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석의 주요작품 이야기들
작곡가 박찬석은 1922년 전남 완도에서 태어나 진안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후에 전주사범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만난 음악선생이 작곡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의 작곡활동은 1940년경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약 60여편의 작품을 만들었는데 지금도 애창되는 곡으로는 20년 전에 LP판으로 발표된 곡을 CD로 재구성하여 새 그릇에 담은 ‘낙엽’을 비롯한 20곡과 그 밖의 10곡 등 약 30여곡이 우리 가곡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의 첫 작품 '완춘'은 본격적인 작곡공부를 시작하기 전인 60년 전에 만든 것으로서 여학교에서 열혈 청년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직접 작시까지 하여 만든 작품이다. 예술가로서의 천부적 재능이 그 때부터 보이기 시작한 것이리라. 한국의 가곡계를 대변할 원로 음악인들이 이미 대부분 작고한 지금. 80대 중반을 넘은 그는 우리 음악계의 산증인이다.
박찬석 선생의 주요작품들에 대한 작곡 이야기는 선생의 제자인 이정유씨가 채록하였다.
'낙 엽'
박찬석 선생을 대표할 수 있는 곡이라 할 만큼 대중적인 명곡이다. 이 곡은 선생이 서울사범학교(현 서울교대 전신)에 재직할 당시, 국내에서 미개척분야인 무용음악 창작활동을 시작하던 무렵에 탄생한 곡이다. 처음에는 무용음악으로 작곡되었으나 피아노 연주를 들은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가곡으로 만드는 게 좋겠다고 성화를 대어 나중에 가곡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제자들의 열화와 같은 압력에 못 이겨 마음을 굳히기는 했으나 갑자기 알맞은 시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 고심하고 있었는데 마침 3학년에 '정삼주' 라는 학생 시인을 추천하므로서 결실을 보게 된 작품이다.
제자 정삼주는 행당동 교실 창 밖 플라타너스에서 떨어지는 잎새를 보고 시상을 떠올려 선생님의 주문대로 명시로서 예쁜 옷을 만들어 입혔다.
또 이 노래는 애절한 시에 아름다운 선율이 앙상블을 이룸으로서 가곡 '낙엽'은 입에서 입을 통해 감수성이 예민한 방방곡곡의 여학생들에게 널리 불리게 되었고 당시 여학생들의 첫 번째 애창곡으로 꼽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50대 이상의 여성들은 이 노래를 모르는 이가 없고 심지어는 당시 오사카 한국인학교에서 서울사범에 파견 나온 교포 교사가 귀국 후 이 노래를 일본에 전파, 현지에서도 대단한 선풍을 일으켰다고 한다.
'남 촌'
대부분의 예술가가 그러하듯 선생께서도 작품활동을 하면서 기존 작품에 대해 큰 만족을 얻지 못해 노심초사하다가 불후의 명작을 하나 남겨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김동환 선생의 시 '남촌'에 곡을 붙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악상을 구상하던 중 뜻밖에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으니 그것은 당시 가수 '박재란'이 부른 가요 대중가요 '남촌'이 돌풍을 일으키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비록 가곡과 가요의 엄격한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시기적으로 같은 제목과 내용의 시를 동시에 발표한다는 게 부담스럽다고 생각한 선생은 유행가 바람이 잔잔해지기를 3, 4년 기다렸다가 다시 악상을 정리한 끝에 10년만에 이 곡을 탄생시켰다고 하니 창작의 그 산고를 누가 알겠는가.
'위령가'
선생이 전주여중(당시 6년제) 재직할 때에 작곡한 이 노래는 국토 분단의 아픔을 여실히 대변하고 있다. 6·25가 발발하기 몇 년 전, 어느 날 밤 느닷없이 전북경찰악대장이 집에 찾아와서 '내일 낮 여순반란사건에 희생된 군경의 위령제를 지낼 예정인데 위령가가 준비되지 않았으니 작곡과 함께 여학교 합창단 동원도 부탁한다' 라고 하면서 가더란다.
두고 간 노래가사에 따라 밤을 꼬박 새워 작곡을 마친 선생은 숨 돌릴 틈도 없이 학생들을 연습시켜 행사장에서 '위령가'를 연주했더니 구슬픈 '위령가'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려 온통 울음바다가 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고 한다.
