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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 전령사’ 나선 임웅균 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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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정신건강 전령사’ 나선 임웅균 예술종합학교 교수
 
[서울신문]2005-11-09 05판 14면 4471자
흔히 고음(高音)을 잘 내는 사람을 ‘신이 내린 목소리’에 비유한다.
테너에게 고음은 생명 그 자체다.
또 고음을 위해 생명을 걸기도 한다.
세계적 태너도 고음 앞에 무릎을 꿇는 경우도 많고, 고음에 도전하다 죽는 경우도 더러 있다.

테너 임웅균(51)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성악가로 정상에 오를 때까지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겼다.
대학시절 찬송가의 높은 ‘라’음을 내다가 숨이 콱 막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심청전’ 연습 도중 ‘농부가’에서 또한번 아찔한 경험을 했다.

임 교수는 요즘에도 여전히 고음을 낸다.
공연장에서는 물론 예술종합학교 음악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도 그렇다.
특히 학생들에게 야단칠 때면 음악원 전체가 쩌렁쩌렁 울린다.
주위에서 “성악가는 목소리를 아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에 목소리를 강철처럼 단련시키고 싶어 그런다며 오히려 목소리를 더 높인다.

지난 주 음악원 연구실에서 임 교수를 만났다.
인터뷰 내내 그의 목소리는 소문대로 쩌렁쩌렁했다.
때로는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펄쩍펄쩍 신나서 뛰기도 했다.
임 교수는 최근 서울시로부터 ‘정신건강 지킴이’로 위촉돼 정신건강 전령사로 또다른 역할에 나섰다.“나의 건강은 가족의 건강이며 나아가 한민족의 건강이 아니냐.”면서 노래로 정신건강을 지키고 알리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가치있는 일이라며 크게 웃는다.

이어 대뜸 “내가 (국회)출마하면 어떻겠소, 할 일이 꼭 있거든요.”라는 생뚱맞은 질문을 던진다.
대답할 겨를도 없이 “전국 60개도시에 사랑의 집을 짓는 것입니다.
청소년과 미혼모를 위한 재활프로그램, 즉 세계 최고의 휴먼센터를 설립하는 거지요.”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퇴학당하기 일보 직전에 휴먼센터에서 보름 동안 재활프로그램을 거쳐 퇴학여부를 결정하자는 것.
이를 위해 매년 1800억원의 예산이 필요하다는 계산도 끝냈다고 했다.
자기 적성과 자아를 파악한 사람은 결코 죄를 짓지 않기 때문에 휴먼센터가 이 역할을 충분히 해줄 것이라고 장담했다.

“우리나라는 교과목이 너무 많아요.
학생들 가방이 그렇게 무거운데도 어디 노벨상 하나 제대로 나오나요.6,7개 과목으로 팍 줄여야 해요.
그리고 책가방을 왜 들고 다닙니까.
책은 학교에 보관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CD로 공부하면 돼요.
왜 그 흔한 CD 제작을 안하는 것인지 답답해요.”
임 교수는 정계나 재계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장소를 불문하고 ‘입바른 소리’를 잘 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피가 끓는 다혈질의 사나이기에 정 안되면 국회진출이라도 해서 그런 일을 꼭 이루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한다.

공연장 밖에서 그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돕는 일.3년전부터 학교폭력대책 국민협의회 공동대표를 맡아 ‘사랑의 공책 보내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유명 인사들과 연예인들의 캐리커처와 메시지를 담은 공책 5만부를 소년 소녀 가장이나 결식아동들에게 보내 용기를 북돋워 주고 있다.
또 2년 전에는 어린이날이 공휴일에서 제외된다는 얘기가 나오자 68개 어린이단체 공동대표의 자격으로 국무총리실에 찾아가 다짜고짜 담판을 지어 원점으로 되돌리게 했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오른손 문화에서 양손문화로 바뀌어집니다.30대 이상은 대부분 오른손을 쓰지만 지금의 청소년과 20대는 양손을 쓰거든요.
컴퓨터 자판도 그렇고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도 다 양손으로 휙휙 날리잖아요.
그래서 지금의 청소년은 어느 때보다 정말 중요합니다.”
임 교수는 또 유학시절 유상근 전 명지대 이사장의 장학금으로 공부를 했다는 사실을 회고한 뒤, 한 사람의 투자로 이렇게 성악가와 교수로 성장해 수많은 사람을 즐겁게 해주고 있지 않으냐고 자신했다.
따라서 재벌들은 우리 사회의 불우이웃과 청소년들을 위해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재벌들은 따지고 보면 농민과 서민들이 물건을 사 주니까 재벌이 된 거 아니냐면서 우리 농산물이 무너지면 암 발생 등 만병의 근원이 생기기 때문에 농촌 지원에도 앞장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차원에서 농민들에게 무이자로 대출해 주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도 있다고 했다.

