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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과 독재에 '상처입은 용' 윤이상의 삶과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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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음악가로서 세계에 가장 많이 알려진 현대 작곡가 윤이상은 1917년 경남 산청에서 2남 3년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흥미로운 것은 윤이상의 어머니가 그를 임신했을때 꾸었다는 태몽. 그의 어머니는 용이 지리산을 감싸는 꿈을 꾸었는데, 그 꿈에서 용은 하늘 높이 날고 있었으나 산 정상으로 오르지는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용이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윤이상을 설명하는 수식어로 자주 사용되는 '상처입은 용'은 그의 태몽에서 유래된 셈이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의 삶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파란만장한 비극의 곡절을 겪어야 했다.
 
  서양에 동양을 알린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
 
   
 
 △'상처입은 용' 작곡가 윤이상
 

 윤이상은 1930년 통영으로 이주한 뒤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후, 1939년 이후 일본(오사카, 도쿄)에서 첼로, 음악이론, 작곡을 공부했으며, 1946년-52년에는 통영과 부산의 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했고, 1952-56년까지는 부산과 서울의 여러 대학에서 강사생활을 했다.
 
  한국에서 윤이상은 가곡집 『달무리』(1949. 8.) 등의 동요와 가곡을 주로 작곡했다. 이때 윤이상은 5음계를 조금 넘어서는 노래로 간단한 장식음을 섞어서 나름대로의 한국풍을 의도한 음악을 선보였다. 이때 작곡한 곡들이 그의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일까. 그는 유럽으로 건너간후 한국에서 쓴 모든 작품을 파기했다.
 
  이후, 윤이상은 1957년부터 프랑스와 베들린에서 오뱅(Tony Aubin),블라허(Boris Blacher)와 루퍼(Josef Rufer), 슈바르츠 쉴링(Reinhard Schwarz-Schilling)등으로 부터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음악인생'을 시작했다. 유럽의 여러 음악제에서 참여하여 이름이 알려졌고, 유럽의 현대음악과 한국음악 및 동양음악을 융합하는 작곡세계를 펼쳐나간 것이다.
 
  당시 유럽에서 작곡된 윤이상의 음악은 대단히 많은 요소들을 혼합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일정한 형식이나 이론적 방향 없이 작곡한 그의 음악은 "인상주의적"이라는 말과도 어울린다.
 
  특히 그는 한국 악기의 음색을 서양악기로 옮기는 등 한국의 전통적인 음을 바탕으로 한 동양적인 정서를 현대서양음악으로 표현하는 작품을 선보여 많은 주목을 받았다. 예를 들어 오보에는 피리를, 하프는 가야금을, 플루트는 대금을, 바이올린은 해금을 대신하여 소리내는 식이다.
 
  그는 서양의 양식에 동양의 내용을 녹여내는 음악적 작업을 꾸준히 해냈고 결국, 그런 방향으로 음악적 일가를 이뤄냈다.
 
  윤이상의 대표적인 작품은 1972년 독일 뮌헨 올림픽에서 공연한 오페라 <심청>이다. 당시 <심청>은 동서문화의 완벽한 결합을 보여주었다는 극찬과 함께 동양인과 서양인 모두에게 박수를 받았다.
 
  '상처 입은 용'...박정희 군사정권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상처입은 용' 태몽 탓일까? 음악적 성공을 거둔 그에게 '비운'은 비켜가지 않았다. 1963년 처음 북을 방문해 최상학을 만나는 등 여러차례 평양을 오고가는 활동을 벌인 윤이상을 박정희 군사정권이 그냥 놔두지 않은 것이다.
 
  결국 윤이상은 이른바 '동백림 사건(동베를린간첩단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된다. 재판 과정에서 평양에서 만난 최상학이 "아들이 보고 싶다"며 건네 준 아들이 쓸 차비, 독일로 오는 비행기값 200달러는 공작금으로 둔갑했으며, 박정희 군사정권은 결국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차가운 감옥에서도 윤이상은 음악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이때 발표한 곡이 바로 <나비의 꿈>과 두편의 instrumental(기악곡)이며 그가 수감 생활 중에 썼던 작품들은 1969년 2월 23일 뉘른베르그에 초연되어 31번의 커튼콜을 받을 정도로 엄청난 찬사와 호평을 받았다.
 