그 후 이후부터 위령제 때마다 이 노래가 단골로 등장했다고 하는데 그 후유증도 만만치 않아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난다고 한다. 사연은 전시 적치 하에서도 전주에 머물고 있다가 정치보위부에서 '위령가' 작곡을 반동행위로 몰아 여러 번 불려 다녔는데 간신히 고향으로 피신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한 이야기는 드라마틱하다.
'봄이 오면'
우리나라에 TV가 보급되기 전인 1956년경, 라디오 드라마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때 만든 곡이다. 드라마 주제는 기억에 아물거리지만 유명한 극작가 이서구 선생이 주제음악에 시를 붙인 이 곡의 노래말이 당시 작곡가에게 매우 커다란 감동을 준 바 있어 그 시에 곡을 붙여서 만들었다.
'임의 노래'
'봄이 오면'과 같은 시기에 작곡한 것인데 작곡 동기가 소월의 시에 매료된 데 있기도 하지만 당시 그 나이에 자신이 세상을 보는 눈이 밝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무렵, 다른 한편으로 노도처럼 밀려오는 인생의 공허함에 방황하다가 이를 달래보려는 마음에서 명시에 곡을 붙이게 되었다.
특히 노래말 서두와 중간부에 반복해서 불러지는 '그리운 님의 맑은 노래는 언제나 제 가슴에 들어있어요.' 부분은 이 노래에서 가장 감정을 잘 나타내야 할 핵심부여서 무척 고심하다가 우리스런 감성의 민속풍으로 클라이맥스를 장식했다.
'바 람'
일반적으로 가곡의 구성 요소로서 작곡자, 성악가, 반주자 등을 들고 있지만 실제로는 반주자의 비중을 같이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곡에서는 작곡가의 의도가 '반주자'를 '반주가'로 격상시켜 노래 반주의 보조자가 아닌 독립된 위치에서, 특히 전주와 중간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표현력을 극대화시킨 흔적이 뚜렷하게 부각된 것이 특징이다.
또 이 작품에서 뿐 아니라 다른 곡에 있어서도 작곡가의 기본방향은 어떤 곡을 노래하고 반주하는데 있어서도 작곡가가 제시한 악보에 맞춰 한 치의 오차 없는 연주를 강요하기보다는 성악가나 반주가 나름대로의 음악세계를 존중하고 재능을 계발토록 하기 위해 Cadenza(독주부분)를 즐겨 쓰는 편이다.
'산 위에'
이 곡은 전주여중(6년제) 교사시절에 만든 곡이다. 당시 이 학교의 지동욱 교장의 애창곡이기도 하여 춘추로 열리는 교내 음악콩클 성악부분에 교장 선생이 매년 지정곡으로 선정, 이 학교 학생들의 애창곡이 된 노래이다.
'풍년가'
금수현 선생(금난새 관현악단 지휘자의 부친)이 문교부 편수관이던 시절에 초등학교 6학년 음악교과서에 실릴 기악합주곡 작곡을 요청하여 만든 곡이다. 그 후, 주위에서 이 곡의 멜로디와 리듬이 우리스러우니 가곡으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권고에 따라 개작했다.
그러나 당시는 무명 작곡가 시절이라 마땅한 노래말이 없어 서울사범(서울교대 전신) 동료 교사인 김원경 선생에게 부탁하니 흔쾌히 명시로서 옷을 입혀주어 탄생하게 된 곡이다.
이 노래가 유명하게 된 계기는 한참 뒤, MBC에서 해마다 가을맞이 '가곡제' 행사를 했는데 그 때마다 성악가 신영조 교수(한양대)로 하여금 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 이에 따라 다른 방송국에서도 가을이 되면 이 노래를 전파에 실어보내 풍년을 상징하거나 기원하는 곡으로 국민들의 마음에 심어지게 되었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로 시작되는 소월의 시에 흠뻑 빠져 작곡을 하게 되었는데 노래 중간부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는 이 노래의 클라이맥스로서 성악가 정영자 교수(중앙대)가 노래를 부를 당시 '부모를 여의고 가슴에 복받치는 서러운 감정을 그대로 노래에 담았다'고 하여 더욱 유명해진 곡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눈물을 여러 차례 보인 적이 있어 작곡자와 보는 이로 하여금 진한 감동과 안쓰러움을 주게 한 곡이기도 하다.
