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정지용 시/채동선 곡]
1936년 작곡가 채동선이 당시 나라잃은 설움을 달래기 위하여 독일 유학중에 멜로디를 착상한 곡으로 향수의 그리움도 함께 담겨진 곡이다.
어린시절의 추억, 고향마을의 이미지는 시 작품의 소재가 되어 있거니와 우리의 땅이 분단된지도 사반세기를 넘고 있어 가고 싶어도 못가는 나의 잃어버린 고향이다. 울적한 마음이 견딜 수 없을 때 문산리의 임진각으로 찾아가 철책 너머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지나 저 먼발치 이북의 땅과 산마루와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한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운 고향은 아니러뇨/산꿩이 알을 품고/뻐국이 제철에 울건만/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머언 하늘만 떠도는 구름/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한점 꽃이 인정스리 웃고/어린 시절에 불던/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메마른 입술이 쓰디쓰다/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하늘만이/높푸르구나』
이 시는 암울했던 한국 근대사에서 일제에 항거하며 민족음악가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채동선의 대표적 가곡, '고향'의 노랫말이다. 작사자는 한국 문단사에 빛나는 거목으로서 큰 자리를 차지했던 정지용이다.
이 곡은 고향에 대한 애절한 감성을 서정성 깊은 선율로 노래하면서 오랫동안 나라 잃은 우리 민족에게 깊은 위로를 주었다. 하지만 이 곡은 도중에 박화목 작시의 '망향' 또는 이은상 작시의 '그리워'로 노랫말이 바뀌어져 불려야만 했던 '비운의 가곡'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의 작가 정지용이 6·25때 월북한 시인으로 낙인찍혀 금지가곡으로 묶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가곡 '고향'은 이미 중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린 상태였고, 당시 출판된 명곡집에 예외 없이 수록되는 인기가곡이다 보니까, 각 출판사들은 급한대로 박화목의 '망향'으로 그 가사를 대신하였고, 후에 정지용의 시를 텍스트로 한 채동선의 모든 가곡을 다른 가사로 바꾸는 작업에 들어가면서 '고향'의 가사는 노산 이은상 '그리워'로 대체된다.
지금의 4·50대 중장년층에게 특히 잘 알려진 이 곡이 '그리워'란 제목으로 더욱 잘 기억하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이 곡이 본래의 노랫말을 되찾은 것은 1988년 정지용을 비롯한 월북작가에 대한 해금조치가 내려진 이후였다. 1993년에 발간된 채동선 작품 제2집에는 9편의 정지용 詩가 모두 제자리를 찾아갔다.
단조의 화성으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 우울한 분위기의 이곡은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한을 담고 있는 곡으로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채동선은 1901년 6월 11일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에서 아버지 채중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남선무역회사'를 경영하며 벌교의 이름난 부호였던 채중현은 현재 벌교 남국민학교에 송덕비가 세워져 있을 만큼 지역사회의 여러 가지 공익사업에 힘을 기울인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다.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도 남달라서, 어린 채동선은 여덟 살 때까지 벌교에서도 수십리 떨어진 순천공립보통학교까지 때로는 걸어서, 때로는 어른(머슴)들에 업혀서 통학을 하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울로 올라와 제일고보(현 경기고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 시절에 채동선은 학업에 열중하면서, 뜻이 맞는 친우들과 함께 조국의 장래에 대한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는 등 민족의식에 대한 투철한 이념을 고취시켜 나갔다. 채동선의 이러한 자세는 훗날 그의 음악관을 형성하는 중요한 토대로 작용하였고 이의 실천을 위해 평생동안 온 몸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이 시절에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를 듣고 그 소리에 매료된다. 슈만이 파가니니의 독주회를 듣고 법학도의 길을 포기하고 음악가로서의 길을 결심하듯이, 선천적으로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했던 채동선의 음악가로서의 길은 이때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급기야, 채동선은 홍난파에게 1년간 바이올린을 배우게 된다. 