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에 얽힌 사연들(명사들의 인생회고/격변기의 문화수첩)
노래에 얽힌 사연들(명사들의 인생회고/격변기의 문화수첩:37)[국민일보] 1990-07-06
◎「방송가요 작가그룹」 1년뒤 흐지부지 소멸/각종 가곡ㆍ동요집에 작품제공/‘들국화’는 영화주제가로 사용되기도「방송가요작가그룹」은 음악을 담당하고 있던 김광수씨 그리고 방송관계로 자주 방송국에 들르던 손석우씨와 나 등 두 세사람이 만날 때마다 그 필요성에 일치를 보아 설립하게 됐다.
작사분과위원회에는 김예경 박송 이호로 석용원 박경종 나,작곡분과위원회에는 손석우 황문평 박춘석 최창권 김광수 이희목 나화랑 김호길 이봉조씨 등이 참여했다.
후에 윤용하 김희조 김동진 김대현씨 등이 참여하였고 초대회장에는 손석우씨를 추대하였다.
그 첫 사업으로 새로운 방송가요 10편을 만들어 방송도 하고 레코드도 만들 작정이었다.
그때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이호로씨의 「창밖엔 눈이」는 이봉조씨가 작곡,박경종씨의 「근로자의 노래」는 이희목씨,박송씨의 「고향」은 김호길씨,석용원씨의 「여심」은 이희목,김예경씨의 「그리운 마음」은 박춘석씨,「기다림」은 나화랑씨,「영원토록」은 황문평씨,나의 「코스모스 곁에서」는 황문평씨,「수은등이 켜진 길」은 김광수씨,「간이역에서」는 최창권씨 등이 작곡하였다.
이렇듯 희망이 넘쳐 흐르는 출발을 하였으나 많은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한달에 한번씩 모여 작품평을 하고 앞으로의 대책 등을 건의하곤 하였다.
결국 1년이 지나 김희조씨가 제2대 회장을 맡은 후부터는 쇠퇴하여 결국 그룹 자체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바로 그 무렵 「한국음악저작권협회」가 결성되었다. 1964년 6월9일의 일이다.
남대문 근처의 어느 한식음식점 2층의 넓은 홀에서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순수분야 사람들도 많이 참여하였다.
동요부문만 해도 윤석중 목일신 노효선 박홍근 박경종 박송 박화목 나 등의 작사가들과 정세문 윤극영 이용석 권길상 이은열 김숙경 등 작곡가들이 참여했다.
초대회장 손목인씨에 금수현 조춘영 라음파 길옥윤 신상호씨가 회장직을 맡아오고 있다.
매달 회보도 발행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사용료를 엄격히 징수해서 회원들에게 지불,음악저작권 보호에 만전을 기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나도 한때는 평의원으로 그 운영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음악관계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때 음악인들의 활동도 활발하였다. 일찍이 1962년에 정세문씨가 가곡집을 출판하였는데 내 작품도 「고향」「떠나는 마음」「별」 등 3편이나 수록되어 있다.
65년 9월에는 이흥렬 가곡집 「너를 위하여」가 간행되었는데 거기에도 필자의 작품 「조춘」이 수록되어 있다.
같은 해에 한용희씨가 한용희 동요 101곡집 「다같이 노래를」을 세광출판사에서 발행하였다. 나의 동요도 「고드름」「꽃피는 그날까지」「가을길 좋은 길」「냇가에서」「매미」「졸업축하의 노래」 등 여러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보다 앞서 대한유치원 교육협회에서 60년 4월과 62년 11월 두 차례에 걸쳐 「유치원 노래교본」을 간행하였다.
참으로 뜻깊은 출판이어서 동료들뿐 아니라 아동문학가는 거의 참여하였다. 나도 제1집에 「병아리와 아기오리」「고양이와 금붕어」「인새」를,제2집에 「헬리콥터」「아,재미있어요」 등 수편을 제공하였다.
국민학생이나 중ㆍ고등학생을 위한 동요는 비교적 많았지만 유치원 어린이들을 위한 동요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이러한 출판이 어린이들에게 큰 역할을 했으리라 믿는다.
60년 12월에는 김공선편으로 「방송노래모음」이 발간되었다. 나의 동요도 「겨울밤」「눈사람」 등 2편이 수록되었다.
김대현씨는 77년 7월에 「김대현작곡 가곡집」,같은해 9월에는 김대현작곡집 「들국화」를 냈다. 특히 「들국화」라는 나의 작품이름을 가곡집 제목으로 삼아줘서 더욱 기뻤다.
거기에는 「둘국화」외에도 「훈풍의 노래」「봄맞이 노래」「흰구름 가는 곳」 등 무려 4편이 수록되어 있었다.
출판기념회를 하는 날 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늘은 꼭 장선생의 잔칫날 같군요』라는 말을 수 없이 들었을 정도였다. 정말 기쁘기 한량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82년 9월에 동요작곡집 「자전거」를 간행했는데 나의 동요 「눈오는 밤에」「푸른 하늘」 등 2편이 수록됐다.
그런데 하루는 김대현씨가 방송국으로 찾아와 뜻밖의 소식를 알려주었다.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영화의 주제가로 「들국화」를 쓰고 싶은데 승낙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기꺼이 승낙하였는데 작품 사용료까지 받았다. 그 영화는 유재원감독에 김석훈 박암 주선태 복혜숙씨 등이 출연해 퍽 호평을 받았다고 들었다.
방송국의 주제가는 많이 썼지만 나의 가사가 영화주제가로 사용되기는 이것이 처음이어서 매우 기뻤다. 그 영화를 못본 것이 유감이다.