'훈 풍'
이 노래는 노랫말의 구성이 특이하다. 1절은 작곡가가 시를 쓰고 2절은 당시 서울사범에 재학 중인 제자 '최귀옥'이 만들었는데 이 노래를 들은 작곡가 나운영 교수가 사석에서 작곡가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나다고 추켜세울 정도로 전력 투구한 작품이다.
'청사포 연가'
특이한 케이스로 만든 곡이다. 부산에 사는 작곡가 권오철 교수가 요청하여 작곡한 것인데 당시 부산시에서 부산 주변 명소를 알리는 행사의 일환으로 개최한 음악회에 등장한 곡이다. 명소마다 시인이 시를 쓰고 여기에 작곡가가 곡을 붙여 작품화한 것을 유망 성악가를 동원, 신작가곡발표회 형식을 빌려 발표한 곡 중에 하나이다.
이 행사는 1부에서 행진곡풍의 노래가, 2부에서는 Cadenza로 작곡되었다.
'피리를 불면'
조지훈의 시에 매료되어 1950년대에 작곡한 것인데 전주부를 화려하게 표현한 게 이 곡의 특징이다.
'Lion's song'
작곡가가 교직 외에 25년 동안 봉사활동을 한 세계 최대 조직인 'Lion's club'에 몸을 담고 있을 때 만든 곡이다. 한 때 이 조직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사무총장, 감사, 자문위원 등 요직을 거친 바 있는 데 작사는 당시 김병삼(전 총무처 장관) 총재가 했고 지금도 변함 없이 '봉사와 친목'을 모토로 활동하는 회원들의 애창곡이다.
2004년 5월, KBS는 한국의 원로 음악인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음악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기획물로 제작한 바 있는데 첫 번째 방송에서 그는, 일제 하와 해방 직후의 우리 음악계를 회고하면서 일정 치하 우리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한 그들의 음악교육정책에 대해서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고 외면했지만 해방 직후는 비록 음악교과서가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민요를 채보하고, 없는 동요를 즉석에서 작곡하여 가르치기도 한 정열과 희망이 넘치는 시기였다고 했다. 또한 오늘날의 가곡계는 전에 비해 창작환경은 많이 좋아졌으나 작곡을 하는데 있어 지나치게 예술성을 강조하고 기교에 치중하는 경향에 흐르다 보니 성악가가 아니면 도저히 따라 부르기 어렵게 음정이 높거나, 음역이 넓고 멜로디의 음폭 또한 변화가 심한 작품을 양산하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또 작곡환경이 이와 같이 바뀜으로서 우리 가곡이 날로 대중과 틈이 벌어져 지금은 교육현장에서마저 외면당하는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 있다는 지적에서는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 따라서 우리가곡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도록 멜로디를 단순화하는 한편, 아주 높은 음 사용을 자제하는 등의 자성과 노력이 절실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음악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그리스의 '음·수·체'의 교육원칙(「음악을 통한 전인격 도야, 수학을 통한 과학적 사고, 체육을 통한 튼튼한 몸」)과 같이 우리도 입시 위주 교육의 틀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 인성 교육을 중시하는 교육으로의 전환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예술교육에 있어서도 지식의 학문적 가르침도 필요하지만 그 보다는 감동을 주어 가슴속의 것을 토해내게 하는 감성적 사고를 계발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국적 없는 가요가 음악계를 판치고 있고 가곡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마당에서 후배작곡가들은 가곡을 살리기 위해 '가슴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는 노래를 젊음을 불태우는 마음으로 작품을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는 피끓는 말과 국민 1인 1 애창가곡갖기운동본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가곡살리기운동에 많은 성원이 있기를 부탁한다는 말을 강조하면서 끝을 맺었다.
- 박찬석과 그의 작곡집에 등장한 성악가들
심송학 교수
'바람'을 부른 심송학 교수는 음색이 아름답고 특징이 멜랑콜리해서 작곡가를 감동케 하는 성악가이다. 또 대학(경북대학교 예술대학) 안에 가곡연구회를 설치하는 등 우리 가곡에 대해 남다른 열정을 가진 분이다.