  수감생활을 하고 있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 음악가 윤이상의 구명운동을 펼친 것은 세계음악가들이었다. 미국의 음악가 스트라빈스키, 엘리어트 카터, 독일의 카라얀 등 세계를 대표하는 많은 음악가들이 서명한 탄원서가 재판장 앞으로 보내졌고, 그보다 많은 단체들의 항의문이 날아들었다.
 
  1968년 5월 함부르크 자유예술원에서는 윤이상 선생을 정식회원으로 선출한 후 박정희에게 호소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다음은 자유예술원에서 보낸 호소문의 일부분이다.
 
  "윤이상 씨는 유럽뿐만 아니고 전세계에서 우수한 작곡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과 사람됨은 코리아의 문화 예술을 외국에 알리는 귀중한 소개자라고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가 없었다면 우리는 코리아의 문화에 대해 아주 조금밖에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 국제 음악계는 윤이상 씨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있어서 동서양의 중개자로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사람입니다. 코리아 음악의 대사로서 그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계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군사정권은 윤이상에게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는 15년, 3심에서는 10년 형을 내렸다. 결국 윤이상은 독일 정부가 서독 주재 한국 대사관 외교관들을 추방하고, 약속했던 7,000만 마르크의 차관도 취소하겠다는 뜻을 남쪽 정부에 전함으로써 석방될 수 있었다.
 
  날아오른 나비, 민주화와 통일로...
 
  이후 윤이상은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와 음악활동과 함께 한국의 통일과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동시에 시작했다. 1976년 그의 첫번째 협주곡 (첼로협주곡)가 프랑스에서 초연되었으며 <생의한가운데로>로 유명한 세계적 작가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을 엮은 책이 출판되는 등 윤이상은 명실공히 세계적 현대음악 작곡가로 공인받게 된다.
 
  1979년 다시 북한을 방문한 윤이상은 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 영감을 얻은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를 81년에 발표하는 등 조국의 민주화를 갈망하는데 까지 음악활동을 벌여나갔다.
 
  뿐만 아니라 90년에는 당시 베를린에서 발족한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의 해외본부 의장직을 맡고 '범민족통일음악제'를 평양에서 개최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당시 북한은 매년 '윤이상음악제'를 개최하고 평양에는 윤이상 음악당을 건립하는 활발한 호응으로 이에 답하기도 했다.
 
  이같은 윤이상의 활동은 또다시 한국정부의 제재를 받았다. 그의 귀국에 대해 한국 정부가 "향후 북에 가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을 내건 것이다. 귀국이 좌절된 윤이상은 1994년 "모든 정치적 활동을 중단한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활동 중단발표를 한 다음해인 1995년, 그는 사회의 억압과 폭력에 항거해 분신한 한국의 젊은이들을 위한 진혼곡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를 발표하고 78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했다.
 
  윤이상은 조국의 현실이 분단으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에 통일을 위해 나아가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확고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한 음악가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활동과 음악활동을 함께 벌여나간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의 지론 한 구절을 들어보면 그의 일생을 조금이라도 이해할수 있을까?
 
  “나의 음악은 나의 조국 곳에서 태어났고 나의 조국은 나의 음악을 그 자식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다시 더 풍요한 음악을 낳을 수 있는 소지를 만들 것이다. … 한쪽으로는 나의 조국의 생명의 안전과 분단된 민족의 화합을 위하여, 또 한쪽으로는 조국이 나에게 남겨준 귀중한 예술적 보물을 아끼고 갈고 닦아서 거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새시대의, 음악의 표현과 정신적 알갱이를 추구한 것이다.”
 
 
윤이상 연보

 
   
 
 △작곡가 윤이상.
 

 1917년 9월 17일
  경상남도 산청군 덕산면에서 선비 출신의 부친 윤기현과 농가 출신의 모친 김순달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
 
  1920년
  통영으로 이주.
 
  1933년
  통영에서 서당과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있는 상업학교에 입학함. 서울로 가서 독일 음악가 프란츠 에케르트의 제자인 한 바이올린 주자로부터 2년 동안 화성학 교육을 받음.
 
  1935년
  일본 오사카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작곡과 음악이론, 첼로 등 수학.
 
  1937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화양학원(보통학교 과정)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함.
 
  1939년
  도쿄에서 작곡가 이케노우치토모지로에게 작곡을 사사함.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윤이상은 전쟁 직전 귀국함.
 