그 김대현씨는 나에게 말한마디 없이 먼저 가버리고 말았다. 이흥렬 윤용하씨도 다 가버리고 말았다.<장수철 시인ㆍ아동문학가>
◎「방송가요 작가그룹」 1년뒤 흐지부지 소멸/각종 가곡ㆍ동요집에 작품제공/‘들국화’는 영화주제가로 사용되기도「방송가요작가그룹」은 음악을 담당하고 있던 김광수씨 그리고 방송관계로 자주 방송국에 들르던 손석우씨와 나 등 두 세사람이 만날 때마다 그 필요성에 일치를 보아 설립하게 됐다.
작사분과위원회에는 김예경 박송 이호로 석용원 박경종 나,작곡분과위원회에는 손석우 황문평 박춘석 최창권 김광수 이희목 나화랑 김호길 이봉조씨 등이 참여했다.
후에 윤용하 김희조 김동진 김대현씨 등이 참여하였고 초대회장에는 손석우씨를 추대하였다.
그 첫 사업으로 새로운 방송가요 10편을 만들어 방송도 하고 레코드도 만들 작정이었다.
그때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이호로씨의 「창밖엔 눈이」는 이봉조씨가 작곡,박경종씨의 「근로자의 노래」는 이희목씨,박송씨의 「고향」은 김호길씨,석용원씨의 「여심」은 이희목,김예경씨의 「그리운 마음」은 박춘석씨,「기다림」은 나화랑씨,「영원토록」은 황문평씨,나의 「코스모스 곁에서」는 황문평씨,「수은등이 켜진 길」은 김광수씨,「간이역에서」는 최창권씨 등이 작곡하였다.
이렇듯 희망이 넘쳐 흐르는 출발을 하였으나 많은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한달에 한번씩 모여 작품평을 하고 앞으로의 대책 등을 건의하곤 하였다.
결국 1년이 지나 김희조씨가 제2대 회장을 맡은 후부터는 쇠퇴하여 결국 그룹 자체가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바로 그 무렵 「한국음악저작권협회」가 결성되었다. 1964년 6월9일의 일이다.
남대문 근처의 어느 한식음식점 2층의 넓은 홀에서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순수분야 사람들도 많이 참여하였다.
동요부문만 해도 윤석중 목일신 노효선 박홍근 박경종 박송 박화목 나 등의 작사가들과 정세문 윤극영 이용석 권길상 이은열 김숙경 등 작곡가들이 참여했다.
초대회장 손목인씨에 금수현 조춘영 라음파 길옥윤 신상호씨가 회장직을 맡아오고 있다.
매달 회보도 발행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사용료를 엄격히 징수해서 회원들에게 지불,음악저작권 보호에 만전을 기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나도 한때는 평의원으로 그 운영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음악관계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때 음악인들의 활동도 활발하였다. 일찍이 1962년에 정세문씨가 가곡집을 출판하였는데 내 작품도 「고향」「떠나는 마음」「별」 등 3편이나 수록되어 있다.
65년 9월에는 이흥렬 가곡집 「너를 위하여」가 간행되었는데 거기에도 필자의 작품 「조춘」이 수록되어 있다.
같은 해에 한용희씨가 한용희 동요 101곡집 「다같이 노래를」을 세광출판사에서 발행하였다. 나의 동요도 「고드름」「꽃피는 그날까지」「가을길 좋은 길」「냇가에서」「매미」「졸업축하의 노래」 등 여러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보다 앞서 대한유치원 교육협회에서 60년 4월과 62년 11월 두 차례에 걸쳐 「유치원 노래교본」을 간행하였다.
참으로 뜻깊은 출판이어서 동료들뿐 아니라 아동문학가는 거의 참여하였다. 나도 제1집에 「병아리와 아기오리」「고양이와 금붕어」「인새」를,제2집에 「헬리콥터」「아,재미있어요」 등 수편을 제공하였다.
국민학생이나 중ㆍ고등학생을 위한 동요는 비교적 많았지만 유치원 어린이들을 위한 동요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이러한 출판이 어린이들에게 큰 역할을 했으리라 믿는다.
60년 12월에는 김공선편으로 「방송노래모음」이 발간되었다. 나의 동요도 「겨울밤」「눈사람」 등 2편이 수록되었다.
김대현씨는 77년 7월에 「김대현작곡 가곡집」,같은해 9월에는 김대현작곡집 「들국화」를 냈다. 특히 「들국화」라는 나의 작품이름을 가곡집 제목으로 삼아줘서 더욱 기뻤다.
거기에는 「둘국화」외에도 「훈풍의 노래」「봄맞이 노래」「흰구름 가는 곳」 등 무려 4편이 수록되어 있었다.
출판기념회를 하는 날 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늘은 꼭 장선생의 잔칫날 같군요』라는 말을 수 없이 들었을 정도였다. 정말 기쁘기 한량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82년 9월에 동요작곡집 「자전거」를 간행했는데 나의 동요 「눈오는 밤에」「푸른 하늘」 등 2편이 수록됐다.
그런데 하루는 김대현씨가 방송국으로 찾아와 뜻밖의 소식를 알려주었다. 「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영화의 주제가로 「들국화」를 쓰고 싶은데 승낙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기꺼이 승낙하였는데 작품 사용료까지 받았다. 그 영화는 유재원감독에 김석훈 박암 주선태 복혜숙씨 등이 출연해 퍽 호평을 받았다고 들었다.
방송국의 주제가는 많이 썼지만 나의 가사가 영화주제가로 사용되기는 이것이 처음이어서 매우 기뻤다. 그 영화를 못본 것이 유감이다.
그 김대현씨는 나에게 말한마디 없이 먼저 가버리고 말았다. 이흥렬 윤용하씨도 다 가버리고 말았다.<장수철 시인ㆍ아동문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