한참만에야 음악얘기가 나왔다.
인간은 음악과 스포츠 두가지만 있으면 살 수 있다면서 “발가벗은 목욕탕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아세요? 작곡 시 노래 무용 등 네가지뿐입니다.”고 했다.
시나 무용도 음악이 있어야 하고 무용 역시 결국은 체육이 아니냐는 것.
예로부터 음악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기에 사람은 음악을 들어야 과격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밀양아리랑을 멋들어지게 부를 때 하얀손수건을 꺼내는 이유를 물었다.“다윗창법을 쓰지요.
다윗은 노래로 신과 대화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목소리가 어린이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어린이들은 고음에서도 또박또박 소리를 내면서 목이 잘 쉬지 않지요.
그래서 아 이게 바로 벨칸토구나 하는 것을 알았지요.”라고 했다.

임 교수의 성악적 자질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숙대 성악과에 입학 등록을 한 어머니는 임신을 하는 바람에 수학을 포기했고, 이때 낳은 아이가 바로 임 교수.
아버지는 일본 규슈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해 고교 교사로 있었으나 여섯 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사업에 뛰어들었다 곧 실패했다.

임 교수는 가난한 살림에 피아노를 배울 수도 없었고 음악성적도 별로였다.
초등학교 5학년 음악시간때 너무 크게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선생님한테 뺨을 맞았다.
음악점수는 ‘양’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도 그랬다.
중2때 음악선생님한테 “성악을 하지 않으면 안될, 기가 막히게 좋은 목소리를 지녔다.”고 칭찬을 받았다.
이후 ‘고성방가’하는 버릇이 생겼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서울 뚝섬 동네 밖에서 노래를 부르면 마을 사람들이 ‘웅균이가 온다.’고 했다.

학창시절 공부실력은 별로였다.
경기중학 입학시험에 떨어지고 고교 역시 1,2차에 거푸 떨어져 대구로 내려갔다가 우여곡절끝에 명지고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돼서야 비로소 성적이 상위권으로 올랐다.
고3때 육사를 지원, 군인이 되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만류와 음악선생님의 권유로 성악을 하게 됐다.
7개월 동안 집중적인 레슨끝에 연세대 성악과에 수석 합격했다.

대학때에는 문화촌 달동네에 살면서 클래식을 연주하는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머니의 치료비를 충당했다.
물로 배를 채우고 무대에 오르기 일쑤였다.
결국 달동네 생활 3개월 만에 장티푸스에 걸린 것.
병원비가 없어 작은형의 대영백과사전을 가져다 팔아 겨우 해결했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3년 동안 화곡고 음악선생으로 있다가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고음의 벽을 뚫고 음악적 완성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돈이 없어 궁리 끝에 유관순 기념관에서 독창회를 열었다.370만원을 벌었다.
그 돈으로 급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부인과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

세계적인 성악가를 배출한 오시모 아카데미에서 2년간 공부했다.
기라성 같은 테너와 소프라노의 음반을 구해다 틀어놓고 달달 외우다시피 했다.
최대한 흉내를 내면서 발성을 연구했다.
또 마리아 칼라스의 뮤직코치로 유명했던 안토니오 토니니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루치아노 콩쿠르에 참가했을 때 심사위원인 파바로티로부터 “목소리가 굉장히 고급스럽다.”는 말을 전해 듣기도 했다.

85년 11월 귀국, 서울 마포의 한 아파트에서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15만원으로 시작했다.
이듬해 3월 연세대 강사로 채용됐고,1년 뒤 ‘KBS콘서트홀’이라는 프로에 단골로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임 교수를 스타로 만들어준 것은 바로 ‘열린 음악회’.93년 10월 첫 출연하면서 ‘두만강’‘타향살이’‘밀양아리랑’ 등 클래식과 대중가요, 민요를 오가며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지식인이 침묵을 지키는 경우는 두가지, 즉 완전한 낙원이거나 아니면 아무 희망이 없는 사회일 때 그렇지요.
하지만 둘 다 아니라면 웅변이 곧 금입니다.”
요즘에는 실학과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공부한다.
이유에 대해 역사는 말 잘하는 사람을 예의 주시해 왔으며 실사구시 차원에서 하고 있다고 껄껄 웃는다.“임진왜란때 일본이 우리나라 사람 6만,7만명을 끌고 갔는데 돌아온 것은 6000여명밖에 안돼요.
나머지는 외국의 노예로 다 팔아 넘겼어요.”
■ 그가 걸어온 길
▲1955년 서울 출생
▲75년 명지고 졸업
▲75년 연세대 성악과 수석 입학
▲79년 연세대 성악과 학사졸업
▲79∼81년 군입대
▲81년 화곡고 음악교사
▲83년 이탈리아 유학, 산타체칠리아 국립음악원과 오시모 아카데미에서 수학(석사)
▲85년 귀국
▲94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성악과 부교수, 성악과 과장 역임
▲2002년 5월 학교폭력대책국민협의회 공동대표
▲2005년 10월 서울시 정신건강 지킴이 위촉
▲그외 로마 밀라노 등 이탈리아 17개 도시, 뉴욕 워싱턴 애틀랜타 등 미국 19개 도시 순회연주.
오페라 ‘사랑의 묘악’ 등 국내 30여회 공연
■ 주요 상훈 만토바 국제콩쿠르 2위, 비오티 국제콩쿠르 메리토상, 제22회 한국방송대상 성악가상(95년), 저축의 날 대통령 표창(2000년)
■ 음반 선경 한국가곡 4,5집(CD), 독집음반 사랑하는 마음(99년), 태너 임웅균의 클래식 가요(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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