  1944년
  징용 중 반일활동의 혐의로 체포되어 두 달간 옥고를 치름.
 
  1948~52년
  통영여자고등학교, 부산사범학교, 부산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재직.
 
  1950년
  1월 30일 부산사범학교 국어교사 이수자와 결혼.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11월 첫딸 정 출생
  부산대학에서 서양 음악사를 강의하는 한편 ‘전시작곡가협회’를 조직한 후 ‘한국작곡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함.
  부산에서 가곡집 『달무리』(『고풍의상』『달무리』『그네』『편지』등 5곡)을 출판함
 
  1953년
  종전 후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이주하여 여러 대학에서 작곡을 가르치며 가곡, 실내악곡 등을 발표함
 
  1954년
  1월 아들 우경 출생, ‘한국작곡가연맹’ 상임위원에 선임됨
 
  1955년
  4월 11일 작곡가로서 최초로 『현악4중주 1번』과 『피아노3중주』곡으로 1955년 제5회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56년
  6월 프랑스로 유학해서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에서 토니 오뱅이게서 작곡을, 피에르 르벨에게 음악 이론을 배움
 
  1957년
  7월 독일 베를린에 가서 서베를린 음악대학에서 음악이론은 슈바르츠-쉴링에게, 12음기법은 요제프 루퍼에게, 그리고 작곡은 보리스 블라허에게 배움
 
  1958년
  9월 서독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국제현대음악 하기 강습회에 처음으로 참가하여 슈토크하우젠, 노노, 불레즈, 마데르나, 케이지 등과 교분을 가짐
 
  1959년
  7월 서베를린 음악대학 졸업. 9월에 네델란드의 빌토벤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을, 다름슈타트에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을 프란시스 트라비스의 지휘로 초연했고, 여기서 큰 성공을 거두어 유럽 현대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함
 
  1961년
  9월 부인이 독일에 와서 합류
 
  1962년
  1월 29일 관현악곡 『바라』를 베를린 라디오방송교향악단의 연주로 초연
 
  1963년
  퀼른으로 이주. 북한방문,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가사』와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가락』을 발표
 
  1964년
  포드재단의 예술가 프로그램에 초청되어 베를린-슈마르겐도르프로 이주, 한국에 남아있던 자녀들이 독일로 와서 합류
 
  1965년
  오라토리움 『오 연꽃 속의 진주여』를 하노버에서 초연
 
  1966년
  10월 서독 도나우에싱겐에서 에르네스트 부어의 지휘로 『예악』이 초연됨
 
  1967년
  6월 17일, 한국 중앙정보부원들에 의해 베를린에서 서울로 납치됨. 이른바 “동베를린 간첩단사건”에 연류된 윤이상은 부인과 함께 기소되어 12월 13일 제1심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음. 부인 이수자는 5년형을 받았으나 집행유예로 석방되고, 윤이상은 1968년 3월 13일 제2심에서 15년형 감형 처분, 이어 1968년 12월 5일에는 제3심에서 10년형으로 다시 감형.
 
  1968년
  67년 10월 교도소에서 작곡활동을 허락 받은 윤이상은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1967/68)을 2월 5일 완성시킴,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으로 이송된 그는 거기서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율』과 플루트, 오보에,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영상』을 창작함. 서울에서 석방되기 전인 1968년 5월에 서독 함부르크 자유예술원 회원이 됨
 
  1969년
  2월23일 서독 뉘른베르크 오페라극장에서 그의 이중오페라 『꿈』(『류퉁의 꿈』『나비의 미망인』)이 공연됨. 3월 30일 동료 작곡가, 음악가들의 국제적인 항의와 독일 정부의 조력 등에 힘입어 석방되어 서베를린으로 돌아옴. 6월23일 킬 문화상 수상
 
  1972년
  서베를린 음악대학의 명예교수가 됨. 8월1일 뮌헨올림픽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위촉받은 오페라 『심청』이 볼프강 자발리슈의 지휘, 귄테 레너트의 연출로 초연됨
 
  1973년
  7~8월 미국 콜로라도 주 애스펜 음악제에 참가, 여기서 그의 많은 작품들이 연주됨
 
  1974년
  해외 민주화 운동에 투신함. 서베를린 예술회원으로 추대됨
 
  1977년
  8월 한국민주민족통일해외연합(한민련) 유럽본부 의장으로 추대
 
  1977~87년
  베를린 예술대학의 정교수로 재직함. 루이제 린저와의 대담 『상처받은 용』출판
 
  1981년
  5월8일 퀼른에서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가 서부독일 라디오방송 교향악단의 연주로 초연됨
 
