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자료실 > 가곡이야기
가곡이야기

이흥렬의 '바우고개'

운영자 4 5313
‘바우고개 언덕을 혼자 넘자니’로 시작되는 가곡 <바위고개>는 그가 25세 때 만든 작품으로 일제의 탄압 속에서 신음하던 조국 산천을 바위고개로, 무궁화꽃을 진달래로 비유한 민족의 울분을 아련한 모정에 담아 서정적으로 표현했으며 가사에서 풍기는 그리움이 눈물겹도록 애절하다.

1909년 7월 17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한 이흥렬은 세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두 분의 누이도 일찍 죽어 형님과 함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의 손에 의해 자라게 되었다. 이흥렬의 술회에 의하면 자신이 음악을 하게 된 이유 중에는 첫째, 고향 원산의 자연 풍광이 아름다워 ‘한국의 나폴리’라 불렸는가 하면 항구에는 세계 각국의 군함들이 들어와 해군군악대들이 시가 행진을 하며 멋진 군악을 연주, 자연스럽게 음악에 빠져 들 수 있었고, 둘째는 깊은 신앙심을 가진 어머니 밑에서 종교적 가정 교육을 받아 교회의 종소리와 선교사가 연주하는 오르간 소리가 음악의 씨를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경 유학길에 오르기 위해 푼푼이 돈을 모으며 피아노에 매달렸던 그는, 피아노에 정열을 쏟는 정성이 갸륵했던지 고향의 어머니가 매달 30원씩을 부쳐주어 겨우 돈걱정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피아노가 없던 그는 졸업 연주에서는 기필코 A급이 모여있는 3부에 나가기 위해 피아노를 반드시 사야 했고, 결국 어머니에게서 피아노값 400원을 송금받아 야마하 100호 피아노를 구입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흥렬은 졸업연주회에서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고 동경생활을 마감했다.

1931년 동경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귀국한 그는 독일 유학을 생각했지만 홀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피아노를 가지고 고향으로 귀향했다. 이때부터 1957년까지 원산 광명학교, 경성보육학교, 배재중학교, 풍문여자중·고등학교 등지에서 보통학교 교사생활을 하면서 동요작곡을 시작했다. 작곡가 자신이 노랫말까지 쓴 이 <바위고개>는 우리 나라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장도로 유명한 노래이다.
<바우고개>는 작곡된지 20년 뒤인 6.25때 부산에서 김혜란씨가 무대에서 불러 다시 널리 애창되었다.
전란속의 피난민들의 가슴을 울리고 달래는 깊은 힘을 가진 이 가곡은 오랜 세월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길러져 왔던것 같다. 바위고개로 인하여 그에게는 '바우고개 할아버지'라는 별명마저 붙었다.

(1909.7 ~1980.11)

글 : 내마음의노래
참고문헌 : 한국의 명가곡을 찾아서(지철민 저, 무궁화사, 1973),
              대한민국예술원사이트

(무단전재금지)
4 Comments
이선숙 2006.09.05 21:49  
  너무 좋아요...
감사합니다.
김성춘 2006.11.22 06:26  
  이 곡을 부르게 되면 어김없이 찾아드는 상념들이있었는데  작가의 감성이조금이나마 들려오는듯합니다.
허허실실 2007.10.18 21:30  
바우고개를 작곡하신 이흥렬선생님의 생애가 매우 평탄치 못하셨군요. 예술가의 일생이 대부분 파란만장한 분들이 많으신데 선생님께서도 많이 고생을 하신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지은신 주옥 같은 곡들을 조용히 감상해 보렵니다.
이수현 2007.10.24 01:35  
어이쿠. 이런 자료들은 어떻게들 찾으셨는지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