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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이야기

김성태의 동심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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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바람에 꽃이 지니 세월 덧없어
만날 길은 뜬 구름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동심초(同心草)는 당대의 여류시인 설도의 원시에 김억 시인이 번역하고 작곡가 김성태씨가 곡을 붙인 대표적인 우리 가곡중에 하나이다.
동심초는 설도(薛濤)의 오언절구인 춘망사 4수(春望詞 四首) 중 세 번째에 등장하는 시어다.

<동심초의 전문>
花開不同賞 화개불동상ㅣ 꽃 피어도 함께 바라볼 수 없고
花落不同悲 화락불동비ㅣ꽃이 져도 함께 슬퍼할 수 없네
欲問相思處 욕문상사처ㅣ 그리워하는 마음은 어디에 있나
花開花落時 화개화락시ㅣ 꽃 피고 꽃이 지는 때에 있다네

攬草結同心 남초결동심ㅣ 풀 뜯어 동심결로 매듭을 지어
將以遺知音 장이유지음ㅣ 님에게 보내려 마음먹다가
春愁正斷絶 춘수정단절ㅣ 그리워 타는 마음이 잦아질 때에
春鳥復哀吟 춘조부애음ㅣ 봄 새가 다시 와 애달피 우네

風花日將老 풍화일장로ㅣ 바람에 꽃잎은 날로 시들고
佳期猶渺渺 가기유묘묘ㅣ 아름다운 기약 아직 아득한데
不結同心人 불결동심인ㅣ 한마음 그대와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 공결동심초ㅣ 공연히 동심초만 맺고 있다네

那堪花滿枝 나감화만지ㅣ 어쩌나 가지 가득 피어난 저 꽃
번作兩相思 번작량상사ㅣ 날리어 그리움으로 변하는 것을
玉箸垂朝鏡 옥저수조경ㅣ 거울에 옥 같은 두 줄기 눈물
春風知不知 춘풍지불지ㅣ 봄바람아 너는 아는지 모르는지

설도는 당대(唐代)의 기녀이다. 자는 공도(洪度). 출생과 사망시기가 정확하지 않지만 대개 770년과 832년쯤이라고 한다. 원적(原籍)은 장안(長安). 어려서 하급관리였던 아버지가 성도(成都)에서 근무를 하게 되어 그곳으로 이주해 살았다. 8,9 살에 이미 시를 지으며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나, 아버지가 죽자 가세가 기울어서 16세에 악적(樂籍: 고급기생이 되는 것)에 올랐다.

설도는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으며, 아주 총명하고 말재주도 좋았기에 그 지방의 군사장관이었던 웨이가오라는 사람의 총애를 받았다. 웨이가오는 설도의 나이 35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는 그때까지 그녀를 계속해서 약 20년 동안 돌봐주었다. 웨이가오가 죽으면서 설도에게 충분한 재산을 남겨 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나머지 생애 동안 악적(樂籍)에서 나와 독립적으로 살 수 있었다.

설도는 그녀의 재능을 흠모한 당시의 일류 문인들과의 교류가 많았는데, 백거이(白居易), 원진(元[禾眞]), 유우석(劉禹錫), 두목(杜牧)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중 원진과의 정분은 각별했다고 한다.

'동심초' 시는 설도가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을 대상으로 쓴 시라고 전해진다. 그것이 그녀를 돌봐주고 총애해 주던 웨이가오를 향한 것이라고 전해오지만 일설로는 웨이가오가 죽고 난 후 연모하게 된 원진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원진(779 - 831)은 설도보다 10여세 연하였으며 자는 미지(微之)였다. 9세 때 시를 짓기 시작했고 15세 때 과거에 급제한 수재로 백거이와 아주 절친한 관계였다고 한다. 그는 권력 다툼에 져서 중앙에서
밀려나 동천(東川))에 좌천되었으며 약 5년 후에 백거이도 '강주'라는 곳으로 귀양을 갔다.

809년 3월 설도와 원진이 처음 만난다. 당시 원진은 동천으로 좌천되어 와 있었는데 설도의 문명(文名)을 듣고 사모해서 방문하게 된다.
설도 역시 원진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설도는 자기가 직접 만든 아름다운 색종이에 백 여편의 시를 써서 그에게 주며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고, 원진 역시 설도에게 향한 정을 답시로써 표현했다.

얼마 지나서 두 사람은 이별을 하게 되는데, 그때 둥근 벼루를 반으로 나누어서 하나씩 간직하며
다시 만나 그것을 둥그렇게 만들 날을 기약했다. 원진은 옛날 은사였던 위하경(韋夏卿)을 만났는데
그는 원진이 기생을 좋아하고 있다고 책망하면서 자기 질녀(姪女)를 처로 들일것을 종용했다.

후에 원진과 설도는 성도에서 만났는데, 그 위(韋)씨녀가 원진을 사랑하여 그 벼루를 잡고 가는 것을 막았고 급기야 벼루를 시냇물에 빠뜨려 버리고 말았다 한다.
설도는 자신의 한계를 느꼈고, 원씨 문중과 부딪칠 수 없음을 알았으며, 또 위씨가 원진을 따르려 하는 마음을 느끼게 되어 드디어 사랑이 깨어지는 아픔을 감수하게 되었다. 그후 원진과 위씨는 결혼을 했고, 설도는 홀로 남아 외로운 신세가 되어 버렸다.

40세가 되어서야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 설도였지만 이미 그것은 떨어진 꽃의 심사(心思)였고,
그녀에게 오로지 정을 바칠 수 없는 원진은 흘러가는 바람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었다.
사람은 찾았으나 영원히 마음을 엮을 수 있는  '동심인(同心人)'이 되지는 못한 것이었다.
설도는 비록 원진과 함께 할 수는 없었지만 죽을 때까지 그를 사랑하였다고 한다.

설도는 원진과의 이별 후에도 계속 시를 썼는데,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도교의 사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약 450편의 시를 썼다고 하는데 지금은 약 90수만 남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숫자만으로도 당대(唐代)의 어떤 여류 시인의 글보다 많다고 한다.

*

不結同心人 마음과 마음은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 헛되이 풀잎만 맺었는고.

空結同心草 이 부분은 과거형이지만, 김억 시인은 '맺으려는고' 와 같이 미래형으로 번역하여 휠씬 시적인 멋을 자아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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