정영자 교수
'낙엽',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임의 노래' 등 작곡자의 여러 곡을 훌륭하게 소화해낸 성악가이다.
정영자 교수와의 인연은 작곡가가 서울 무학여고 교사 시절에 뛰어난 그의 성악적 재능을 발견하고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고교시절 잠자는 재능을 일깨우고 계발하여 대학교에 진학시키기까지 음악적 후견인으로서의 역할과 진학 후, 성악가로서 성공할 때까지 동고동락한 대표적 애제자와 스승 사이이다.
'작곡가가 성악가를 길렀다'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어불성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발성, 발음 등 기초적 소양에 관해서는 우선적으로 기성 성악가로부터 배워야 하지만 완벽한 성악가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감성을 계발하게 하고 폭 넓은 음악의 세계를 섭렵하게 하는 등 음악과 관련한 모든 것에 대해 1차 창작자인 작곡가나 재창작자인 지휘자, Pianist 등에게서 교육을 받는 것도 필수과정이다.
'낙엽',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임의 노래', '남촌' 등 노래를 불렀다.
신영조 교수
작곡가와 특별한 인연은 없었으나 화려한 미성과 다이내믹한 창법으로 작곡가의 작품을 가장 잘 표현해낼 수 있는 음색을 가진 성악가로 생각하여 특별히 연주를 부탁한 것이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되었다.
'풍년가', '피리를 불면', '봄이 오면', '위령가' 등의 노래를 불렀다.
최원범 성악가
대학 후배로서 음성에 박력이 있고 호소력이 있을 뿐 아니라 의젓하고 당당한 무대 매너에 이끌려서 '통천포 사랑', '청사포 연가'를 불러줄 것을 부탁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
박찬석 (朴贊錫)
생년월일 : 1922년 03월 23일
前 서울교대 음악교육과 교수 , 문화예술인, 음악인, 작곡가
최종학력 : 일본 특허대(特許大) 음학 박사
최근경력 : 한국음악협회 자문위원
후에 전주사범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만난 음악선생이 작곡가의 길로 들어서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의 작곡활동은 1940년경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약 60여편의 작품을 만들었는데 지금도 애창되는 곡으로는 20년 전에 LP판으로 발표된 곡을 CD로 재구성하여 새 그릇에 담은 ‘낙엽’을 비롯한 20곡과 그 밖의 10곡 등 약 30여곡이 우리 가곡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의 첫 작품 '완춘'은 본격적인 작곡공부를 시작하기 전인 60년 전에 만든 것으로서 여학교에서 열혈 청년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직접 작시까지 하여 만든 작품이다. 예술가로서의 천부적 재능이 그 때부터 보이기 시작한 것이리라. 한국의 가곡계를 대변할 원로 음악인들이 이미 대부분 작고한 지금. 80대 중반을 넘은 그는 우리 음악계의 산증인이다.
박찬석 선생의 주요작품들에 대한 작곡 이야기는 선생의 제자인 이정유씨가 채록하였다.
'낙 엽'
박찬석 선생을 대표할 수 있는 곡이라 할 만큼 대중적인 명곡이다. 이 곡은 선생이 서울사범학교(현 서울교대 전신)에 재직할 당시, 국내에서 미개척분야인 무용음악 창작활동을 시작하던 무렵에 탄생한 곡이다. 처음에는 무용음악으로 작곡되었으나 피아노 연주를 들은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가곡으로 만드는 게 좋겠다고 성화를 대어 나중에 가곡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제자들의 열화와 같은 압력에 못 이겨 마음을 굳히기는 했으나 갑자기 알맞은 시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 고심하고 있었는데 마침 3학년에 '정삼주' 라는 학생 시인을 추천하므로서 결실을 보게 된 작품이다.
제자 정삼주는 행당동 교실 창 밖 플라타너스에서 떨어지는 잎새를 보고 시상을 떠올려 선생님의 주문대로 명시로서 예쁜 옷을 만들어 입혔다.
