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오 시,나운영 곡 <달밤>
등불을 끄고 자려하니 휘영청 창문이 밝으오
문을 열고 내어다 보니 달은 어여쁜 선녀와 같이
내 뜰 위에 찾아온다 달아 달아 내 사랑아
내 그대와 함께 이 한밤을 이 한밤을 얘기하고 싶구나
이태백의 술잔에 뜬 달은 누에가 실을 풀어 내듯 읊어 냈고, 윤선도의 '머리위에서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비추는' 달은 절개 굳은 벗이었다. 시인 김태오에게 달은 소리 없이 창 밖에 다가와 하얀 드레스 자락을 날리는 선녀였다. 그는 시인의 감성으로 흠모의 정을 읊었던 것이다.
김태오 시인과 선녀의 운명적 만남은 1938년 어느 가을날 밤, 서울 동작구 흑석동 김씨의 자택에서 이루어진다. 근처 일본인들의 요릿집에서 들리던 기생들의 노래 소리도 끊긴 적막한 밤, 문득 책이 하얗게 밝아지는 느낌이 들어 무심히 창 밖을 보았고 창을 열었다. 창 밖은 선녀들이 하얀 드레스자락을 펴서 깔아놓은 듯 눈이 부셨고 그는 밖으로 나가 뜨락을 거닐며 떠오르는 시상을 적어 내려갔다. <달밤>은 1939년에 출판된 첫 시집 "초원"에 실린 67편중 하나이다.
김태오의 시는 낭만적이며 목가적이고 서정적이다. 그는남다른 감성으로 고향의 풍경을 토속적으로 아름답게 읊었다. 정인섭 시인은 김태오의 시를 두고 "지성적 상징주의"라고 평했다.
김태오는 1932년에 임영신 박사와 함께 중앙보육학교를 인수,운영하면서 심리학,교육학,문학을 강의했다. 1945년 보육학교가 중앙여자전문학교로 바뀌면서 그는 부학장을 맡았고 1948년에 중앙대학으로 승격하면서 김태오는 남녀공학으로 할 것을 주장해 현재의 중앙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이후 중앙대의 부총장 겸 대학원장직을 맡고 나운영 역시 음대에서 작곡을 강의했다. 중앙대학교 교가도 나씨와 김씨의 합작품이다.
작곡가 나운영씨는 1922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일본 제국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이화여대에서 교직생활을 했다. 그의 부친은 도쿄 제국대학 농학부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인텔리였고 집안도 부유했다. 그는 음악을 좋아하고 특히 국악을 좋아해 동호인들을 모아서 연주를 하곤 했다. 그는 나운영씨가 6세때 양금을 가르쳤으며 서양의 고전음악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나씨의 최초의 음악선생이었던 부친은 얼마 후 세상을 떠났고 나씨는 이때부터 베토벤 등 서양 음악을 즐겨들었다. 그의 풍부한 음악적 감성은 보통학교 3년때부터 각종 청음대회에서 1등을 석권했고 5학년때에 작곡 연습을 시작했다. 중앙고보 1학년때에 김형준에게 음악을 배우던 나씨는 고교시절에 <아!가을인가>를 작곡해서 주위의 칭찬을 들었고 홀어머니는 그의 음악공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도쿄제국음악학교에 입학시켰다. 유학시절 한국인 교회에서 반주를 맡고 있던 중 독창자인 유경손씨를 만났으며 두 사람은 작곡가와 성악가의 신분으로 1945년에 결혼했다
<달밤>은 1946년 8월, 그의 나이 24세때 작품으로써 가곡집이나 중교교 음악교과서를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성악가들의 연주레파토리에도 자주 등장하는 한국 대표가곡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신혼초에 작곡되었기 때문에 나씨의 측근사람들은 이 곡이 부인 유씨를 위해 선물로 작곡된 것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노랫말은 나씨가 근무하던 중앙여대의 부학장으로 있던 김태오씨가 나씨에게 건넨 시집 한 권 속에 들어있었으며 나씨는 여기에서 달밤을 발견하고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내 그대와 함께 이 한밤을 이 한밤을 얘기하고 싶구나’라는 대목이 흡사 그들 부부의 생활상을 노래하고 있는것 같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시를 읽던 나씨는 절로 희미한 가락을 만들어 가고 있었고 얼마 뒤 가곡 <달밤>이 탄생한 것이다.