장안에 바이올린 소지자가 4,5명이 채 안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음악가로서의 본격적인 정진은 유보된 상태였다. 한편, 경기고보 시절 뛰어난 학업 성적과 학우들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채동선은 1919년 '3·1만세사건'이 발발하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고, 왜경의 감시가 계속되자 아버지의 권유로 결국 4학년 때 경기고보를 떠나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고 1924년 와세다 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게 된다. 물론 이 시절에도 채동선은 일본 바이올린계의 원로인 多忠朝 문하에서 4년동안 바이올린 수업을 계속하였다. 와세다 대학 졸업 후에는 잠시동안이지만 일본 교향악계의 개척자인 일본 교향악단에 입단하여 일본 각지에 연주여행을 하기도 하였다. 그후 채동선은 영문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잠시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포기하고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독일로 유학하여 리햐르트 할체에게 바이올린을 그리고 빌헬름 클라테에게 작곡을 배운다. 그리고 1926년에는 -훗날 지금의 '베를린 예술대학'으로 확대개편되는- 베를린 '슈테른쉔 음악원'에 입학하여 음악공부를 계속하였다. 1929년에 귀국한 채동선은 제2의 삶을 함께 하게될 부인 이소란 여사를 만나게 된다. 두사람의 만남은 채동선의 여동생인 채선엽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당시 이소란과 채선엽은 이화여중 동기로서, 나란히 이화여전의 영문과와 음악과에 진학하였고 주위에서 쌍둥이라고 부를 정도로 늘 함께 다니며 다정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채선엽은 이소란에게 늘 오빠 자랑을 하였고, 마침 독일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 길에 오른 채동선을 두 사람이 마중하게 된 것이었다. "그때가 아마 초가을 무렵이었던 것 같아요. 원산항에 바로 도착하여 서울역까지는 기차로 온다더군요. 그래서 선엽씨와 함께 서울역에 밤 9시 30분에 마중 나갔지요. 그런데 독일에서 유학한 학생이라 해서 씩씩하고 야심에 찬 청년인 줄 알았는데 매우 수수한 사람이더군요"라고 부인은 당시를 회상하였다 (1931년에 이화여전을 졸업한 소프라노 채선엽은 1934년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아! 목동아', '한 떨기 장미꽃' 등을 취입하였고, 1937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의 오사카 공회당에서 제1회 독창회를 가졌는데, 당시 '아사이'신문에는 '精度에 들어선 유망한 예술가'라는 평이 실리기도 하였다. 1938년 귀국하여 부민관에서 귀국독창회를 가진 후 계속된 국내활동으로 그녀는 당대 최고의 인기성악가의 명성을 누린다. 채동선 집안의 음악적 소질에 대한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시적 감상
'향수'가 고향에 대한 절실한 그리움을 노래했다면, 정지용 초기 시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고향'은 그와 같은 그리움을 안고 막상 찾아온 고향에서 느끼는 상실감을 표현하고 있다. 자연의 모습은 변함없이 그대로인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상실감으로 변모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공동체적 삶의 양상이 현실 속에서 피폐화된 채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측면은 이 시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이 시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시적 자아의 의식 속에서 구성된 고향의 이미지와 현실의 불일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고향에 대한 절실한 그리움으로 인해 시적 자아의 의식 속에서 고향이 낭만적인 이상향으로 설정되었거나, 유년시절처럼 고향을 낭만적으로만 의식할 수 없을 만큼 현실 속에서의 시적 자아의 의식이 황폐화된 데서 기인하는 것일 수 있다.
이 시는 변함없는 자연과 인간사의 대비를 통해 고향의 상실감을 간결하고 담담한 어조에 담아낸 작품이다 특히 외적 요인에 의한 고향의 변모 양상보다 시적 자아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고향의 이미지와 현실적 모습의 차이를 문제 삼은 점이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형태상으로 보면, 1연과 6연의 수미쌍관 구조는, '돌아와도/울건만/웃고/돌아와도'의 방임형 어미계열과 '아니려뇨/지니지 않고/아니나고/높푸르구나'의 부정형 어미 계열의 호응구조와 더불어 이 시의 기본적 구조를 이룬다. 이러한 구조상의 특성으로 인해 고향의 상실감이 자연과의 대비 속에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다.