또 이 노래는 애절한 시에 아름다운 선율이 앙상블을 이룸으로서 가곡 '낙엽'은 입에서 입을 통해 감수성이 예민한 방방곡곡의 여학생들에게 널리 불리게 되었고 당시 여학생들의 첫 번째 애창곡으로 꼽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50대 이상의 여성들은 이 노래를 모르는 이가 없고 심지어는 당시 오사카 한국인학교에서 서울사범에 파견 나온 교포 교사가 귀국 후 이 노래를 일본에 전파, 현지에서도 대단한 선풍을 일으켰다고 한다.
'남 촌'
대부분의 예술가가 그러하듯 선생께서도 작품활동을 하면서 기존 작품에 대해 큰 만족을 얻지 못해 노심초사하다가 불후의 명작을 하나 남겨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김동환 선생의 시 '남촌'에 곡을 붙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악상을 구상하던 중 뜻밖에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으니 그것은 당시 가수 '박재란'이 부른 가요 대중가요 '남촌'이 돌풍을 일으키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비록 가곡과 가요의 엄격한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시기적으로 같은 제목과 내용의 시를 동시에 발표한다는 게 부담스럽다고 생각한 선생은 유행가 바람이 잔잔해지기를 3, 4년 기다렸다가 다시 악상을 정리한 끝에 10년만에 이 곡을 탄생시켰다고 하니 창작의 그 산고를 누가 알겠는가.
'위령가'
선생이 전주여중(당시 6년제) 재직할 때에 작곡한 이 노래는 국토 분단의 아픔을 여실히 대변하고 있다. 6·25가 발발하기 몇 년 전, 어느 날 밤 느닷없이 전북경찰악대장이 집에 찾아와서 '내일 낮 여순반란사건에 희생된 군경의 위령제를 지낼 예정인데 위령가가 준비되지 않았으니 작곡과 함께 여학교 합창단 동원도 부탁한다' 라고 하면서 가더란다.
두고 간 노래가사에 따라 밤을 꼬박 새워 작곡을 마친 선생은 숨 돌릴 틈도 없이 학생들을 연습시켜 행사장에서 '위령가'를 연주했더니 구슬픈 '위령가'에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려 온통 울음바다가 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고 한다.
그 후 이후부터 위령제 때마다 이 노래가 단골로 등장했다고 하는데 그 후유증도 만만치 않아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면 눈물이 난다고 한다. 사연은 전시 적치 하에서도 전주에 머물고 있다가 정치보위부에서 '위령가' 작곡을 반동행위로 몰아 여러 번 불려 다녔는데 간신히 고향으로 피신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한 이야기는 드라마틱하다.
'봄이 오면'
우리나라에 TV가 보급되기 전인 1956년경, 라디오 드라마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때 만든 곡이다. 드라마 주제는 기억에 아물거리지만 유명한 극작가 이서구 선생이 주제음악에 시를 붙인 이 곡의 노래말이 당시 작곡가에게 매우 커다란 감동을 준 바 있어 그 시에 곡을 붙여서 만들었다.
'임의 노래'
'봄이 오면'과 같은 시기에 작곡한 것인데 작곡 동기가 소월의 시에 매료된 데 있기도 하지만 당시 그 나이에 자신이 세상을 보는 눈이 밝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무렵, 다른 한편으로 노도처럼 밀려오는 인생의 공허함에 방황하다가 이를 달래보려는 마음에서 명시에 곡을 붙이게 되었다.
특히 노래말 서두와 중간부에 반복해서 불러지는 '그리운 님의 맑은 노래는 언제나 제 가슴에 들어있어요.' 부분은 이 노래에서 가장 감정을 잘 나타내야 할 핵심부여서 무척 고심하다가 우리스런 감성의 민속풍으로 클라이맥스를 장식했다.
'바 람'
일반적으로 가곡의 구성 요소로서 작곡자, 성악가, 반주자 등을 들고 있지만 실제로는 반주자의 비중을 같이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곡에서는 작곡가의 의도가 '반주자'를 '반주가'로 격상시켜 노래 반주의 보조자가 아닌 독립된 위치에서, 특히 전주와 중간부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표현력을 극대화시킨 흔적이 뚜렷하게 부각된 것이 특징이다.
