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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고향'과 '향수' 의 시인 정지용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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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 -정지용

"오랑캐 말은 북녘 바람에 기대어 울고/월나라 새는 남쪽 가지에 둥지를 튼다"고 옛 시인은 읊었다. 하물며 고향 하나로 평생토록 시의 우물을 길어올리는 시인에 있어서랴.

나라 빼앗기니 고향마저 잃게 되고,되찾은 나라 다시 두 동강이 되니 고향길 끊겨 '떠도는 구름'인 이 땅의 사람들 어찌 이루 다 헤아릴 수 있을까. 일찍이 잃어버린 고향을 시로 담아서 먼 후대에까지 가슴에 새기도록 남겨준 '향수'와 '고향'의 시인 정지용에게서 우리는 민족사의 비극과 그 통곡을 듣게 된다.

휴전이 되던 해인 1953년 중학생인 나는 대중잡지에서 모윤숙이 정지용을 구하기 위해 거제 포로 수용소에 가서 명단을 모두 뒤지고 북송포로 명단에서도 확인하려 했지만 끝내 못 찾은 안타까움을 마치 떠나간 연인을 부르듯이 절절하게 쏟아내는 글을 읽었다.
그 글이 어린 내 머리 속에 심어준 것은 교과서에는 실리지 않았지만 정지용이라는 큰 시인이 인민군으로 전쟁에 나가서 포로가 되어 북으로 넘어갔구나 하는 것이었다.

내가 어렵사리 얻은 '정지용시집'의 첫 장에는 '카페 프란스'가 나온다.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 밑에/빗두루 슨 장명등/카페 프란스에 가자/이 놈은 루바쉬카/또 한 놈은 보헤미안 넥타이 뻣적 마른 놈이 앞장을 섰다."
저녁 명동의 술집 골목에서 저절로 흥얼거리던 그 시에 취해 루바쉬카를 입고 싶었다. 신문주간 표어 현상모집에 1등 당선한 상금 1만환을 들고 양복점에 찾아가 루바쉬카를 맞춰 입고 거리를 활보했었다.

시 창작 시간에 미당은 "에에 지용은 세 고개를 넘었지. 나는 한 고개를 넘었을까"하셨고,한 번은 공덕동 댁에서 갑자기 "근배야 지용은 내 큰 형님이시지. 지금도 저 북 쪽에서 쓰도똔똔 쓰도똔똔 신호를 보내오고 있거던…"하고 두 손가락으로 머리를 치며 간첩접선이라도 하는 시늉을 하여 어리둥절한 일도 있었다.

해방 공간에서 조선문학가동맹에 맞서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주도했던 김동리도 지용과는 자주 만나 속내를 털어놓는 사이였다면서 지용은 결코 북쪽을 택할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어디서 잘못된 것인지 함께 끌려간 이광수는 납북이라 남쪽에서 책을 펴낼 수 있었고 지용은 북녘 땅에서 호강이라도 하는 양 오랫동안 꽁꽁 묶어뒀었는데, 재작년 2월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남녘땅에 계신 아버지 정지용을 만나겠다고 양강도 풍서방송국 책임기자로 일하는 작은 아들 정구인이 서울에 온 것이다.

인민군에게 잡혀간 아버지를 찾겠다고 집을 나섰다가 의용군에 끌려간 아들이 돌아왔는데 남에도 북에도 정지용은 자취가 없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짚 벼개를 돋아 고이시던 곳"을 일제로부터 되찾으려고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로 목메게 부르던 '향수'는 이 나라의 산천에 울려 퍼지는데 그 시인은 어느 하늘에서 떠도는 구름이 되어 있는지.
이근배 <시인.한국시인협회장>

[중앙일보] 2003-02-03
1 Comments
별헤아림 2003.02.18 17:10  
  정지용<향수>.
저의 애청곡 1호입니다.
고등학교 때 익명의 시인 이름, 아니 입에 올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때가 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