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너 엄정행-"성악 한평생… 과분한 은혜 감사"
‘어느덧 63년의 생을 살았다. 나는 여전히 노래를 사랑하고 과분한 은혜를 입으며 살아간다. 그 은혜로움 속에서 내가 지닌 것들을 더 많이 줄 수 없음이 안타깝고 속상했다. 그 마음이 바로 이 CD를 만든 원동력이 됐다.’
‘가곡의 전도사’ 엄정행 경희대 음대교수가 성악가(테너) 데뷔 40돌을 기념해 선물용으로 만든 CD 재킷에 쓴 글이다. 그는 ‘가고파’‘청산에 살리라’등 명곡과 ‘은사시나무의 가을’ 등 신곡 17개를 섞어 만든 CD 2000장 가량을 시판하지 않고 지인들에게만 증정할 계획이다.
5일밤 서울 충정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놀랄 만큼 젊어보였다. 붉은 빛이 감도는 체크무늬 셔츠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남자도 드물지 않을까.
“학교에서 젊은 제자들과 함께 호흡한 덕분이 아닐까 싶어요. 노래와 더불어, 젊은이들과 더불어 ….”
그의 또다른 건강 비결은 많이 웃는 데 있을 것이다. 그는 대가연하지 않은 채 서그럽게 자주 웃었지만, 엄격한 음률에 생애를 맞춰온 사람의 품격이 절로 느껴졌다.
그는 1965년 한 신문사의 신인음악회로 데뷔한 이후 185회의 독창회와 1000회가 넘는 음악회를 가졌다. 79년부터 10년간이나 MBC라디오의 아침 프로를 진행하며 가곡의 대중화에 앞장서 한때 국민들에게 ‘가곡=엄정행’이라는 인식을 깊게 심어주기도 했다.
국내 정상의 성악가로서 평생 웃고만 살았을 것 같은 그도 힘겨운 시절이 있었을까.
“고교 때까지 운동(배구)을 했기 때문에 음대 들어가서 따라가느라 무척 고생했지요. 음대 졸업하던 65년에 한 신문사의 신인음악회에 출전해 겨우 데뷔했지만, 앞날이 불투명했어요. 대학원 공부하면서 악기장사도 하고, 커피숍·양장점을 꾸리기도 했지요.”
그는 서울대 음대를 나온 아내 이미혜자(62)씨가 자기 공부는 포기하고 그의 뒷바라지에 전념해야 했던 것이 가슴 아팠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의 제가 없지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CD를 음반사에 맡기지 않고 두 달간 직접 만들었어요.”
그는 인쇄소에 뛰어다니며 손수 만들었다는 CD 재킷에 ‘고인이 되신 아버지와 아흔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한없는 애정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됐다’고 썼다. 28년간 교직에서 후학을 배출한 그도 아버지와 같은 심정이었을까.
“가곡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애정이 식은 듯해서 참 안타깝습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젊은 성악가들이 꽤 있습니다. 또 유명하지는 않아도 장래가 촉망되는 음악도가 많습니다. 그들이 우리 가곡을 열심히 불러 발전시킬 수 있도록 음악회에 자주 찾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문화일보/2005.9.6/장재선 기자
‘가곡의 전도사’ 엄정행 경희대 음대교수가 성악가(테너) 데뷔 40돌을 기념해 선물용으로 만든 CD 재킷에 쓴 글이다. 그는 ‘가고파’‘청산에 살리라’등 명곡과 ‘은사시나무의 가을’ 등 신곡 17개를 섞어 만든 CD 2000장 가량을 시판하지 않고 지인들에게만 증정할 계획이다.
5일밤 서울 충정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놀랄 만큼 젊어보였다. 붉은 빛이 감도는 체크무늬 셔츠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남자도 드물지 않을까.
“학교에서 젊은 제자들과 함께 호흡한 덕분이 아닐까 싶어요. 노래와 더불어, 젊은이들과 더불어 ….”
그의 또다른 건강 비결은 많이 웃는 데 있을 것이다. 그는 대가연하지 않은 채 서그럽게 자주 웃었지만, 엄격한 음률에 생애를 맞춰온 사람의 품격이 절로 느껴졌다.
그는 1965년 한 신문사의 신인음악회로 데뷔한 이후 185회의 독창회와 1000회가 넘는 음악회를 가졌다. 79년부터 10년간이나 MBC라디오의 아침 프로를 진행하며 가곡의 대중화에 앞장서 한때 국민들에게 ‘가곡=엄정행’이라는 인식을 깊게 심어주기도 했다.
국내 정상의 성악가로서 평생 웃고만 살았을 것 같은 그도 힘겨운 시절이 있었을까.
“고교 때까지 운동(배구)을 했기 때문에 음대 들어가서 따라가느라 무척 고생했지요. 음대 졸업하던 65년에 한 신문사의 신인음악회에 출전해 겨우 데뷔했지만, 앞날이 불투명했어요. 대학원 공부하면서 악기장사도 하고, 커피숍·양장점을 꾸리기도 했지요.”
그는 서울대 음대를 나온 아내 이미혜자(62)씨가 자기 공부는 포기하고 그의 뒷바라지에 전념해야 했던 것이 가슴 아팠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의 제가 없지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CD를 음반사에 맡기지 않고 두 달간 직접 만들었어요.”
그는 인쇄소에 뛰어다니며 손수 만들었다는 CD 재킷에 ‘고인이 되신 아버지와 아흔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한없는 애정을 비로소 알 수 있게 됐다’고 썼다. 28년간 교직에서 후학을 배출한 그도 아버지와 같은 심정이었을까.
“가곡에 대한 우리 국민들의 애정이 식은 듯해서 참 안타깝습니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젊은 성악가들이 꽤 있습니다. 또 유명하지는 않아도 장래가 촉망되는 음악도가 많습니다. 그들이 우리 가곡을 열심히 불러 발전시킬 수 있도록 음악회에 자주 찾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문화일보/2005.9.6/장재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