또 이 작품에서 뿐 아니라 다른 곡에 있어서도 작곡가의 기본방향은 어떤 곡을 노래하고 반주하는데 있어서도 작곡가가 제시한 악보에 맞춰 한 치의 오차 없는 연주를 강요하기보다는 성악가나 반주가 나름대로의 음악세계를 존중하고 재능을 계발토록 하기 위해 Cadenza(독주부분)를 즐겨 쓰는 편이다.
'산 위에'
이 곡은 전주여중(6년제) 교사시절에 만든 곡이다. 당시 이 학교의 지동욱 교장의 애창곡이기도 하여 춘추로 열리는 교내 음악콩클 성악부분에 교장 선생이 매년 지정곡으로 선정, 이 학교 학생들의 애창곡이 된 노래이다.
'풍년가'
금수현 선생(금난새 관현악단 지휘자의 부친)이 문교부 편수관이던 시절에 초등학교 6학년 음악교과서에 실릴 기악합주곡 작곡을 요청하여 만든 곡이다. 그 후, 주위에서 이 곡의 멜로디와 리듬이 우리스러우니 가곡으로 하면 어떻겠느냐는 권고에 따라 개작했다.
그러나 당시는 무명 작곡가 시절이라 마땅한 노래말이 없어 서울사범(서울교대 전신) 동료 교사인 김원경 선생에게 부탁하니 흔쾌히 명시로서 옷을 입혀주어 탄생하게 된 곡이다.
이 노래가 유명하게 된 계기는 한참 뒤, MBC에서 해마다 가을맞이 '가곡제' 행사를 했는데 그 때마다 성악가 신영조 교수(한양대)로 하여금 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 이에 따라 다른 방송국에서도 가을이 되면 이 노래를 전파에 실어보내 풍년을 상징하거나 기원하는 곡으로 국민들의 마음에 심어지게 되었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봄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로 시작되는 소월의 시에 흠뻑 빠져 작곡을 하게 되었는데 노래 중간부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는 이 노래의 클라이맥스로서 성악가 정영자 교수(중앙대)가 노래를 부를 당시 '부모를 여의고 가슴에 복받치는 서러운 감정을 그대로 노래에 담았다'고 하여 더욱 유명해진 곡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눈물을 여러 차례 보인 적이 있어 작곡자와 보는 이로 하여금 진한 감동과 안쓰러움을 주게 한 곡이기도 하다.
'훈 풍'
이 노래는 노랫말의 구성이 특이하다. 1절은 작곡가가 시를 쓰고 2절은 당시 서울사범에 재학 중인 제자 '최귀옥'이 만들었는데 이 노래를 들은 작곡가 나운영 교수가 사석에서 작곡가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나다고 추켜세울 정도로 전력 투구한 작품이다.
'청사포 연가'
특이한 케이스로 만든 곡이다. 부산에 사는 작곡가 권오철 교수가 요청하여 작곡한 것인데 당시 부산시에서 부산 주변 명소를 알리는 행사의 일환으로 개최한 음악회에 등장한 곡이다. 명소마다 시인이 시를 쓰고 여기에 작곡가가 곡을 붙여 작품화한 것을 유망 성악가를 동원, 신작가곡발표회 형식을 빌려 발표한 곡 중에 하나이다.
이 행사는 1부에서 행진곡풍의 노래가, 2부에서는 Cadenza로 작곡되었다.
'피리를 불면'
조지훈의 시에 매료되어 1950년대에 작곡한 것인데 전주부를 화려하게 표현한 게 이 곡의 특징이다.
'Lion's song'
작곡가가 교직 외에 25년 동안 봉사활동을 한 세계 최대 조직인 'Lion's club'에 몸을 담고 있을 때 만든 곡이다. 한 때 이 조직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사무총장, 감사, 자문위원 등 요직을 거친 바 있는 데 작사는 당시 김병삼(전 총무처 장관) 총재가 했고 지금도 변함 없이 '봉사와 친목'을 모토로 활동하는 회원들의 애창곡이다.
