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음악에 바친 일생
박인수 / 백석대 석좌교수, 음악대학원장
해마다 이맘때 쯤이면 고향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으로 고향의 정경을 그리고 있는 가곡 ‘향수’ 가 더욱 생각난다.
‘넓은 밭 동쪽 끝으로/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
이 시는 정지용의 초기 작품의 하나로서, 고향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을 주정적(主情的)으로 노래했다.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공간은 당시의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농촌이며, 누구에게나 강력한 정서적 호소력을 지니고 있는 고향의 정경이다.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또한 대다수의 한국인에게 보편적인 모습이다.
나는 이 노래로 봄을 맞이하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생각하며, 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때의 추억을 더듬게 된다.
또 봄이 오면 나는 아버지가 즐겨 부르시던 ‘봉선화’ ‘돌아오라 소렌토로’ ‘산타루치아’ ‘여수’ 같은 클래식 곡과 ‘황성옛터’ ‘고향설’ ‘남쪽나라 내 고향’ 등 유행가를 자주 들으며 자랐다. 그때 모든 장르의 노래들이 너무 좋아 혼자서 즐겨 부르던 기억이 난다.
인간의 감성을 만족시키는 것 가운데 음악은 창조적이고 참다운 정서적 가치를 느끼게 해준다. 대중음악과 클래식이 조금은 차이가 있겠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심오한 생각에 빠져들게 하거나 심성을 깊게 만족시키는 것은 아마 클래식 음악 쪽이 우위일 것이다. 지금 내가 감성이라든가 심성을 운운하는 것은 다름 아닌 봄이라는 계절 때문이다.
내게 있어 봄은 너무 많은 추억들이 있어 일일이 열거하기가 쉽지 않다.
봄! 봄!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라는 측면에서 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어디론가 돌아다니고 싶고, 까닭 없이 신이 나서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특히 봄이 오면 몸에서 계절을 읽기라도 하듯 ‘목련화’ 라는 노래가 떠오르고 자연히 나도 모르게 한 곡조 부르게 된다.
‘오, 내 사랑 목련화야/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희고 순결한 그대 모습/봄에 온 가인과 같고/추운 겨울 헤치고 온/봄길잡이 목련화는… .’
그렇다. 봄이 오면 이 노래는 말 그대로 목련화를 떠올려도 좋고, 가슴 속에 그린 누군가를 생각해도 좋은 곡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계절 봄을 맞이하며 봄의 향연으로 우리 노래와 어울려 가슴속에 또 한 송이 목련화를 키워 보는 것도 추억의 한 장으로 새겨지리라.
내가 처음으로 접한 곡은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이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당시 내 또래의 친구들은 그런 음악에 별로 흥미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이 아름다운 음악에 매료돼 이상야릇한 설렘으로 여러번 듣고 또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시절은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시대였다. 마침 친한 친구 집에 녹음기가 있어 음악을 들으려고 조르다시피 해서 찾아가 ‘텐 테너 아리아(Ten Tenor Aria)’ 를 비롯한 여러 성악곡을 접했던 것이 내 음악의 기초가 되고 내가 음악을 사랑하게 된 모티브가 됐던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음악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작 음악 전공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수영·럭비 선수였고, 기계체조·역도 등 거의 모든 운동에 소질이 많았으며 친구들도 운동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어서 체육에 관심을 더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에 나오는 마도로스가 너무 좋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군대를 다녀온 후 곧 부산으로 내려가 배를 타기로 마음을 다졌던 것이다. 바다를 좋아하기도 했고 감수성이 예민한 그 시기에 현실적인 것보다는 다분히 낭만적인 심리가 더 많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성악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게 된 사건이 생겼다. 고등학교 3학년의 마지막 계절인 11월 중순쯤 내가 다니던 미아리 감리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다. 그날 우연히 특별찬송을 부르게 됐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었다. 당시 배재중고교 교목으로 계시던 김창일 목사님께서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하셨는데 ‘네가 성악의 길을 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 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때 슬그머니 마음이 음악 쪽으로 돌아서는 것을 느꼈고, 그동안 나의 내면에서 갈구하고 있던 진정한 바람이 음악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요사이 나의 가장 큰 소원이라면 ‘단 한번만이라도 소리에 마음이 담긴 진정한 목소리로 노래해 보고 싶다’ 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이 봄에 가슴을 열고 흔쾌하게 ‘새타령’ 을 부르며,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도 듣고, 풍경이 좋은 찻집에 앉아 지난날을 음미하면서 봄 날씨 감상도 해보고 싶다.
나의 인생에서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음악을 나의 일로 삼아 살아가게 된 것에 그저 감사하는 마음이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주어진 일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런 한편 자신이 무언가 창조적 도약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 일을 위해 나름대로 계획도 세우고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것이 진정 삶을 윤택하게 하는 일이라면 우리도 이 봄에 그런 계획을 한 가지쯤 세워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끝으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성악가라고 부르는 것보다 그냥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하거나 가수라고 불러주는 것을 나는 더 좋아한다는 속내를 밝혀 둔다.
