있는데, '주재'도 본 것 같습니다. '주제'와 '주재' 어떤 것이 맞고, 어떤 의미인가요?

"첫 부분 '누구의 주제련가'의 원래 가사는 '누구의 주재련가'였습니다. 누구의 '테마'가 아니라, 신의 섭리로서 누구의 '주재'를 뜻합니다. 한자로 주재(主宰), 영어로 크리에이션(creation)의 의미인데, 출판사의 실수로 '주제'가 됐고, 한번 인쇄가 되니까 계속 그렇게 됐습니다. 다행이 '주제'와 '주재'의 쓰임이 한 30%는 뜻이 닮아서 그냥 내버려뒀습니다. 슈베르트의 대표곡인 '송어'도 처음 '숭어'로 불려지면서, 지금도 '숭어'라고 하는 경우와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재하셔서 만든 맑고 고운 금강산이라는 의미인거네요. 일종의 비사군요. 그런데 한상억 선생도 '주재'가 '주제'로 바뀐 것에 대해 그냥 놔두자고 했습니까?

"네. 맞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리고 한 선생도 정반대가 아닌 그래도 조금은 뜻이 비슷해서 아무말씀 안했습니다. 한번 흐른 물을 옆으로 다시 흐르게 하는 것이 쉬운일은 아니더군요"

▶궁금한 것은 6.25 전쟁 12주년을 맞아서 교육부(당시 문교부)의 청탁으로 '그리운 금강산'이 작곡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인가요?

"아닙니다. 1961년도에 KBS의 요청으로 우선 완성됐습니다. 그리고 1962년 KBS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한국 사람이 작곡한 칸타타를 연주해 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내 강산'이라는 제목아래 12장으로 된 칸타타를 작곡하게 됐습니다. 그 중 끝에서 두번째 곡이 '그리운 금강산'입니다. 그런데 잘못 와전이 돼서 칸타타 속의 한 곡일뿐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리운 금강산'은 먼저 만들어진 곡입니다. 원본 데이터를 보니까 1961년 8월 18일로 돼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8.15해방을 기념하기 위해 KBS에서 요청한 게 되는건가요?

"그것도 반드시 그렇것만은 아닙니다. 그 시를 가지고 8월10일 경에 갔으면, 이것을 8.15 기념 노래로 하자고 했을 텐데 그 시를 KBS에 가져간 것이 8월17일입니다. KBS가 8.15 기념으로 뭘 해야할까 마땅한 시가 없는 시점에 뒤늦게 가지고 간 셈입니다. 그날 곡을 붙여도 좋다는 승인을 받았고, 그 다음날 작곡하고 피아노 반주까지 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나중에 노래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모으면서 이같이 잘못 알려지게 된 것 같습니다."

▶교육부 청탁이라는 이야기는 전부 틀린 것이네요. 6.25전쟁 12주년하고 상관없는건가요?

"KBS 요청이라고 하는게 맞습니다. 교육부하곤 관계가 없습니다. 참, 그런데 칸타타 프로그램을 보니까 6.25전쟁 12주년이라고 돼 있었습니다. 아마도 칸타타를 했던 프로그램에 그렇게 돼 있어서 오해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산하를 주제로 한 일련의 창작 가곡이네요. 순수하게 당시 KBS 음악프로그램을 위해서 만든 작품이고요?

"맞습니다. '이주일의 노래'라는 프로그램을 위해 작곡했습니다. 당시에는 여흥을 즐기는 수단이 라디오가 유일했습니다. 당시 '그리운 금강산' 작곡료를 2000원(현재 가치 30만원 정도)을 받았습니다다. 물론 그후 '그리운 금강산'이 저한테 가져다 준 부와 명예는 천문학적이지만. 그리고 현재 외국사람이나 외국단체에서 녹음된 것이 16군데 이릅니다. 플라시도 도밍고도 이 노래를 부른적이 있고, 러시아의 볼쇼이 합창단도 불렀습니다."