  1982년
  8월 북한에서 『광주여 영원히!』가 연주됨. 그 후 북한에서는 해마다 정기적으로 윤이상음악제가 개최됨. 9월 제 7회 대한민국음악제에서 이틀간 ‘윤이상 작곡의 밤’ 개최. 9월 24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관현악의 밤에서는 프란시스 트라비스의 지휘와 KBS교향악단과의 협연으로 『서주와 추상』『무악』『예악』『오브에와 하프, 소관현악을 위한 이중협주곡:견우와 직녀이야기』등을 우어줄라 홀리거와 우어줄라 홀리거 등이 『로양』『피리』『오브에와 하프, 비올라를 위한 소나타』를 연주함. 이후 남한에서 윤이상의 작품이 비정기적으로 연주됨.
 
  1983년~87년
  매년 교향곡을 한곡씩 발표함(총5곡)
 
  1984년
  5월15일 『교향곡1번』(1982~83)이 베를린 필하모니 창단 100주년 기념으로 동악단(지휘,라인하르트페터스)에 의해 초연됨. 12월 5일 평양에서 윤이상음악연구소 개관. 한민련 유럽본부 의장 반납
 
  1985년
  1월15일 서독 튀빙겐대학이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함
 
  1987년
  그의 70세 생일기념으로 뮌헨의 ‘텍스트와 크리틱’사가 ‘작곡가 윤이상‘이란 제목으로 윤이상의 작품에대한 논문집을 발간. 9월 17일 베를린 탄생 75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위촉받은 작품 『교향곡 5번』을 작곡,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의 독창과 베를린 필하모니교향악단(지휘,한스 젠더)의 연주로 윤이상의 70세 생일에 초연. 9월 24~25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엄 ’민족문화와 세계 공개성‘ 토론자로 참석. 9월26일 일본 『마이니치신문』과의 인터뷰에서 38선상에서의 민족합동대축전을 제의함
 
  1988년
  5월 21일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을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으로부터 받음. 7월 1일 도쿄에서 휴전선상의 ‘민족합동음악축전’을 남북한 정부에 정식으로 제안함. 10월 서베를린이 ‘유럽의 문화도시’로 지정되어 베를린 축제주간 때 윤이상 음악회가 열림
 
  1990년
  분단 45년 만에 남북통일음악제를 주관하여 10월에는 서울전통음악연주단이 처음으로 평양에서 열린 제1회 범민족통일음악회에 참가하고, 12월에는 평양음악단이 서울송년음악회에 참가함. 12월 16일 베를린에서 발족한 조국통일범민족연합 해외본부 의장에 당선됨
 
  1991년
  최상만, 홍은미 편역으로 『윤이상의 음악세계』가 한길사에서 간행됨 국제현대음악협회 명예회원으로 추대됨
 
  1992년
  75세 생일기념으로 뮌헨의 ‘텍스트와 크리틱’사에서 『윤이상, 시대의 작곡가』라는 논문집을 발간함
  전 세계적으로 윤이상 탄생 75주년 축하 음악회 개최, 일본에서도 11월 5일부터 16일까지 약 10일에 걸쳐 실내악, 관현악연주 및 강연회 등으로 ‘윤이상 탄생 75주년 기념 페스티벌’ 개최. 11월9일 일본에서 『윤이상, 나의조국 나의음악』출판. 12월 7일 함부르크자유예술원의 공로상 수상함
 
  1993년
  10월 22일 서울에서 열린 『20세기 음악축제기간』중 한국 페스티벌 앙상블이 윤이상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연주함
 
  1994년
  범민련 의장직을 반납함. 9월 예음문화재단 주최로 서울, 부산, 광주 등지에서 『윤이상의 음악, 미학과 철학』출판
 
  1995년
  5월 9일 분신자살을 한 학생을 위해 지은 교향시곡 『화염속의 천사』 및 『에필로그』를 일본에서 발표. 독일 바이마르에서 괴테상 수상, 11월 3일 베를린에서 영면
 
민중의 소리 / 표주연 기자    (2005.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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