또한 이 시는 감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동원하고 있지는 않지만, 해방 직후 유행가로 만들어져 널리 애창되었을 만큼 정지용 특유의 속박한 리듬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운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지니지 않고
먼 하늘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이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운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어린시절의 추억, 고향마을의 이미지는 시 작품의 소재가 되어 있거니와 우리의 땅이 분단된지도 사반세기를 넘고 있어 가고 싶어도 못가는 나의 잃어버린 고향이다. 울적한 마음이 견딜 수 없을 때 문산리의 임진각으로 찾아가 철책 너머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지나 저 먼발치 이북의 땅과 산마루와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한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운 고향은 아니러뇨/산꿩이 알을 품고/뻐국이 제철에 울건만/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머언 하늘만 떠도는 구름/오늘도 뫼 끝에 홀로 오르니/한점 꽃이 인정스리 웃고/어린 시절에 불던/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메마른 입술이 쓰디쓰다/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그리던 하늘만이/높푸르구나』
이 시는 암울했던 한국 근대사에서 일제에 항거하며 민족음악가로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채동선의 대표적 가곡, '고향'의 노랫말이다. 작사자는 한국 문단사에 빛나는 거목으로서 큰 자리를 차지했던 정지용이다.
이 곡은 고향에 대한 애절한 감성을 서정성 깊은 선율로 노래하면서 오랫동안 나라 잃은 우리 민족에게 깊은 위로를 주었다. 하지만 이 곡은 도중에 박화목 작시의 '망향' 또는 이은상 작시의 '그리워'로 노랫말이 바뀌어져 불려야만 했던 '비운의 가곡'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의 작가 정지용이 6·25때 월북한 시인으로 낙인찍혀 금지가곡으로 묶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가곡 '고향'은 이미 중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린 상태였고, 당시 출판된 명곡집에 예외 없이 수록되는 인기가곡이다 보니까, 각 출판사들은 급한대로 박화목의 '망향'으로 그 가사를 대신하였고, 후에 정지용의 시를 텍스트로 한 채동선의 모든 가곡을 다른 가사로 바꾸는 작업에 들어가면서 '고향'의 가사는 노산 이은상 '그리워'로 대체된다.
지금의 4·50대 중장년층에게 특히 잘 알려진 이 곡이 '그리워'란 제목으로 더욱 잘 기억하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이 곡이 본래의 노랫말을 되찾은 것은 1988년 정지용을 비롯한 월북작가에 대한 해금조치가 내려진 이후였다. 1993년에 발간된 채동선 작품 제2집에는 9편의 정지용 詩가 모두 제자리를 찾아갔다.
단조의 화성으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 우울한 분위기의 이곡은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한을 담고 있는 곡으로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채동선은 1901년 6월 11일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에서 아버지 채중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남선무역회사'를 경영하며 벌교의 이름난 부호였던 채중현은 현재 벌교 남국민학교에 송덕비가 세워져 있을 만큼 지역사회의 여러 가지 공익사업에 힘을 기울인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였다.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도 남달라서, 어린 채동선은 여덟 살 때까지 벌교에서도 수십리 떨어진 순천공립보통학교까지 때로는 걸어서, 때로는 어른(머슴)들에 업혀서 통학을 하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울로 올라와 제일고보(현 경기고교)에 입학하게 된다. 이 시절에 채동선은 학업에 열중하면서, 뜻이 맞는 친우들과 함께 조국의 장래에 대한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하는 등 민족의식에 대한 투철한 이념을 고취시켜 나갔다. 채동선의 이러한 자세는 훗날 그의 음악관을 형성하는 중요한 토대로 작용하였고 이의 실천을 위해 평생동안 온 몸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이 시절에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를 듣고 그 소리에 매료된다. 슈만이 파가니니의 독주회를 듣고 법학도의 길을 포기하고 음악가로서의 길을 결심하듯이, 선천적으로 예술적 감수성이 풍부했던 채동선의 음악가로서의 길은 이때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급기야, 채동선은 홍난파에게 1년간 바이올린을 배우게 된다. 장안에 바이올린 소지자가 4,5명이 채 안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음악가로서의 본격적인 정진은 유보된 상태였다. 