▶이번에 플라시도 도밍고가 한국을 찾는데, 다시 한 번 부를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웃음) 88년 당시에는 소프라노 홍혜경하고 같이 불렀는데, 그때 당시를 기억하자면, 플라시도 도밍고의 발음은 거의 한국 사람 못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운 금강산'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나 말씀하고 싶은 게 있습니까?

"이 노래를 녹음할 때가 문득 떠오릅니다. 저하고 대학 동기동창이었던 지휘자 이남수가 녹음을 했습니다. 그 동안 제 곡을 녹음하면서 한 마디도 안했던 친구인데, '그리운 금강산'을 녹음하고 나서 나를 찾더니 어떻게 이런 곡을 다 작곡할 수 있었냐며 처음으로 칭찬을 하더군요. 그리고 다른 곡 작곡했을때는 못들어봤던, '좋은 작품 쓰셨어요'란 인사를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작곡 실력이 늘었던 것은 아닙니다. 시가 주는 이미지를 그대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최근 음과 음 사이를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려봤더니 '산' 모양이 나오더군요. 가사와 곡이 잘 맞아떨어졌던 것 같습니다. 팔순인 지금 정초 대담을 하니까 30대 초반 당시가 생각납니다."

▶'그리운 금강산'은 10년 후 남북적십자회담(1972년)이 개최되면서 '통일 주제가'가 돼 국민 가곡으로 떠 올랐습니다. 2008년 어느 조사에서도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성악곡이 '그리운 금강산'이었습니다. 또 금강산 관광이 1998년부터 시작되면서 통일에 대한 염원이 일부라도 실현되는 듯 했습니다. 지난해 7월 관광객 피살 사건으로 중단사태를 맞고 있습니다. 여하튼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하신 분으로서 금강산에는 몇번 가보셨고, 느낌이 어떠셨는지요?

"2000년 5월 15일 처음 갔습니다. 애초 1998년 11월 18일 처음으로 금강산 여행길이 열릴 때 VIP로 초청받았는데 못간다고 했습니다. '그리운 금강산' 작곡자가 왜 못가냐고 했는데, 금강산에 대한 노래를 작곡했지만, 지금은 아니다라고 그때 말했습니다. 남북적십자 회담이 처음 열릴 때, 한상억 선생이 3군데를 직접 고쳤습니다. '더럽힌 자리'를 '예대로인가'로, '우리 다 맺힌 원한'을 '슬픔'으로, '더럽힌지 몇해를'을 '못가본지 몇해를'로 말입니다. 당시 남북 대치 상태 였기 때문에 그런 가사들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1998년 북한에서 우리측에 요청이 왔는데 북한땅에서는 '애국가'하고 '그리운 금강산'을 노래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합니다. 가슴이 덜컹했습니다. 처음 당시 가지 못했던 이유입니다. 뭐 이런저런 마음의 부담으로 처음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2000년에 가실때는 그런 부담을 털어버리신 건가요?

"2000년 5월에 갈 때도, 방송사에서 나를 취재하러 간다고 취재진이 따라 붙었습니다. 그리고 곱상한 안내원이 따로 가이드를 한다고 따라 붙었죠. 혹시라도 북한에서 잘못되는 것은 아닐까 우려했습니다. 배에서도 '그리운 금강산' 작곡한 사람이 있다고 하니, 선상음악회가 '그리운 금강산'이 됐습니다. 거기서도 북한에서는 '애국가'와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기우였고, 속으로 혼자 걱정만 한 셈이 됐습니다. 나를 안내했던 곱상한 20대 초반의 안내원과 마지막에 악수를 했는데, 깜짝 놀랬었죠. 여자의 손이 아니더군요. 순간적으로 유격대 훈련을 받은 여자구나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일 없이 다녀 왔습니다. 한상억 선생도 같이 갔어야 했는데, 1992년에 돌아가셨으니 돌아가신지 8년이나 되었습니다. 함께 가지 못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72년 가사를 고칠 때 정부의 종용이 있었나요?

