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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민족의 수난사를 그린 이호섭의 '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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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이호섭씨의 가곡은 그리 흔하지 않다. 그 이유는 그의 기질 때문인것 같다. 그는 견딜 수 있는 한계까지는 견딘다. 소리의 밧줄이 그의 목을 죄어와 허겁지겁 해질 때까지는 오선지를 찾지 않는다. 시는 나이 들어 한줄만 쓰면 된다는 릴케의 말을 생각게 한다.이호섭씨는 일제때 청주사범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다. 전쟁말기라 학생들은 공부는커녕 전쟁 뒷바라지를 위해 매일같이 동원되어 별의별 일들을 다했다.

이씨는 어느날 학생들을 이끌고 가곡(佳)이란 산골로 솔방울을 따러 갔었다.
산이 깊어지자 ‘구구구....’하고 산비둘기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인공의 불협화음속을 벗어난 그의 귀엔 산비둘기의 단조로우나 규칙적인 울음소리가 몹시 신선하게 들렸다. 당시의 젊은이에게는 미래가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전쟁뿐이었다. 뚫고 나갈 수 없는 벽속에 갇힌 이씨의 마음 속의 귀에는 산비둘기의 울음소리가 일제치하의 민족의 울음소리로 들려왔다.
산비둘기의 울음은 청춘과 민족상실의 만가(輓歌)였다. 그는 그날의 체험을 작품화할 생각을 했지만 불행히도 당시 그의 시도는 착수도 되지 않은 채 기억속에서 멀리 사라져 버렸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 8.15 해방의 벅찬 감격은 곧 6.25의 참극으로 짓밟혔다.
당시 서울음대 강사였던 이씨는 목포로 피난을 했다. 괴로운 피난생활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어떻게 종말이 지어질지 대중할 수 도 없었다.

그는 피난살림을 광주로 옮겼다. 그는 광주 국악원에 나가 국악 연구를 하며 나날을 보내었다. 그때 시인 장병준씨가 그에게 한편의 시를 보였다. 장씨는 목포에서 사귄 사람이었다.
시제는 [울음]. 읽어 내려가는 이씨의 눈에 ‘아홉번 끊기어 울음이 운다. 구구구...'의 셋째 줄 시구가 유리조각처럼 아프게 박혀 들었다.
순간 청주 산골짜기의 비둘기 울음소리가 그의 귓전을 때렸다. 그는 7년전의 시간속으로 빠져들어갔다. 한동안 멍해 있었다. 일제하의 민족의 수난과 동란의 민족상잔의 비운이 겹쳐 그의 피를 태웠다. 장병준 시인과 헤어지자 그는 곧장 중앙국민학교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날이 어두워져 그는 숙직교사에게 사정을 하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온몸에 차오르는 뜨거운 힘을 느끼면서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음을 예감했다. 주위는 이미 그의 시각에서 꺼져버렸다. 그는 산비둘기의 울음과 옛부터 되풀이 되어온 민족의 수난의 아픔에 젖어 있었다. 그의 손은 민족의 역사를 더듬는 듯 어둠속에서 밤새껏 건반을 두들겼다.

“흔히들 이 가곡을 슬픈사연의 노래로 착각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이 노래에 담겨있는 소생의 힘을 강조합니다. 고난을 이겨내는 민족은 끈질긴 생명력을 지니는 법입니다” 작곡가의 [울음]에 대한 자평이다. 울음은 이렇듯 깊은 뿌리에서 싹텄었다.

작곡가 나운영씨는 약한 인간이 우주의 의지에 응석을 부리는 것이 이 가곡이라고 설명한다. 고독한 인간은 항상 보챌 대상을 찾는다. 스스로를 가눌 수 없게 된 이씨는 그의 분신에게 기대어 보려 든 것일까? 가곡 [울음]은 한국가곡중의 대표작의 하나라고 나씨는 자신있게 말한다.

이씨의 작품에는 서정주씨의 [국화옆에서]가 있다. 성악가 고 김천애 여사는 이 가곡은 민족적 정서가 깃든 작품이라고 말했다. 이씨의 [울음]과 [국화옆에서]는 성악가 황병덕씨가 1971년 서독에서 가졌던 리사이틀에서 불러 호평을 받았다. 이씨는 1918년생으로 함남 원산, 일본 우에노음악학교를 나와 서울음대 강사.수도사대 음악과장, 경희대 음대강사와 중앙대학 교수를 지냈다.


<감상하기>장병준 시/이호섭 곡/소프라노 이규도
3 Comments
이수현 2007.10.24 01:52  
정말 작곡가 이호섭씨의 가곡 드뭅니다. 이런 곡이 있었군요.
돌시 2010.10.04 23:17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낑깡 2019.09.21 00:53  
이호섭 작곡가님의 생애를 조금이나마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