2004년 5월, KBS는 한국의 원로 음악인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음악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기획물로 제작한 바 있는데 첫 번째 방송에서 그는, 일제 하와 해방 직후의 우리 음악계를 회고하면서 일정 치하 우리 노래를 부르지 못하게 한 그들의 음악교육정책에 대해서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고 외면했지만 해방 직후는 비록 음악교과서가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민요를 채보하고, 없는 동요를 즉석에서 작곡하여 가르치기도 한 정열과 희망이 넘치는 시기였다고 했다. 또한 오늘날의 가곡계는 전에 비해 창작환경은 많이 좋아졌으나 작곡을 하는데 있어 지나치게 예술성을 강조하고 기교에 치중하는 경향에 흐르다 보니 성악가가 아니면 도저히 따라 부르기 어렵게 음정이 높거나, 음역이 넓고 멜로디의 음폭 또한 변화가 심한 작품을 양산하고 있다고 일침을 가했다. 또 작곡환경이 이와 같이 바뀜으로서 우리 가곡이 날로 대중과 틈이 벌어져 지금은 교육현장에서마저 외면당하는 안타까운 처지에 놓여 있다는 지적에서는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 따라서 우리가곡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도록 멜로디를 단순화하는 한편, 아주 높은 음 사용을 자제하는 등의 자성과 노력이 절실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음악교육의 중요성에 대해 그리스의 '음·수·체'의 교육원칙(「음악을 통한 전인격 도야, 수학을 통한 과학적 사고, 체육을 통한 튼튼한 몸」)과 같이 우리도 입시 위주 교육의 틀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 인성 교육을 중시하는 교육으로의 전환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예술교육에 있어서도 지식의 학문적 가르침도 필요하지만 그 보다는 감동을 주어 가슴속의 것을 토해내게 하는 감성적 사고를 계발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국적 없는 가요가 음악계를 판치고 있고 가곡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마당에서 후배작곡가들은 가곡을 살리기 위해 '가슴을 따뜻하게 데울 수 있는 노래를 젊음을 불태우는 마음으로 작품을 만들어 주기를 바란다는 피끓는 말과 국민 1인 1 애창가곡갖기운동본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가곡살리기운동에 많은 성원이 있기를 부탁한다는 말을 강조하면서 끝을 맺었다.
- 박찬석과 그의 작곡집에 등장한 성악가들
심송학 교수
'바람'을 부른 심송학 교수는 음색이 아름답고 특징이 멜랑콜리해서 작곡가를 감동케 하는 성악가이다. 또 대학(경북대학교 예술대학) 안에 가곡연구회를 설치하는 등 우리 가곡에 대해 남다른 열정을 가진 분이다.
정영자 교수
'낙엽',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임의 노래' 등 작곡자의 여러 곡을 훌륭하게 소화해낸 성악가이다.
정영자 교수와의 인연은 작곡가가 서울 무학여고 교사 시절에 뛰어난 그의 성악적 재능을 발견하고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고교시절 잠자는 재능을 일깨우고 계발하여 대학교에 진학시키기까지 음악적 후견인으로서의 역할과 진학 후, 성악가로서 성공할 때까지 동고동락한 대표적 애제자와 스승 사이이다.
'작곡가가 성악가를 길렀다'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어불성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발성, 발음 등 기초적 소양에 관해서는 우선적으로 기성 성악가로부터 배워야 하지만 완벽한 성악가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감성을 계발하게 하고 폭 넓은 음악의 세계를 섭렵하게 하는 등 음악과 관련한 모든 것에 대해 1차 창작자인 작곡가나 재창작자인 지휘자, Pianist 등에게서 교육을 받는 것도 필수과정이다.
'낙엽',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임의 노래', '남촌' 등 노래를 불렀다.
신영조 교수
작곡가와 특별한 인연은 없었으나 화려한 미성과 다이내믹한 창법으로 작곡가의 작품을 가장 잘 표현해낼 수 있는 음색을 가진 성악가로 생각하여 특별히 연주를 부탁한 것이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되었다.
'풍년가', '피리를 불면', '봄이 오면', '위령가' 등의 노래를 불렀다.
최원범 성악가
대학 후배로서 음성에 박력이 있고 호소력이 있을 뿐 아니라 의젓하고 당당한 무대 매너에 이끌려서 '통천포 사랑', '청사포 연가'를 불러줄 것을 부탁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
박찬석 (朴贊錫)
생년월일 : 1922년 03월 23일
前 서울교대 음악교육과 교수 , 문화예술인, 음악인, 작곡가
최종학력 : 일본 특허대(特許大) 음학 박사
최근경력 : 한국음악협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