한편, 경기고보 시절 뛰어난 학업 성적과 학우들의 지도적 위치에 있던 채동선은 1919년 '3·1만세사건'이 발발하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고, 왜경의 감시가 계속되자 아버지의 권유로 결국 4학년 때 경기고보를 떠나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그리고 1924년 와세다 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게 된다. 물론 이 시절에도 채동선은 일본 바이올린계의 원로인 多忠朝 문하에서 4년동안 바이올린 수업을 계속하였다. 와세다 대학 졸업 후에는 잠시동안이지만 일본 교향악계의 개척자인 일본 교향악단에 입단하여 일본 각지에 연주여행을 하기도 하였다. 그후 채동선은 영문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잠시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포기하고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독일로 유학하여 리햐르트 할체에게 바이올린을 그리고 빌헬름 클라테에게 작곡을 배운다. 그리고 1926년에는 -훗날 지금의 '베를린 예술대학'으로 확대개편되는- 베를린 '슈테른쉔 음악원'에 입학하여 음악공부를 계속하였다. 1929년에 귀국한 채동선은 제2의 삶을 함께 하게될 부인 이소란 여사를 만나게 된다. 두사람의 만남은 채동선의 여동생인 채선엽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당시 이소란과 채선엽은 이화여중 동기로서, 나란히 이화여전의 영문과와 음악과에 진학하였고 주위에서 쌍둥이라고 부를 정도로 늘 함께 다니며 다정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채선엽은 이소란에게 늘 오빠 자랑을 하였고, 마침 독일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 길에 오른 채동선을 두 사람이 마중하게 된 것이었다. "그때가 아마 초가을 무렵이었던 것 같아요. 원산항에 바로 도착하여 서울역까지는 기차로 온다더군요. 그래서 선엽씨와 함께 서울역에 밤 9시 30분에 마중 나갔지요. 그런데 독일에서 유학한 학생이라 해서 씩씩하고 야심에 찬 청년인 줄 알았는데 매우 수수한 사람이더군요"라고 부인은 당시를 회상하였다 (1931년에 이화여전을 졸업한 소프라노 채선엽은 1934년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아! 목동아', '한 떨기 장미꽃' 등을 취입하였고, 1937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의 오사카 공회당에서 제1회 독창회를 가졌는데, 당시 '아사이'신문에는 '精度에 들어선 유망한 예술가'라는 평이 실리기도 하였다. 1938년 귀국하여 부민관에서 귀국독창회를 가진 후 계속된 국내활동으로 그녀는 당대 최고의 인기성악가의 명성을 누린다. 채동선 집안의 음악적 소질에 대한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시적 감상
'향수'가 고향에 대한 절실한 그리움을 노래했다면, 정지용 초기 시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고향'은 그와 같은 그리움을 안고 막상 찾아온 고향에서 느끼는 상실감을 표현하고 있다. 자연의 모습은 변함없이 그대로인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상실감으로 변모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공동체적 삶의 양상이 현실 속에서 피폐화된 채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측면은 이 시에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이 시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시적 자아의 의식 속에서 구성된 고향의 이미지와 현실의 불일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고향에 대한 절실한 그리움으로 인해 시적 자아의 의식 속에서 고향이 낭만적인 이상향으로 설정되었거나, 유년시절처럼 고향을 낭만적으로만 의식할 수 없을 만큼 현실 속에서의 시적 자아의 의식이 황폐화된 데서 기인하는 것일 수 있다.
이 시는 변함없는 자연과 인간사의 대비를 통해 고향의 상실감을 간결하고 담담한 어조에 담아낸 작품이다 특히 외적 요인에 의한 고향의 변모 양상보다 시적 자아의 의식 속에 존재하는 고향의 이미지와 현실적 모습의 차이를 문제 삼은 점이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형태상으로 보면, 1연과 6연의 수미쌍관 구조는, '돌아와도/울건만/웃고/돌아와도'의 방임형 어미계열과 '아니려뇨/지니지 않고/아니나고/높푸르구나'의 부정형 어미 계열의 호응구조와 더불어 이 시의 기본적 구조를 이룬다. 이러한 구조상의 특성으로 인해 고향의 상실감이 자연과의 대비 속에 더욱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다.
또한 이 시는 감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동원하고 있지는 않지만, 해방 직후 유행가로 만들어져 널리 애창되었을 만큼 정지용 특유의 속박한 리듬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운 고향은 아니러뇨
산꿩이 알을 품고 뻐꾸기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지니지 않고
먼 하늘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뫼끝에 홀로 오르니
흰점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메마른 입술이 쓰디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운 하늘만이 높푸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