"한상억 선생이 자발적으로 고친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조국이 분단된 노래를 작곡했더니, 그 노래로 인기를 얻어 유명한 작곡가가 됐습니다. 차라리 '그리운 금강산' 같은 곡은 없었던게 좋았습니다. 통일만 됐더라면…. 통일된 먼 훗날 '분단 됐을 때, 남한에서 금강산을 그리워하며 불렀던 노래도 있었어'라고 회상하고,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만큼 통일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1, 2회 CBS 창작가곡제의 심사위원장을 하셨습니다. 가곡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대한민국 가곡이 자꾸 침체되서 앞으로 좀 부흥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좋은 가곡을 널리 보급할 수 있을까요?

"가곡이 침체된 원인을 먼저 생각해야합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점점 경제적인 동물로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전체가 황금만능주의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황금만능주의에 의한 산물은 200년만 지나도 남는 게 없습니다. 300년 후에 지금의 국무총리를 알겠습니까, '그리운 금강산'의 작곡자 최영섭을 알겠습니까. 오랜 시간 후 남는 것은 문화 예술밖에 없습니다. 문화 예술이 국가적인 위상을 높힌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국가적으로 뭔가를 해야한다고 봅니다."

▶가곡을 보급, 발전시키기 위해 국가적으로 어떤 지원이나 대책이 필요하단 말씀이시죠?

"맞습니다. 준 IMF라고 하는 이 시점에서 문화 예술인들이 굶어 죽었다해도 정부에서는 경제 살리기를 위해 거들떠 보지도 않을 겁니다. 그런데 경제위기가 아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보리밭' 등 수많은 가곡을 작곡한 윤용하씨가 세상을 떠날때, 그 진단서 병명이 영양실조증에 의한 간질환성으로 인해 사망했다 였습니다. 즉, 굶기를 밥먹듯 하다가 영양실조가 됐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나라 위정자들께서는 어려운 예술가들에게 해준게 전혀 없습니다. 세상 떠나니까 양철통 하나, 문화훈장 하나 줬습니다. 어려운 예술가들이 살아있을때가 더 중요하지, 죽고나서 문화훈장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예술가들을 돌봐달라는 뜻에서 좀 심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지금은 작사, 작곡가들한테 저작권료 등 그런게 있지 않습니까?

"옛날에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좀 나온 것이 KBS '이주일의 노래'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작곡료로 2000원을 받았으니까. 그게 전부였던 것 같습니다. 윤용하씨는 당시 문총(문화총예술연합회) 사무총장이었는데, 요새돈으로 월급 30만원정도 받았습니다. 생활이 안되는건 당연합니다."

▶무엇보다 한국 가곡의 침체기가 빨리 끝나고 부흥기가 와야하지 않겠습니까?

"6.25전쟁 이후 그런데로 유지하다가, 소위 경제대국으로 올라서면서 가곡뿐 아니라 문화예술계가 거의 전체적으로 침체됐습니다.정부의 도움 없어도 무조건 작품을 위해 생활하는, 절대 쓰러질 예술가들이 아니기에 분명 다시 부흥할 것입니다. 그나마 CBS에서 창작 가곡제를 시작해 가곡이 다수 융성하게 돌아갈 수 있는 계기의 시발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개최하면서 단 1원이라도 수입이 없을텐데도, 깊은 뜻을 안고 하는 것을 보고 뜨거운 경의를 표합니다. 어려운 경우에 닥치더라도 창작가곡제를 지속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가곡계가 다시 부흥할 때가지만이라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70년대는 아주 좋았는데 말이죠?
"초중고 시절에 가곡을 많이 듣게 해야합니다. 입시준비 때문에 음악시간을 변형, 이용해 국영수 쪽으로 보충해선 안됩니다. 음악시간이 일주일에 1시간 있다면, 인성교육을 위해서라도 꼭 해야합니다. 우리 가곡에 대한 관심이 학생때부터 각인된다면 평생 잊지 않을 것입니다. 대학 나와서 가곡을 좋아하려고 하면 이미 늦습니다."