당시 한국가곡의 흐름은 서정적인 대중성과 예술가곡의 중간형태가 많았지만 나씨는 <달밤>에서 당시의 이런 경향을 깨고 예술성을 강하게 내세웠다. 나씨는 사람들이 <달밤>을 좋아하는 이유를 가락이 기악적이고 오페라 아리아와 같이 길게 뽑아내는 멋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나씨는 당시 흑석동 사택에서 살았는데 밤이면 곧잘 부부가 함께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듯 달밤을 노래했다고 한다. <달밤>은 1949년 서울음대 주최 학생음악 콩쿠르의 지정곡으로 채택되었는데 당시 학생이던 소프라노 황영금씨가 이 곡을 불러서 1등을 차지했다. 나운영씨는 <달밤>을 본인의 출세작이라고 했다. 그보다 먼저 <가려나>,<아! 가을인가>를 작곡했었지만 그를 작곡가의 반석에 올린것은 <달밤>이라고 한다.
종교계에 몸담고 있던 나씨는 예술가곡이외에도 시편 46편<피난처 있으니>,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등 많은 찬송가를 작곡했으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는 찬송가이지만 이미 가곡처럼 대중화되어 널리 알려졌다.
그의 대표적 가곡은 <달밤>,<접동새>,<강 건너간 노래>,<별과 새에게>,<산> 등이 있는데 그의 작품은 항상 부인 유씨가 초연을 맡았다.
글 : 내마음의 노래
참고문헌 : 한국의 명가곡을 찾아서(지철민 저, 무궁화사, 1973)
가곡의 고향(이향숙 저, 한국문원, 1998)
(무단전재를 금지합니다.)
문을 열고 내어다 보니 달은 어여쁜 선녀와 같이
내 뜰 위에 찾아온다 달아 달아 내 사랑아
내 그대와 함께 이 한밤을 이 한밤을 얘기하고 싶구나
이태백의 술잔에 뜬 달은 누에가 실을 풀어 내듯 읊어 냈고, 윤선도의 '머리위에서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비추는' 달은 절개 굳은 벗이었다. 시인 김태오에게 달은 소리 없이 창 밖에 다가와 하얀 드레스 자락을 날리는 선녀였다. 그는 시인의 감성으로 흠모의 정을 읊었던 것이다.
김태오 시인과 선녀의 운명적 만남은 1938년 어느 가을날 밤, 서울 동작구 흑석동 김씨의 자택에서 이루어진다. 근처 일본인들의 요릿집에서 들리던 기생들의 노래 소리도 끊긴 적막한 밤, 문득 책이 하얗게 밝아지는 느낌이 들어 무심히 창 밖을 보았고 창을 열었다. 창 밖은 선녀들이 하얀 드레스자락을 펴서 깔아놓은 듯 눈이 부셨고 그는 밖으로 나가 뜨락을 거닐며 떠오르는 시상을 적어 내려갔다. <달밤>은 1939년에 출판된 첫 시집 "초원"에 실린 67편중 하나이다.
김태오의 시는 낭만적이며 목가적이고 서정적이다. 그는남다른 감성으로 고향의 풍경을 토속적으로 아름답게 읊었다. 정인섭 시인은 김태오의 시를 두고 "지성적 상징주의"라고 평했다.
김태오는 1932년에 임영신 박사와 함께 중앙보육학교를 인수,운영하면서 심리학,교육학,문학을 강의했다. 1945년 보육학교가 중앙여자전문학교로 바뀌면서 그는 부학장을 맡았고 1948년에 중앙대학으로 승격하면서 김태오는 남녀공학으로 할 것을 주장해 현재의 중앙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이후 중앙대의 부총장 겸 대학원장직을 맡고 나운영 역시 음대에서 작곡을 강의했다. 중앙대학교 교가도 나씨와 김씨의 합작품이다.
