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에 살리라[김연준 시/김연준 곡]
작곡가 김연준은 1914년 함북 명천에서 태어났으며 사업가인 부친덕에 부유하게 자랐다. 음악을 하는 가족들이 있어 어릴 때 부터 노래솜씨가 뛰어나 주목을 끌었으며 바이올린 등에도 재주가 뛰어났다. 서울로 이사를 하면서 그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해 시를 배웠다. 또 이때 4중창단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현제명 안기영씨 등에게 성악과 작곡을 사사했다.
그러나 그가 작곡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71년경 부터이다. 그는 25세때에(1939) 동아공과학원(현재 한양대학교)을 설립하며 육영사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1960년 대한일보를 설립하여 사업가로서의 위치를 굳히지만 1971년부터 곤란을 겪게 된다. 당시 대한일보사건에 연루되어 일시나마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되고 이때 그의 수많은 생각들을 작곡에 쏟게 되었다. 집행유예로 풀려나 긴 세월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수난의 시간이었으며 그때의 암흑 같았던 감정을 달랠 길은 오직 음악뿐이었다. 종이도 연필도 없는 구치소안에서 그는 떠오르는 악상을 잊지 않으려 손톱으로 구치소 벽에다 악보를 그렸다. 그리고 풀려날 때 쯤 종이와 펜을 얻어 그것을 옮겼다.
그가 구치소에서 작곡한 곡이 바로 그의 대표작 "청산에 살리라" 이다(1973년). 그는 세상이 변하고 자신을 욕해도 진리는 청산과 같이 늘 푸르고 변함없다는 것을 음악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이제 이곡은 거의 모든 음악회에 단골메뉴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1975년 김연준이 독일에서 그의 작품들을 독일어로 옮겨 발표회를 갖고 현지 음악인과 언론에게 격찬을 받은 바 있다. 또한 1976년 독일의 헤르만프라이가 서울공연을 했을 때 앙콜요청을 받고 불렀던 곡이 "청산에 살리라" 였다.
김연준의 작품은 현재 3,600여곡으로 그의 작품열의를 보여주고 있다. 24세 때 한국최초의 바리톤독창회를 연 뒤 지금까지 22번의 작곡발표회를 가졌다.대표작으로는 "청산에 살리라", "비가", "제비", "무곡", "폐원" 등이 있다.
『인생의 모든 세속적인 사업은 가랑잎처럼 져가도 인간이 창조한 위대한 음악은 영원속에 살아남을 것입니다.』
한양학원 김연준 이사장의 말이다.
그러나 그가 작곡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71년경 부터이다. 그는 25세때에(1939) 동아공과학원(현재 한양대학교)을 설립하며 육영사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1960년 대한일보를 설립하여 사업가로서의 위치를 굳히지만 1971년부터 곤란을 겪게 된다. 당시 대한일보사건에 연루되어 일시나마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되고 이때 그의 수많은 생각들을 작곡에 쏟게 되었다. 집행유예로 풀려나 긴 세월은 아니었지만 그에게는 수난의 시간이었으며 그때의 암흑 같았던 감정을 달랠 길은 오직 음악뿐이었다. 종이도 연필도 없는 구치소안에서 그는 떠오르는 악상을 잊지 않으려 손톱으로 구치소 벽에다 악보를 그렸다. 그리고 풀려날 때 쯤 종이와 펜을 얻어 그것을 옮겼다.
그가 구치소에서 작곡한 곡이 바로 그의 대표작 "청산에 살리라" 이다(1973년). 그는 세상이 변하고 자신을 욕해도 진리는 청산과 같이 늘 푸르고 변함없다는 것을 음악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이제 이곡은 거의 모든 음악회에 단골메뉴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1975년 김연준이 독일에서 그의 작품들을 독일어로 옮겨 발표회를 갖고 현지 음악인과 언론에게 격찬을 받은 바 있다. 또한 1976년 독일의 헤르만프라이가 서울공연을 했을 때 앙콜요청을 받고 불렀던 곡이 "청산에 살리라" 였다.
김연준의 작품은 현재 3,600여곡으로 그의 작품열의를 보여주고 있다. 24세 때 한국최초의 바리톤독창회를 연 뒤 지금까지 22번의 작곡발표회를 가졌다.대표작으로는 "청산에 살리라", "비가", "제비", "무곡", "폐원" 등이 있다.
『인생의 모든 세속적인 사업은 가랑잎처럼 져가도 인간이 창조한 위대한 음악은 영원속에 살아남을 것입니다.』
한양학원 김연준 이사장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