▶방송국에서도 가곡을 많이 보급하기 위해 노력해야겠지만, 정부에서도 교과서에 가곡을 실는다든지, 음악 시간을 잘 활용해 어린시절부터 가곡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키워나가게 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그렇다면 우리 가곡만의 특징이라고 하면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요?

"우선 음악을 통해 향토적인 것과 민족성을 고취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곡은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민요풍하고 더욱 많은 접목을 시도해야 합니다."

▶'박연폭포' 같은 것이 아주 좋은 예가 되겠네요. 2009년 소망이 있다면?

"하루빨리 금강산 관광이 재개됐으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우리 동포들에게 조금이라도 나눠주는데, 자연스럽게 드리자는 것입니다. 금강산 관광은 명분있게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금강산 관광 때문에 1인당 300달러인가(?)를 북한에 수수료 주는 것, 이게 얼마나 명분있고 좋은 북한 돕기입니까. 세금을 내는 대한민국 한 사람으로서 명분없이 막 주는 건 싫습니다. 하루속히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고, 개성공단도 다시 원상복구 됐으면 좋겠습니다. IMF와 비슷하다는 이 시기를 타개하는데 지름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앞으로 금강산을 더 가볼 계획이신가요?

"3번을 더 갈 계획입니다. 봄철에 갔으니까, 여름, 가을, 겨울 등 사계절마다 한번씩은 가고 싶습니다. 그동안 전세계의 유명한 산을 많이 가봤는데, 금강산처럼 오밀조밀하고 아름다운, 예술적이고 우아한, 철학적이고 위엄있는 산은 없었습니다. 소동파가 이야기 한 '중국도 산이 많지만, 동방의 한국 금강산에 한번 다녀오고 나서 죽어야지 어떻게 죽을 수 있냐'는 말이 실감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그만큼 축복해주신거 아니겠습니까."

▶올해로 팔순(만 80)인데도 불구하고 건강하십니다. 그 비결은 무엇인가요?

"아침서부터 기도를 많이 합니다. 교회에서 보다 집에서 우선 아침에 기도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하루 일이 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많이 걸어다닙니다. 지하철 타러 갔을 때도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일부로 계단을 이용해 올라다닙니다. 내가 건강을 유지하는 한 방법입니다."

▶새해 계획을 포함해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많은 국민들이 우리 가곡을 지난 7~80년대처럼 사랑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우리 가곡은 '우리의 얼'입니다. 세계 어느나라에도 부끄럽지 않은 우리나라 특유의 노래이고, 예술입니다."

▶국민들이 우리 가곡을 더 사랑하는 한해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시죠?

"아이러니 하게도 경제가 발전할수록 형무소는 늘어가고, 예술이 발전할수록 반대가 됩니다. 예를 들어, 비엔나는 형무소에 사람이 없고, 경제 대국인 미국이나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많죠. 예술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생각은 똑같은데 행동이 다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리고 곰곰히 생각할 때, 하루 빨리 통일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후세사람들이 '남쪽 사람들이 북쪽에 있는 금강산을 그리워하는 노래가 있었데…' 할 정도로 빨리 통일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벌써 80살인데, 정말 오래 살아야 10년정도인데, 그 안으로 통일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작곡가 최영섭 선생은 1929년 인천 강화군에서 출생했다. 경복고ㆍ서울대 음대를 나와 이화여고, 한양대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인천애협교향악단 상임지휘자와 한국작곡가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대표작'그리운 금강산' 노래비가 2000년 인천에 건립됐다. 2007년부터 CBS 대한민국 창작가곡제 심사위원장을 맡고 있다.

정리=박홍규 기자 park4067@dailynocutnews.co.kr" rel="nofollow">park4067@dailynocutnews.co.kr
(대한민국 중심언론 CBS 뉴스FM98.1 / 음악FM93.9 / TV CH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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