작곡가 나운영씨는 1922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일본 제국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이화여대에서 교직생활을 했다. 그의 부친은 도쿄 제국대학 농학부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인텔리였고 집안도 부유했다. 그는 음악을 좋아하고 특히 국악을 좋아해 동호인들을 모아서 연주를 하곤 했다. 그는 나운영씨가 6세때 양금을 가르쳤으며 서양의 고전음악을 들려주었다. 그러나 나씨의 최초의 음악선생이었던 부친은 얼마 후 세상을 떠났고 나씨는 이때부터 베토벤 등 서양 음악을 즐겨들었다. 그의 풍부한 음악적 감성은 보통학교 3년때부터 각종 청음대회에서 1등을 석권했고 5학년때에 작곡 연습을 시작했다. 중앙고보 1학년때에 김형준에게 음악을 배우던 나씨는 고교시절에 <아!가을인가>를 작곡해서 주위의 칭찬을 들었고 홀어머니는 그의 음악공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해 도쿄제국음악학교에 입학시켰다. 유학시절 한국인 교회에서 반주를 맡고 있던 중 독창자인 유경손씨를 만났으며 두 사람은 작곡가와 성악가의 신분으로 1945년에 결혼했다
<달밤>은 1946년 8월, 그의 나이 24세때 작품으로써 가곡집이나 중교교 음악교과서를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성악가들의 연주레파토리에도 자주 등장하는 한국 대표가곡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신혼초에 작곡되었기 때문에 나씨의 측근사람들은 이 곡이 부인 유씨를 위해 선물로 작곡된 것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노랫말은 나씨가 근무하던 중앙여대의 부학장으로 있던 김태오씨가 나씨에게 건넨 시집 한 권 속에 들어있었으며 나씨는 여기에서 달밤을 발견하고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내 그대와 함께 이 한밤을 이 한밤을 얘기하고 싶구나’라는 대목이 흡사 그들 부부의 생활상을 노래하고 있는것 같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시를 읽던 나씨는 절로 희미한 가락을 만들어 가고 있었고 얼마 뒤 가곡 <달밤>이 탄생한 것이다.
당시 한국가곡의 흐름은 서정적인 대중성과 예술가곡의 중간형태가 많았지만 나씨는 <달밤>에서 당시의 이런 경향을 깨고 예술성을 강하게 내세웠다. 나씨는 사람들이 <달밤>을 좋아하는 이유를 가락이 기악적이고 오페라 아리아와 같이 길게 뽑아내는 멋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나씨는 당시 흑석동 사택에서 살았는데 밤이면 곧잘 부부가 함께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듯 달밤을 노래했다고 한다. <달밤>은 1949년 서울음대 주최 학생음악 콩쿠르의 지정곡으로 채택되었는데 당시 학생이던 소프라노 황영금씨가 이 곡을 불러서 1등을 차지했다. 나운영씨는 <달밤>을 본인의 출세작이라고 했다. 그보다 먼저 <가려나>,<아! 가을인가>를 작곡했었지만 그를 작곡가의 반석에 올린것은 <달밤>이라고 한다.
종교계에 몸담고 있던 나씨는 예술가곡이외에도 시편 46편<피난처 있으니>,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등 많은 찬송가를 작곡했으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는 찬송가이지만 이미 가곡처럼 대중화되어 널리 알려졌다.
그의 대표적 가곡은 <달밤>,<접동새>,<강 건너간 노래>,<별과 새에게>,<산> 등이 있는데 그의 작품은 항상 부인 유씨가 초연을 맡았다.
글 : 내마음의 노래
참고문헌 : 한국의 명가곡을 찾아서(지철민 저, 무궁화사, 1973)
가곡의 고향(이향숙 저, 한국문원,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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