[문화일보]2006-04-22
해마다 이맘때 쯤이면 고향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으로 고향의 정경을 그리고 있는 가곡 ‘향수’ 가 더욱 생각난다.
‘넓은 밭 동쪽 끝으로/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 .’
이 시는 정지용의 초기 작품의 하나로서, 고향에 대한 회상과 그리움을 주정적(主情的)으로 노래했다.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공간은 당시의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농촌이며, 누구에게나 강력한 정서적 호소력을 지니고 있는 고향의 정경이다.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또한 대다수의 한국인에게 보편적인 모습이다.
나는 이 노래로 봄을 맞이하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생각하며, 나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때의 추억을 더듬게 된다.
또 봄이 오면 나는 아버지가 즐겨 부르시던 ‘봉선화’ ‘돌아오라 소렌토로’ ‘산타루치아’ ‘여수’ 같은 클래식 곡과 ‘황성옛터’ ‘고향설’ ‘남쪽나라 내 고향’ 등 유행가를 자주 들으며 자랐다. 그때 모든 장르의 노래들이 너무 좋아 혼자서 즐겨 부르던 기억이 난다.
인간의 감성을 만족시키는 것 가운데 음악은 창조적이고 참다운 정서적 가치를 느끼게 해준다. 대중음악과 클래식이 조금은 차이가 있겠지만, 사람으로 하여금 심오한 생각에 빠져들게 하거나 심성을 깊게 만족시키는 것은 아마 클래식 음악 쪽이 우위일 것이다. 지금 내가 감성이라든가 심성을 운운하는 것은 다름 아닌 봄이라는 계절 때문이다.
내게 있어 봄은 너무 많은 추억들이 있어 일일이 열거하기가 쉽지 않다.
봄! 봄!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라는 측면에서 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어디론가 돌아다니고 싶고, 까닭 없이 신이 나서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한다. 특히 봄이 오면 몸에서 계절을 읽기라도 하듯 ‘목련화’ 라는 노래가 떠오르고 자연히 나도 모르게 한 곡조 부르게 된다.
‘오, 내 사랑 목련화야/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희고 순결한 그대 모습/봄에 온 가인과 같고/추운 겨울 헤치고 온/봄길잡이 목련화는… .’
그렇다. 봄이 오면 이 노래는 말 그대로 목련화를 떠올려도 좋고, 가슴 속에 그린 누군가를 생각해도 좋은 곡이다. 이처럼 아름다운 계절 봄을 맞이하며 봄의 향연으로 우리 노래와 어울려 가슴속에 또 한 송이 목련화를 키워 보는 것도 추억의 한 장으로 새겨지리라.
내가 처음으로 접한 곡은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 이다.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당시 내 또래의 친구들은 그런 음악에 별로 흥미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이 아름다운 음악에 매료돼 이상야릇한 설렘으로 여러번 듣고 또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시절은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시대였다. 마침 친한 친구 집에 녹음기가 있어 음악을 들으려고 조르다시피 해서 찾아가 ‘텐 테너 아리아(Ten Tenor Aria)’ 를 비롯한 여러 성악곡을 접했던 것이 내 음악의 기초가 되고 내가 음악을 사랑하게 된 모티브가 됐던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음악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작 음악 전공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 당시 나는 수영·럭비 선수였고, 기계체조·역도 등 거의 모든 운동에 소질이 많았으며 친구들도 운동하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어서 체육에 관심을 더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에 나오는 마도로스가 너무 좋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군대를 다녀온 후 곧 부산으로 내려가 배를 타기로 마음을 다졌던 것이다. 바다를 좋아하기도 했고 감수성이 예민한 그 시기에 현실적인 것보다는 다분히 낭만적인 심리가 더 많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성악가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게 된 사건이 생겼다. 고등학교 3학년의 마지막 계절인 11월 중순쯤 내가 다니던 미아리 감리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다. 그날 우연히 특별찬송을 부르게 됐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었다. 당시 배재중고교 교목으로 계시던 김창일 목사님께서 내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하셨는데 ‘네가 성악의 길을 택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 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때 슬그머니 마음이 음악 쪽으로 돌아서는 것을 느꼈고, 그동안 나의 내면에서 갈구하고 있던 진정한 바람이 음악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요사이 나의 가장 큰 소원이라면 ‘단 한번만이라도 소리에 마음이 담긴 진정한 목소리로 노래해 보고 싶다’ 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이 봄에 가슴을 열고 흔쾌하게 ‘새타령’ 을 부르며,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도 듣고, 풍경이 좋은 찻집에 앉아 지난날을 음미하면서 봄 날씨 감상도 해보고 싶다.
나의 인생에서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음악을 나의 일로 삼아 살아가게 된 것에 그저 감사하는 마음이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주어진 일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런 한편 자신이 무언가 창조적 도약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 일을 위해 나름대로 계획도 세우고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것이 진정 삶을 윤택하게 하는 일이라면 우리도 이 봄에 그런 계획을 한 가지쯤 세워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끝으로, 다른 사람들이 나를 성악가라고 부르는 것보다 그냥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하거나 가수라고 불러주는 것을 나는 더 좋아한다는 속내를 밝혀 둔다.
[문화일보]2006-04-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